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19년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내용, 3·1운동 관련 유적, 3·1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대구 인물들의 활동과 유적을 전국 상황과 맞추어가며 해설하는 책이다. 2019년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기념하여 출간하였다. 많은 현장을 최근 사진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형상화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독립운동 유적을 답사하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출판사 리뷰
2019년은 3 · 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우리 민족사의 뜻 깊은 한 해이다. 1910년 우리 겨레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고, 그로부터 35년 동안 수탈과 억압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35년 내내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펼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독립운동정신을 발휘했다.
우리의 3 · 1운동은 당시 제국주의의 혹독한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수많은 피지배 · 약소국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질러 그들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서게 했다. 3 · 1운동을 지켜본 중국 민중은 일본의 간섭 척결과 친일파 처단을 외치면서 5 · 4운동을 일으켰고,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 등도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3 · 1운동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와 대결하는 우리를 보고 ‘동방의 빛’이라고 찬탄했다.
3 · 1운동을 시작한 우리 겨레는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19년 4월 11일 이래 우리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고, 그 이후 무수한 지사들의 부단한 투쟁에 힘입어 1945년 드디어 광복을 쟁취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뜻에서 우리는 2019년을 앞둔 지금, 3 · 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리는 불꽃들을 전국 방방곡곡에 활활 피워 올리고 있다. 100년째 타오르는 들불이다. 온 나라의 국민들이 한결같이 홰를 들고 불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 날의 독립정신을 빈틈없이 오늘에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우리도 한 자락 뜨거운 불길을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들꽃이 모여 눈부신 꽃밭을 이루고, 조그만 물방울이 모여 창대한 폭포를 만들어내고, 민들레 홀씨만한 불씨가 모여 태산을 뒤엎는 화산을 이룬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3 · 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펴내는 오늘, 우리의 이 작은 애씀이 겨레의 앞날을 창창하게 밝히는 과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가늘지만 결코 끊어질 리 없는 한 가닥 강인한 힘줄이 되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소망한다. 배한동(전 대한정치학회 회장, 전국 국공립대 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상임대표)
이현수李賢壽는 1896년 7월 26일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 686번지에서 출생했다. 1915년 3월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1917년 9월 중국에 가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사귀게 된 데서 유래한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모친 별세 기별을 받고 잠시 귀국했던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사실을 듣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20년 4월 임시정부 재무부 서기가 되었는데, 그 길로 바로 임시정부 산하의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대략 여섯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1920년 8월 이현수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그의 임무는 독립운동 관련 문서 배포, 독립공채 모집, 방한하는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일 등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그는 달성군 유가면의 이상철, 화원면의 임원조, 가창면의 이경만에게 국내 연락기관 책임을 맡겨 활동하게 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미국으로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발송했다. 또 자신이 발행한 영문 잡지 《자유》를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과 언론사에 배포했다.
그는 또 달성군 달서면 출신의 정덕진丁德鎭과 함께 대구와 경북 각지의 친일파 군수 · 면장 등 관리들과 부호들에게 경고문, 물품 불구매 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일제와 친일파들이 판매하는 물품을 사지 않겠다는 통지서), 납세 거절 협박문納稅拒絶脅迫文 등을 발송하는 한편 이를 대구 부내府內(요즘의 시내) 길거리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힘썼다.
1923년 1월 24일 일제 경찰의 포위망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한 그는 일단 자수를 하였다. 이때 관련자 42명도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현수는 1924년 5월까지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1925년 4월 이현수는 장남 이정호李貞浩(1913∼1990)를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현수는 김구가 1930년에 조직한 한국독립당 광동 지부의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한성》을 발행했고, 1938년에는 무정부주의 단체 조선혁명자연맹과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남경에서 창립한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조직에서 기관지 편집위원회의 주임으로 일했다.
1942년 이현수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게 되자 임시정부의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었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부 차장을 맡았다. 그 후 1945년 1월에는 내무부 차장, 5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을 맡았다.
장남 이정호도 1942년 10월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에 선출되고, 1943년 외무부 총무과장, 1944년 외무부 정보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차남 이동호는 화북에 주둔 중인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3부자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환국한 이현수는 조선대중당을 조직하여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 운동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납북되었는지 월북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1948년 총무처 정훈국장 등을 역임한 장남 이정호는 그 이후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했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차남 이동호는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단원들은 경북 영주 풍기의 '광복단'과 통합하여 '대한 광복회'를 결성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을 최초로 해설한 책 <신암선열공원>을 펴낸 민간단체로,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과 경술국치일 국가추념일 지정 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8월 25일에는 대한광복회 창립 108주년 기념식을 결성지인 대구 달성공원에서 최초로 거행하기도 했다.
지은이 : 정연지
홍익대 일반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목차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대구3·1운동 주요 유적
일제의 침략과 의병의 봉기
1910년대의 독립운동과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대구의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대구 출신 임시정부 소속 독립운동가와 그 유적)
일제 강점기 10대 청소년들의 독립운동
자료 : 대구의 지역별 독립운동 유적
부록 : 조선 후기∼1945년 연표·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