출판사 리뷰
17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이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이라고 불렀다. 왕의 은혜로움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위무가 사해에 떨치었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자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413년) 9월 29일에 산릉으로 모셨다. 이에 비석을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 이 책은 《고정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광개토대왕》(2004)의 개정판입니다.
원고 전체를 새롭게 다듬고, 표지와 본문 디자인도 변경했습니다.
초등 저학년을 위한 우리 인물이야기 세종대왕, 김구, 장영실, 이순신, 백석 등을 다루며 초등 인물이야기 장르에서 굳게 자리 잡은 산하의 우리 인물이야기 시리즈. 그 여덟 번째 책 <고정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광개토대왕>의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역사 기록물인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등을 토대로 해서 저학년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 쓴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힘차고 웅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호방한 필치의 그림을 덧붙여 광개토대왕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몽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BC 37년부터,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멸망하기에 이르는 서기 668년까지의 고구려 역사를 정리한 고구려사 연표를 부록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야 그 존재가 다시 확인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광개토대왕비에 얽힌 자세한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정리해 두어 어린이들이 고구려사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일본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었던 우리의 옛 역사가, 중국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의 고구려사본기 등을 통해 밝혀진 고구려사를 알고, 광개토대왕 재위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일본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어떤 인물일까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생존에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불리었습니다. 사후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잘 다스린 위대한 임금’이라는 뜻의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를 갖게 되었는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또는 광개토태왕, 호태왕이라 부릅니다.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웅대했으며, 고국양왕 3년(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여 얻은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로 처음 사용했을 만큼 자주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백제의 관미성을 함락시켰고, 빼앗긴 땅을 되찾으러 침공해 온 백제를 격퇴해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많은 전리품과 함께 동생을 인질로 잡아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백제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왜를 내세워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은 왜를 가야 지역까지 추격해 궤멸시켰습니다. 당시 고구려 서쪽에 자리했던 모용씨의 후연국과는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400년 후연왕 모용성이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 오자, 광개토대왕은 숙군성을 공격하고, 요동 지역을 차지합니다. 또한 계속되는 후연의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요하 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할 뿐 아니라, 후연이 멸망한 후 등장한 북연과 우호 관계를 맺습니다. 또한 북으로는 거란을 정벌하고, 동부여를 굴복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쳐, 광개토대왕의 재위 기간 동안 64성과 1,400여 촌락을 얻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이르게 했습니다.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국가의 내실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는 등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살림을 돌보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에 의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무엇이 적혀 있을까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19대 임금이었던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현재 이 비석은 중국의 고구려 유적 복원 사업 계획에 따라 방탄 유리벽에 둘러싸인 채 중국의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서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왕계에 얽힌 이야기와, 광개토대왕이 벌인 전투와 그에 따른 성과를 연대별로 기록하고,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 등을 빼곡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경위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담은 광개토대왕비가 줄곧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일본이 식민 지배를 위해 비문을 조작했다는 의혹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 즉위년인 신묘년(391년)조의 기록에서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의 주체를 왜로 보는 일본 측의 주장과, 고구려로 보는 우리 측 주장이 아직까지도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엽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할 수 있는 증거를 내세우기 위해 일본이 비문을 날조했다는 조작설이 있기에 일본과 우리나라 간의 비문 해석 논쟁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비문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비해, 왜와 거란의 일파인 패려는 타파하거나 공파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생각하는 천하 안에 넣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가장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던 후연에 대한 내용은 아예 비문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이렇듯 당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게 중국은 별개의 천하에 속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별개의 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갖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