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봉환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출간됐다. 사단법인 아태평화교류협회 안부수 회장이 지난 2004년부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사업에 착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수백 차례 탐방하고, 2009년, 2010년,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177위의 희생자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해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가 발간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한인은 총 800만 명(국내 650만, 국외 150만)에 이르며 이중 성동원(위안부)은 약 20만 명으로 학계에서는 추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인 유골이 해외에 있을 텐데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태무심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골봉환을 민간단체가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료 수집에서부터 유골 발굴과 수습, 봉환에 걸리는 오랜 시간, 막대한 비용, 복잡하고 까다로운 국내외 행정절차는 정부기관이라야 해결할 수 있다. 저자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온전히 자력으로 이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그 지난한 과정과 숱한 우여곡절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출판사 리뷰
온몸을 던져 써내려간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이야기 출간
2004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177위의 유골봉환 과정 기록
정부·기업 지원 없이 민간 스스로 추진한 지난한 과정 엮어
강제동원의 뼈아픈 과거사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일깨워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공원 조성은 우리 겨레의 중대한 숙원임을 제시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봉환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출간됐다. 사단법인 아태평화교류협회 안부수 회장이 지난 2004년부터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봉환 사업에 착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수백 차례 탐방하고, 2009년, 2010년,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177위의 희생자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해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가 발간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한인은 총 800만 명(국내 650만, 국외 150만)에 이르며 이중 성동원(위안부)은 약 20만 명으로 학계에서는 추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인 유골이 해외에 있을 텐데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태무심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골봉환을 민간단체가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료 수집에서부터 유골 발굴과 수습, 봉환에 걸리는 오랜 시간, 막대한 비용, 복잡하고 까다로운 국내외 행정절차는 정부기관이라야 해결할 수 있다. 저자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온전히 자력으로 이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그 지난한 과정과 숱한 우여곡절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유골봉환 위해 아시아태평양 곳곳 수백 차례 탐방
저자가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탄광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같이 일하다 죽은 사람들 얼굴이 자꾸 어른거려. 그 사람들 유골을 찾아 고향땅에 묻어주고 싶어.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버릇처럼 중얼거리다가 저자가 돌이 되기도 전에 숨을 거뒀고, 어머니는 이 얘기를 저자에게 수시로 일러주었다.
삼십대에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벌기도 했던 저자는 세파를 겪으며 돈이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2004년, 불혹에 접어든 저자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궁리를 하다가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게 되고, 이것은 저자의 운명이 된다. 마침 2004년 노무현·고이즈미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강제동원 유골 봉환에 대한 물꼬가 터졌고, 저자는 현지답사를 통해 오지에 방치된 무수한 한인 유골을 목도하게 된다. 낯선 땅에서 노예처럼 일하다가 지치고 병들어 죽으면 개처럼 묻혀버리는 처참한 현장에서 그들의 영혼을 반드시 조국으로 모시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진행되지 못하고 불안감이 수시로 밀려오던 2007년 7월경, NHK 계열의 한 방송사에서 유골 봉환사업과 관련해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 저자는 “이 추세대로 간다면 한인 유골은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인 유골이 묻혀 있는 장소만 알려 주십시오. 저는 어떤 보상도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했고, 일본 각계각층에서 저자를 돕겠다는 연락이 쇄도한다.
수렁에 빠진 유골봉환 사업, 방송 호소 통해 반전
우리 정부의 비협조와 숱한 암초를 극복하고 2009년 1차 110위, 2010년 2차 21위의 유골을 봉환한 저자는 2011년에 일본 후쿠시마를 발바닥이 닳도록 다닌 끝에 유골 62위를 수습해 바닷가 사찰 납골시설에 보관해두고 3월 8일 잠시 귀국한다. 사흘 후, 쓰나미가 후쿠시마를 뒤덮는 대비극이 일어난다. 천우신조로 죽음을 피한 저자는 방사능으로 오염돼 출입이 통제된 유골보관 장소에 ‘모든 책임은 나의 일방적인 것’이라는 자술서를 작성하고 들어간다. 하지만 쓰나미에 휩쓸려간 62위의 유골은 영영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2014년, 사업자금이 바닥나고 일본에 있던 정신적 지주마저 작고하면서 저자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이듬해, 아태평화교류협회 일본본부에서 보내온 200만 엔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유골 봉환 자료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취지에 공감한 서울역 노숙자들이 성금을 모으고 전시회 질서를 잡아주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 기적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선 저자는 그해 12월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피해조사·지원 컨트롤 타워인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위원회) 폐지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펼치고, 국회와 청와대에 청원과 탄원서를 제출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강제동원시설(군함도 등 7개) 세계문화유산 등재 반대 범국민서명운동, 대일항쟁기위원회 소장 강제동원 기록물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범국민 서명운동에도 앞장선다.
사업자금 바닥났을 때, 일본의 동지와 서울역 노숙자가 일으켜 세워
저자의 꿈은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을 모시고 위로할 수 있는 독립묘역,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평화의 공원, 세계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인류애 실현의 공원을 만드는 것을 남은 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 저자의 개인사라는 씨줄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이라는 날줄로 엮은 이 책은 저자의 꿈이 단순히 한 개인의 꿈이 아니라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되는 이 시점에 우리 겨레의 중대한 숙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밖에도 2013년 일본의 사단법인 청진회와 손을 잡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골 발굴, 추모, 유골 모국 봉환과 아태 지역 평화와 공존의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 업무제휴 협약을 체결하게 된 사연, 지난 8월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게 된 과정과 성과도 이 책의 무게를 더해준다. 또한 대일항쟁기위원회가 작성한 ‘대일항쟁기위원회 존속에 관한 의견서’ 등의 자료를 통해 정부 차원의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피해조사·지원 컨트롤 타워가 왜 부활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나를 이 길로 이끈 사람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내가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핏덩이를 놔두고 어떻게 숨을 거두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어머니한테서 들으며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면서기에게 속아서 후쿠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다. 2년만 일본에 가서 일하면 적잖은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곳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사람이 살 곳도 일할 곳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동료들은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임금 착취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렸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하 1,500미터 막장에서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좁은 갱도에 누워 탄을 깰 때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동료들이 흙더미에 깔려 생매장 되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봐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없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소년이 감독의 잔인한 구타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맥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아야 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지켰다.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땅에 꼭 묻히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우리 엄마가…….”
“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
_‘아버지의 말씀’ 중에서
청진회의 오랜 소원을 타인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아태평화교류협회는 남북 화해와 평화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오면 북한의 인도주의와 평화애호는 우리 협회의 정성과 더불어 청진회의 아픔을 거둬주는 일에서 아름답게 빛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_‘청진의 아픔, 일본 청진회와 손을 잡다’ 중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유골 봉환 자료전시회를 5일 간 열었다. 그 기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서울역 광장의 노숙자들이 회의를 열어 이 뜻 깊은 전시회를 도와야 한다고 마음을 모은 것이었다. 노숙자들은 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모으고, 전시회 질서를 잡아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었다. 서울역을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숙자들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던 나는 이 작은 기적으로 새 희망을 품었다. 노숙자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는데 힘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추스렸다.
_‘서울역 노숙자가 일궈낸 작은 기적’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안부수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2004년부터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한인 유골 발굴과 고국 봉환의 일에 뛰어들어 지난 십수 년 동안 수백 차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탐방했다. 2009년, 2010년,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민관 통틀어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177위의 노무인력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해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했으며, 수습은 했으나 아직 고국으로 모셔오지 못한 약 3,000위의 유골을 일본에 보관해놓고 있다. 2018년 현재 사단법인 아태평화교류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일본·중국·필리핀·태국·베트남·마샬제도·중앙아시아 등 아시아태평양 각처에서 가입한 아태협 회원은 현재 85만여 명에 이른다.
목차
1부
아버지의 말씀
2004년 유골 봉환사업에 뛰어들다
무릎으로 기어서 천 리를
2009년 1차 110위 봉환
2010년 2차 31위 봉환
후쿠시마 쓰나미와 62위
2012년 3차 36위 봉환
아시아 곳곳을 찾아다니다
청진의 아픔, 일본 청진회와 손을 잡다
서울역 노숙자가 일궈낸 작은 기적
대일항쟁기위원회의 부활과 상설화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접근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공원 조성
못 다한 이야기
2부
인터뷰 기사 ① : 파이낸셜뉴스(2018. 5. 11)
인터뷰 기사 ② : 브레이크뉴스(2018. 8. 24)
특별기고 : 파이낸셜뉴스(2018. 8. 24)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 존속에 관한 의견서(2015. 12)
청와대 탄원서(2015. 12. 13)
국회 청원서(2015. 12. 1)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아태평화교류협회가 걸어온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