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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주의자
파란 | 부모님 |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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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하다

1

아버지는 애매한 나이에 죽었다. 비상하는 새보다 조롱에 갇힌 새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좀 더 일찍 죽었다면 나는 새장을 짜는 기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더러운 옷을 입고 누운 채로 구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다가 갇혀 버린 검은 새를 상상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침묵으로 일관할 때, 형의 악보에 검은 잉크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형의 여자들과 불화했다. 그들의 메모를 고의적으로 형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허술한 방문을 잠그고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청춘의 헛걸음을. 형의 이름이 검둥이 조(joe)였다고 해도, 어머니가 이슬람교도였다고 해도 나는 나에 불과하다. 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서 처음 목격된 흉터다.

2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들, 신분을 알 수 없는 동료들과 철 지난 모자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장례식들, 순진한 식당과 정류장들. 내가 나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런 것들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누군가 애매한 나이에 죽을 때, 남겨진 자들은 예외 없이 그릇된 판단을 한다. 식탁을 부수고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땐 이미 방문을 잠글 수도 없다. 어느 날, 어머니가 평생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의 가난이 자라 담쟁이넝쿨처럼 앙상한 무릎을 타고 머리끝에 올라선다. 그건 고결함 때문이 아니고 무심함 때문이란 걸 당신은 아는지. 서랍을 열고 알약의 색깔을 주판알처럼 맞춰 보던 밤, 이 모든 것은 나는 나에 불과하다는 신념이 사주한 풍속이었으니, 불과하고 또 불과하다. ***

우아한 경솔함

우리는 말을 했어요
모욕은 언제 가장 아름답습니까
수선화가 우리 집 옥상에 피었습니다
기차는 북쪽으로 달려갔고요
우리는 말을 했어요
기쁨은 어디에서 타락합니까
감자를 먹으면 노래를 불러 주세요
병을 감춘 늙은 개와
자부심을 갖고 싶은 빈자의 아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냥함은 누구의 최선입니까
박해와 수난은 어느 상점의 진열품입니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세요
우리는 말을 했어요
길고 긴 침묵의 분별력에 대해
지금 지나가는 사람에게
힘껏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깊고 우아한 경솔함에 대해 ***

섹스보다 안녕

섹스보다 안녕, 멀리서 담배 연기처럼 흔들리는 당신이 내게 말했다. 내일 아침엔 배가 뜰 거야. 우수와 농담을 다 버리고 이곳을 떠나자. 망명지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서러운 짐승의 영은 숲으로 돌아가라. 섹스보다 안녕, 초원에서 추는 왈츠의 리듬과 절지동물들의 이름을 외울 것, 우리의 연애는 거기에서 시작되었지. 습관적으로 접두사를 사용하고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을 때 당신은 완성된다. 안녕의 상상력을 흉내 낼 수 없는 섹스를 내버려 두자. 미지는 미지에서 오는 것, 섹스보다 안녕, 멀리서 바다처럼 흔들리는 당신이 내게 말했다. 화석처럼 굳어 있는 사랑을 만지고 마침내 우리는 헤어지자. 당신은 나를 아는 최후의 사람, 우리는 모두 섹스보다 안녕. 당신은 아는가, 우리의 섹스는 우리가 통과했던 가난처럼 귀여웠다. 당신이 흔들린다, 당신을 흔든다. ***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2012년 <시인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소설집 <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 <악취미들> <랑의 사태>,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꺼져라, 비둘기>, 경장편소설 <미치지 않고서야>, 산문집 <불안의 황홀>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소설가의 태도>, 인터뷰집 <세속 도시의 시인>, 시집 <권태주의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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