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19년 《시인동네》로 등단한 원도이 시인의 첫 시집이 '시인동네 시인선' 137권으로 출간되었다. 원도이 시인은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존재와 시간의 성찰을 보여준다. 그의 다채로운 상상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문장을 읽다 보면 현상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원도이는 현상을 통해 그 너머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 그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거침이 없는 언어로 세계를 만화경처럼 그려낸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자신이 사는 도시 주변 풍경들, 사물들, 또 기억이나 상상 속에 살고 있는 온갖 것들 등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들이다. 자칫 상투적으로 흐르기 쉬운 이런 익숙한 소재들이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현미경 같은 눈에 잡히면 불현 생면부지의 이미지가 되어 엉뚱한 얼굴을 하고 독자의 앞에서 통통 튀어 다니곤 한다. 그 힘은 아마도 그의 주특기인 극사실적 관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도이는 이 시대의 온갖 존재들의 삶을 특유의 이미지로 몽타주하여 보여주는 독특한 기획자다. 사실 현상을 관찰하는 일은 시작의 기본이지만 비가시적인 것들을 눈에 보이듯 그려내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것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인 본질에 대한 탐구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나타나는 현상들은 모두 비가시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시집에는 그 두 영역이 같은 무게로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그곳의 집들은 예쁜 창문을 갖고 있어요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구멍이 네 개 혹은 여덟 개씩 뚫려 있어요 그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구멍 속에서 빵을 먹으며 구멍 속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구멍 속에서 킁킁대다가 구멍을 맞대고 사랑하겠죠
구멍이 예뻐서 쳐다보는데 사진을 찰칵 누르려는데 테라스에 코 큰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아, 글쎄 수영복 가슴이 환한 여자가 구멍 속에서 튀어나오는데 부둥켜안기에 테라스는 너무 좁은데
길이 북적대요 카페가 넘쳐요 구멍을 뛰쳐나온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지중해의 햇살을 목덜미에 팔뚝에 바르고 구멍마다 햇빛을 부어 청소를 하나 봐요 구멍으로 떠들고 구멍으로 웃으며 구멍으로 노래해요
사람들은 구멍들의 놀이를 구경하고 종들은 구멍들이 편안하라고 뎅뎅거리고 사람들은 구멍들 사이로 구멍을 뚫고 구멍 속을 걸어 다녀요 주렁주렁 구멍을 달고 제 몸이 구멍인 줄도 모르고
- 「이탈리아식 구멍」 전문
원도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이야기꾼 기질과 유쾌하고 거침없는 언어적 특성이 고루 잘 나타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여행길에서 본 풍경을 스케치하듯 그려낸 「이탈리아식 구멍」은 인간 삶의 조밀한 풍경들과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삶의 본질이 원도이 특유의 경쾌한 언어와 거침없는 문장으로 나타나 있다. 멀리서 본 이탈리아 집들은 검은 구멍처럼 보이고 시인은 그 구멍 속에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구멍을 맞대고 킁킁 대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시인은 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검은 구멍을 뛰쳐나온 사람들이며, 그들 모두 구멍으로 떠들고 구멍으로 노래하고 구멍으로 밥 먹는 존재라는 인식에 이른다. 그리고 존재란 검은 구멍들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대목은 스티븐 호킹의 ‘검은 구멍이 검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하는 물리학적 명제가 떠오르기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주도 크고 작은 검은 구멍이어서 구멍이 구멍을 낳고 구멍에서 살다 구멍에서 죽는다. 결국 모두가 구멍이 되는 존재라면 이 가지가지 구멍들의 세계는 얼마나 신비롭고 스펙터클한가?
― 이경림(시인)
■ 시인의 산문
초록을 다 갖고 싶어,
이 창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초록은 유리창 속의 의자를 기억할까. 초록은 스물세 살 내 청춘을 꺼내오고 잃어버린 표정과 나뭇잎과 애인을 데려오고 우리가 함께 바라보던 창과 거기에 부딪혀 죽은 새를 데려왔다.
그때 우리는 새처럼 죽었을까.
창 속에서 죽은 새가 날아다녔다. 오래된 울음이 너를 만지고 나를 부비고 구부러진 등을 두드렸다.
죽은 새가 창을 뚫고 초록빛으로 날아갔다.
소실점 가까이 안도의 세계가 보인다 세계는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입을 벌린다 시커먼 구멍, 일단 통과해야 한다 그 속이 비밀이든 수렁이든
영원도 낙원도 보이지 않는다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는 위성만 보인다 궤도를 따라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과연 출구는 있는 걸까 자동차는 멈출 수 없다
졸지 마! 잠들지 마! 대신 새소리를 들려줄게, 얼굴 없는 새가 고래고래 운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조심해! 꿈꾸지 말란 말야! 사이렌이 비명을 지른다 나는 무지개를 놓친다 검푸른 보라색이 천장에서 어른거린다 물고기가 길을 잃고 허공에서 돌아다닌다
타이어들이 맹렬히 진동한다 세계는 끝없는 직진이다 백두대간을 지나 지하 550미터 지점을 달리고 있다 문득 숨통이 조여온다 천장 끝에 매달린 환풍기가 금방 떨어질 것만 같다 거대한 두 개의 회전판, 공회전이다
초록별을 따라간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것 같다 출구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거기 또 다른 아가리가 도사리고 있다
― 「터널」 전문
새가 나뭇가지에 출렁 앉을 때
일몰의 눈썹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새와 나무의 증거
나무는 잎사귀로 말하고 바람은 가지로 노래한다
새가 먼저 문을 연다
우듬지가 땅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도록 하늘을 밀쳐내고
꽃빛의 음률을 목젖에 넣어둘 때
나뭇잎은 파도치고 지층 아래 켜켜이 쌓이고
심폐 가득 자란 새소리가 집을 부순다
벽이 나무 쪽으로 넘어진다
나무는 땅 밑으로 도망치고
파동 치는 슬픔의 푸른 근육들은 자란다
쉬지 않고 매 맞는 당신
누구?
새들은 왜 자꾸 별을 물어오나
기지개를 켜고 뿌리를 뒤트나
속도가 다른 질문들이 출렁인다
당신은 아주 잘생긴 지진
나는 달린다 당신의 어깨에서 팔뚝으로 발끝으로
체위를 바꾸려고
나는 어디에나 있다
친절도 악의도 없이
내가 낳은 행성처럼 몸을 뒤집는
― 「내 이름은 지진」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원도이
강원 횡성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와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시인동네》로 등단했으며, 2020년 현재 〈현상〉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제1부
꽃잎 13
터널 14
모자의 방식 16
종이 생각 18
현관 등 20
소풍처럼 21
내 이름은 지진 22
비로소 내가 괄호 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24
무명 26
텔레비전 28
서큘레이터 30
피사의 사탑 32
당신의 태풍은 안녕하신가 34
사월이 최면을 걸었다 36
제2부
배롱나무 시절 39
층간 증후군 40
몽고처럼 빙고처럼 42
도대체 어디서 왔냐고 44
사마천을 생각하다 46
이탈리아식 구멍 48
그러거나 말거나 50
나 여기 있어요 52
그네 54
가끔씩 키스를 쓱쓱 지워요 56
신용카드 58
강아지 60
친퀘테레의 빨래 62
50그램의 무지개 64
제3부
맥주 67
소실점(消失點) 68
부서진 것들은 주소가 없다 70
징검다리 72
잉어들은 어떻게든 산다 74
화장실에서 태어나 화장실에서 죽은 한 아기를 위하여 75
청소기 76
곰쥐 78
두더지 놀이 80
북해도, 눈의 나라 82
오르골 나라 84
눈이 온다 86
그 웅덩이 안에 88
가방의 꿈 90
제4부
너를 건널 때마다 꽃이 93
호두나무 전집 94
방울토마토의 입으로 96
미세먼지 98
조왕(王)의 노래 100
낮달 하나 던져놓고 102
코다리 104
어떤 주머니 속 106
유리의 시간 108
핑크라인 110
바이칼호수 112
‘왜’와 ‘어떻게’의 드라마 114
한강 하구로부터 90킬로미터 지점 116
이별의 수효 118
해설
존재와 시간에 대한 성찰 이경림(시인)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