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한국 최초의 ‘불교한문 문법서’
‘불교한문 해석을 위한 공구서’
《불교한문 해석법》 출간!
붓다의 가르침에 이르는 두 길, 팔리어와 한문
‘불교한문’이라 하면 일단 어려움과 난감함이 밀려온다. ‘‘불교’라는 심오한 철학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데, 게다가 ‘한문’으로 쓰여 있다면 쉽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불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인도에서 북쪽으로 동아시아로, 남쪽으로 동남아시아로 퍼져간 종교이자 철학이다. 19세기 말부터는 유럽과 미국으로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전 세계 곳곳에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불교는 크게 두 가지 언어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팔리어요, 다른 하나는 한문이다.
팔리어 경전과 한문 경전은 같으면서 다르다. 그 출발은 붓다의 가르침으로 같았을 것이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사유체계와 문화 등이 판이한 곳에서 번역과 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서양인들 가운데서 선불교에 심취한 이들은 대개 한문 경전에서 출발한 불교를 접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문은 이제 중국에서조차 거의 죽은 문자로 취급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14억 중국인 가운데서도 읽거나 쓸 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거의 천 년 이상 한문을 사용한 한국과 일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오늘날 ‘한역 대장경’과 ‘불교한문’은 매우 위태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의 한글 번역한국에서는 삼국 시대에 전래되어 고려시대까지 독창적인 불교철학과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조선이 성리학 국가를 표방하면서 불교가 수백 년 동안 억눌려 왔는데, 역설적으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로 말미암아 불교경전이 한글로 번역되는 일이 일어났다. 『금강경언해』, 『능엄경언해』, 『불설아미타경언해』 등등. 그리고 이는 오늘날 한글대장경의 완간으로 이어졌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대단한 역사라 하겠다.
1964년에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이 발족된 뒤로 『장아함경』부터 차근차근 번역이 이루어져 마침내 2001년에 한글대장경 318권이 완간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대장경 간행에 버금가는 대역사였다. 이 대역사가 긴요했던 까닭은 한문에 익숙한 세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한글로 쓰인 경전과 논서 등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글대장경의 완간은 참으로 긴요하고 중대한 결실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번역 작업은 완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언어와 문자 생활도 계속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전들과 논서들에 공통되거나 특수한 어법들이 번역과 해석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완간된 한글대장경이 과연 더 이상 수정이 불필요한 완전무결한 번역일까? 문제는 번역에 오류나 실수가 있더라도 불교한문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그것은 그대로 답습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선학(先學)들처럼 처음부터 한문으로 쓰인 경전들과 논서들을 통해 불교를 배우고 익히는 이들이 드물어졌으므로 보이지 않는 장애는 커진 셈이다.
물론 불교한문을 모른다고 해서 불교철학을 아주 못할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타락하거나 기복신앙으로 기울면서 그릇되게 이해되어 온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경전들과 논서들을 이루고 있는 ‘불교한문’을 모르고 불교철학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제 더욱 한문이 생활에서 멀어지고 있는 판국이니, 한역 대장경의 번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올바른 철학적 이해를 위해서도 ‘불교한문’에 대한 이해는 절실하다.
불교한문의 문법서이자 해석서고전학자 정천구 선생이 저술하고 민족사에서 출간한 『불교한문 해석법』은 바로 이런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책이다. 『불교한문 해석법』은 한국 최초의 ‘불교한문 문법서’ 또는 ‘불교한문 해석을 위한 공구서’라 할 수 있다. 그 구성과 체계적인 서술로 볼 때, 동아시아 최초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문으로 단단하게 봉해진 법문을 밀치고 들어설 이는 옛날에도 적었고, 오늘날에도 적다. 앞으로는 더욱 적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 적은 사람이 한문을 익히지 않은 대중을 위해 이 법문을 제대로 밀어서 열어 두어야(번역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한문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선결요건이다. 그러나 그저 익혀서 될 일은 또 아니다. 그 오묘한 이치를 풀어 밝힐 수 있도록, 즉 온전히 해석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한다. 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이른바 문법(文法)이다. 불교경전을 이루는 한문 즉 불교한문의 문법은 법문의 관건(關鍵)이다.”
한문으로 쓰인 대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이 ‘고려대장경’ 곧 ‘팔만대장경’이다. 과연 ‘한글대장경’이 이에 걸맞은 대장경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문으로 불교 경전들과 논서들을 번역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한글로 번역하는 데에도 그만한 세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한문과 점점 멀어지는 세대가 되어간다면, 관건이 되는 불교한문 문법서를 우선 마련해야 할 것이다. 『불교한문 해석법』이 그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일본에서 불교한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문법 관련 서적이 여럿 나온 적이 있으나, 문법적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서술하지는 못했다. 대체로 특정한 경전이나 논서, 어록 등을 해석하면서 문법적 요소를 서술했다. 이런 책은 국내에서도 여럿 출판되어 있다. 또 불교 경전들과 논서들을 한역(漢譯)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 불교를 전파한 불교한문의 본고장 중국에서도 불교한문의 문법적 사항을 이만큼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 있는지, 아직 보지 못했다.
『불교한문 해석법』은 제1장에서 불교한문의 ‘품사와 문장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제2장부터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부정사, 개사(전치사), 연사(접속사), 문말 조사 등의 품사들과 특수한 용법의 어휘들에 대해 두루 다루었다. 이를 위해 호한한 대장경 가운데서 대승불교에서 중시하고 또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금강경』과 『법화경』, 『유마경』, 『화엄경』, 『능엄경』 등으로부터 예시들을 끌어왔다. 풍부한 예시들을 통해 문법적 사항들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어 여느 문법서처럼 딱딱하지는 않으며, 예시들 자체가 불교철학의 심오함을 맛보게 해주는 구실도 해주므로 꽤 유용하고 유익하다.
『불교한문 해석법』에서 예시로 들어 번역하거나 해석한 문장들 가운데는 기존의 번역들과 사뭇 다른 번역이나 해석이 적지 않으며, 이 책의 번역과 해석이 훨씬 명료하게 또는 명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불교 경전들이 보편적인 문법 위에서 매우 엄정하게 한역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글로 번역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사항을 결코 도외시할 수 없음을, 해서는 안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한문 해석법』은 어렵고 까다롭게 느껴지는 불교한문을 어떻게 ‘한글로’ 번역해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아무리 불교한문의 문법에 대해 깊이 알고 있더라도 자국어(한글) 실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코 온전한 해석, 훌륭한 번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불교한문 해석법』은 다의적인 한문을 문맥에 따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실례 또한 풍부하게 제공해줄 것이다. 이는 저자가 한국문학을 전공한 데에 기인하기도 하다.

머리말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인데, 무얼 가르친다는 것인가? 고(苦)·집(集)·멸(滅)·도(道) 네 가지 진리를 가르친다. 이 네 가지를 가르치는 데 무슨 말을 그리도 많이 했기에 ‘팔만대장경’이니 ‘팔만사천법문’이니 하는가? 당연히 ‘팔만’이라는 숫자는 무수히 많다는 뜻일 텐데, 왜 가르침이 그토록 많은 것인가? 궁극의 진리는 하나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고 중생들의 근기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를 달리 불도(佛道)라고도 한다. 그것은 ‘붓다의 길’이면서 ‘붓다가 되는 길’이다. 이미 싯다르타 고타마가 출가해서 갖가지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이른 길이기도 하지만, 그를 본받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무수한 중생이 또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길,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불교는 붓다와 중생 사이에 놓인 길이면서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니, 불교(佛橋)라 말해도 되겠다.
참으로 붓다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복되다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붓다가 자비심으로 무수히 많은 길을 펼쳐 놓고 다리를 놓아두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화엄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 이를 초발심(初發心)이라 한다”라고 하고 또 “초발심을 내면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깨닫겠다는 마음만 낸다면 깨달음을 얻는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일단 기뻐하고 볼 일이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든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데, 어찌 그 많은 길을 열고 다리를 놓으셨을까?
다시 『화엄경』으로 돌아가면 맞닥뜨리게 되는 대목이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초발심으로부터 보살행을 닦으시고 으뜸가는 정각(正覺)을 이루셨다.” 그렇다, 보살행을 닦아야 정각을 이루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길은 있으나, 그 길을 닦아야 하는 이는 낱낱의 중생들이다. 붓다가 닦는 일은 없다. 닦는 일이 없어 붓다 아닌가. 다리가 있으나, 그 다리를 건너야 하는 이 또한 낱낱의 중생들이다. 붓다가 건널 일은 없다. 이미 건넜으므로.
우리가 불교경전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전마다 갖가지 길을 담고 있고, 경전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갈 다리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고 그 다리를 건너야겠는데, 경전 속에 길도 다리도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어서 찾아보고 싶은데, 통 보이지 않는다. 청맹과니 중생이라서 그렇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지당한 말이다. 아뿔싸, 어쩔거나! 길은 있는데, 보이지 않으니.
붓다는 마흔아홉 해 동안 팔만사천법문을, 그리 많은 ‘법문(法門)’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리고 붓다가 열반에 드신 뒤에 그 제자들이 법문이라고 푯말까지 떡 하니 세워 두었는데, 이 중생들은 그 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도무지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 쯧쯧! 그러니, 어디 길이 있다 한들 한 발짝이나 내디딜 수 있겠는가? 다리가 있다 한들 무지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 법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면, 읽고 이해하고 깨닫는 눈이 있어야 한다.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오래 전부터 맞닥뜨린 법문은 ‘한문(漢文)’으로 세워져 있었다. 옛날에도 그 한문을 제법 터득한 이라야 법문을 밀칠 깜냥이나 되었다. 하물며 오늘날에야! 물론 이제는 주요한 많은 경전들이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굳이 한문을 익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이가 있으리라. 과연 잘 된 번역이 얼마나 될까? 설령 잘 된 번역이 있다 한들 그것으로 충분할까? 번역은 끝없이 새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에 맞는 번역이 또 필요하기에.
한문으로 단단하게 봉해진 법문을 밀치고 들어설 이는 옛날에도 적었고, 오늘날에도 적다. 앞으로는 더욱 적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 적은 사람이 한문을 익히지 않은 대중을 위해 이 법문을 제대로 밀어서 열어 두어야(번역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한문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선결요건이다. 그러나 그저 익혀서 될 일은 또 아니다. 그 오묘한 이치를 풀어 밝힐 수 있도록, 즉 온전히 해석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한다. 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이른바 문법(文法)이다.
불교경전을 이루는 한문 즉 불교한문의 문법은 법문의 관건(關鍵)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게 해 줄 열쇠다. 우리나라에는 이제까지 이런 열쇠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제는 필요하다. 더 이상 한문의 시대도 아니고, 또 그저 백 번 읽으면 문리(文理)가 절로 트이리라는 요행을 바라는 것도 적절하지 않기에.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읽어내어 그 오묘한 이치의 맛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이 열쇠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여기 ‘불교한문 해석법’이라는 책을 내놓으니, 독자들께서는 법문을 열어줄 열쇠쯤으로 여겨주신다면 고맙겠다. 물론 이 책으로 충분하지 않을 줄 안다. 빠진 것도 적지 않을 것이고, 잘못 쓴 부분도 있을 것이다. 번역이나 해석에서도 착오가 있으리라. 눈 밝은 독자의 따끔한 지적과 질책을 기대한다.
20대에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불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또 유교와 불교의 고전 몇 권을 번역하면서도 ‘한문 문법’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능력도 모자라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10여 년 전, 민족사 윤창화 대표께서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윤창화 대표는 불교한문을 독해하기 위한 문법서가 필요하다며 일본 학자의 책을 번역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책을 읽어본 뒤에 나는 굳이 번역하는 것보다는 내가 쓰겠다는 말을, 겁도 없이 입 밖에 냈다. 그 까닭은 그 책이 『법화경』을 중심으로 문법을 다루었고, 어순에 대한 것 외에는 문법적 내용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서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즐겨 읽는 여러 경전들을 자료로 삼을 필요도 있고, 문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제시할 필요도 있어서였다. 이런 내 생각을 윤창화 대표는 흔쾌히 받아주셨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겁이 없는 말이었다. 작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체재나 구성을 어떻게 할지, 어떤 경전들을 중시할 것인지, 논서와 어록도 다룰지 말지 따위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능력이었지만. 그 와중에 또
이미 시작한 다른 작업들, 예정된 작업들이 있어서 이 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무늬만 불자가 염불하듯이 “책을 써야 하는데! 책을 써야 하는데!”라는 염서(念書)만 띄엄띄엄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훌쩍 10년이 지났다. 더 늦출 수 없었고, 너무 염치없는 꼴이 되었다.
그나마 이렇게 해를 넘기지 않고 끝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 동안 아무런 채근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윤창화 대표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또 이 책이 제 꼴을 갖추도록 애써주신 민족사 편집부에도 감사드린다.
2019년 12월 금정산 자락 삼매당(三昧堂)에서
야매(野昧) 정천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