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파란시선 42권. 2013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등단한 금란의 첫번째 시집. '벽', '분홍이 나를 분홍이라고 부를 때', '모빌의 감정', '창신동', '그림자놀이', '아베마리아를 놓치기 전에', '빵의 시간', '일요일의 자세', '소녀여 일어나라'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출판사 리뷰
어디선가 검은 사과를 베어 먹은 얼굴이 다가온다“금란의 시에서 “얼굴”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제유(提喩)처럼 사용된다. 「벽」에서의 “등”이 신체의 일부이면서 한 인간이 살아온 “세월”의 축도(縮圖)이듯이, 몇몇 시들에서 “얼굴”은 신체의 일부이면서 한 개인을 가리키는 기호로 쓰인다. 가령 “우울하거나 명랑한 얼굴들이 이제 도착한다”(「초대장 1」)라는 진술이 그렇다. 그런데 「여러 가지의 얼굴」에 등장하는 “얼굴”은 조금 다르다. 화자에게는 “수많은 이름”과 “여러 개의 얼굴”이 있다. 여기에서 “얼굴”은 색깔로 표현되는 내면의 감정과 유사하다. 화자는 자신을 가리켜 “생일이 없는 나이를 먹고”라고 쓰고 있다. “생일”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개의 얼굴”이 생물학적인 출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인 듯하다. 화자는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를 ‘숲이 태양을 가린 캄캄한 길’이라고 말한다. 화자의 시선의 방향에 따라 길에는 두 방향, 즉 ‘앞’과 ‘뒤’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이 “뒤를 돌아볼수록 견딜 수 없는 정글이 생겨나고/사방으로 흩어진 이름을 기억하며/참고 있던 얼굴이 쏟아진다”라고 고백한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과거를 회상한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유년을 떠올릴 때면 “정글” 속에 갇혀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흩어진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그 이름들과 더불어 “참고 있던 얼굴”이 쏟아진다. 얼굴이 쏟아진다는 것, 또는 쏟아지는 얼굴은 “검붉은”, “새파란”, “샛노란” 같은 감정과 연결된다. 이는 유년 시절로 리비도를 집중할 때마다 시인의 내면에서는 상처가 덧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의 얼굴」에 등장하는 “오래전에 죽은 내 얼굴”이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시인은 개인의 ‘내적 감정’을 주머니에 담겨 있는 얼굴의 이미지로 간주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얼굴은 주머니에 담기고, 또 어떤 얼굴은 주머니가 찢어져 “바닥으로 엎질러지고 마는” 경우도 발생한다. 감정에 대한 상상력이 이러하기에 어떤 감정, 즉 “웃자란 얼굴”은 주머니에 담기지 않는가 하면 바닥으로 쏟아지기도 한다. 주머니에 담기지 않거나 바닥으로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화자가 캄캄한 길 위에서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숨길 곳이 없는 얼굴들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금란의 시에서 이 느낌을 떨쳐 내는 유일한 방법은 현대적 풍경에 대해 “맛있는 상상”을 펼치는 순간이다. “상상”은 시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늦추고, 고통의 시간을 위로하며, 그리하여 일상적 풍경을 한층 흥미롭게 만든다. 이것들이 뒤섞일 때 금란의 시는 멜랑콜릭해진다.”(이상 고봉준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금란 시인은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2013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현재 ‘편두통’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얼굴들이 도착한다>는 금란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검정에 대한 오독젖은 빨래처럼 누워 있는 고양이의 사체
이해할 수 없는 페이지를 뒤적이는 손가락처럼
무심히 지나친 길에 누운 고양이를 다시 펼치고 싶다
바퀴보다 빠르게 굴러가는 생각들
고양이의 그림자가 바퀴에 매달린 채 따라온다
고양이를 재구성한다
집 나간 어미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어둠이 내려앉아 캄캄해진 거라고 상상해 보자
새빨간 상상이 야생의 사과를 익어 가게 하고
바짝 익은 빵처럼 갈라지는 생각들
고양이 속에 빠진 고양이가 팽창하며
뻔하거나 도도한 검정이 와락 스며들어
명랑한 비명이 온몸에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나는 강렬한 찰나에 푹 젖고 있다
고양이의 늘어진 음모를 이해하고
둥근 등이 동그라미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완벽한 고양이가 내 품으로 달려들어 뜨거워질 때
어쩌면
우연히 떨어진 검은 폭설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표정을 잃은 달빛이 까맣게 허물어졌을지도 모르는 일 ***
고양이주의보오전 9시
골목 카페의 화분과 테이블
그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 뛰어든다
햇볕도 쿵 내려앉는다
화분의 와장창 소리가 창밖으로 튀어 나갈 때
카페 앞을 지나가던
남자의 늘어진 추리닝이 운동화 끈에 걸려 넘어진다
고양이의 출몰과 노골적인 햇볕은
오늘 아침의 느닷없는 브런치 메뉴
목적 없는 발걸음이 허물어지고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닌 것이
카페와 골목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 놓는다
담장과 묘지에 붙은
고양이주의보가 바람을 타고 골목으로 날아온다
죽은 공간 속으로 뛰어든
고양이의 발톱에서는 피가 흐르고
빨랫줄에 걸린 내 블라우스는
젖은 채로 뱅글뱅글 돌고 있다 ***
작가 소개
지은이 : 금란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2013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편두통’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시집 <얼굴들이 도착한다>를 썼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013 벽
015 분홍이 나를 분홍이라고 부를 때
016 모빌의 감정
018 창신동
020 그림자놀이
022 아베마리아를 놓치기 전에
024 빵의 시간
026 일요일의 자세
027 소녀여 일어나라
028 검정에 대한 오독
030 어린이 보호 구역
032 잘 지내
034 난독증
036 반갑습니다
제2부
039 눈사람
040 세 여자
042 하비슨
044 이미 당신은 삼인칭
046 사소한 가출
048 장미 레시피
050 맛있는 상상
051 선물
052 녹슨 꽃
054 초대장 1
056 소파는 기억한다
058 스포일러
060 햇빛, 뛰어내리다
062 여러 가지의 얼굴
제3부
065 오전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
066 고양이주의보
068 완벽한 불판
070 새로 만들어진 낭만
072 수집가
074 사각지대
076 수면내시경
078 우울들
080 알비노, 흑인 소년
082 안녕
084 통행금지
086 새는 손잡지 않고 먼저 난다
088 사과의 그늘
089 지속되는 의자 1
090 목련 너머
제4부
095 가까운 새
096 붉은 얼굴
097 지속되는 의자 2
098 이분법의 미학
100 사슴을 그려 본 적 있다
102 캔버스 위에서 잠든다
104 괄호에서 멈춘 이야기
106 아이는 끝났으나
107 집 밖에서
108 폭염
110 구겨졌던 것을 다시 펴 보니
112 초대장 2
114 동사무소로 간다
116 거울이면서 벽이면서
117 마르지 않는 옷
118 해설 고봉준 과거와 현재, 그사이에서의 몽유(夢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