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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기쿠치 간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시대의 극작가, 소설가, 저널리스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과 제3차, 제4차 <신사조(新思潮)> 동인. 소설에 원수의 저편에(恩讐の彼方に), 도주로의 사랑(藤十の), 진주부인(珠夫人), 희곡 옥상의 광인(屋上の狂人), 아버지 돌아오다(父る) 등이 있음. 문예가협회를 설립하고, 잡지 <문예춘추(文芸春秋)>를 창간하였으며, 아쿠타가와상(芥川賞)과 나오키상(直木賞), 기쿠치간상(菊池賞)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다이에이(大映) 사장으로 영화사업에도 관여하는 등 ‘문단의 거물’로 불리었다. 조선과 관련해서는, 1920년대부터 <경성일보>에 자주 소개되었으며, 1930년 9월 남만주철도 초청 강연과 1940년 8월 ‘문예총후운동대강연회(文芸銃後運動大講演)’를 위해 경성을 방문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설치, 조선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공직추방을 당한 상태에서 1948년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지은이 : 나쓰메 소세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는 1867년 명문가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세키는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두 번이나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지는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학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그는 1890년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부에 제1기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구마모토(熊本)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0년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최초로 선발한 유학생으로 영국에서 본격적인 영문학 공부를 시작했다.유학 생활을 마친 후에는 모교인 도쿄 제국대학으로 돌아와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1905년부터 잡지 <호토토기스>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연재하였고, 이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나서 인기 작가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1916년 《명암》집필 중에 위궤양으로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마음》을 비롯해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문》 《그 후》 《산시로》 《행인》등이 있다.
지은이 :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의 소설가. 188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중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다방면에 걸쳐 문학적 역량을 과시한 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지명되는 등 일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탐미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며 여성에 대한 에로티시즘, 마조히즘 등을 극도의 아름다운 문체로 탐구하였다. 한평생 작풍이나 제재, 문장, 표현 등을 실험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추구하였고, 오늘날 미스터리, 서스펜스의 선구가 되는 작품이나 활극적 역사 소설, 구전?설화 문학에 바탕을 둔 환상 소설, 그로테스크한 블랙 유머, 고전 문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65년, 신부전과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지은이 : 다야마 가타이
본명 다야마 로쿠야. 도치기 현 다테바야시(현재 군마 현)에서 태어났다. 1891년 '참외밭'을 발표한 후 이듬해 「국민신문」에 연재한 '낙화마을'에서 '가타이'라는 호를 처음 사용했다. 이후 서정적인 신체시나 미문조의 문체로 실연이나 죽음을 주제로 하는 감상적인 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1907년 여자 제자에 대한 애욕과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이불'을 발표, 문단에 충격을 던져주며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소설이기도 하다. 주요 작품으로 <생(삶)>, <시골선생>, <아내>, <인연>, <시간은 흘러간다>, <미나모토 요시토모>, <미치츠나의 어머니>, '백야' 등이 있다.
지은이 : 다자이 오사무
본명 쓰시마 슈지津島修治.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현 북쓰가루군 가나기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오모리중학교, 히로사키고등학교 재학 중 문예지를 창간해 대지주인 자기 집안을 폭로하는 《무간나락》과 《지주일대》, 고등학교 교장의 비리에 반발하는 학생운동을 다룬 《학생군》과 같은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1930년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해 도쿄 생활을 시작했으며 학교보다는 글쓰기에 전념하며 손수 만든 문예지에 여러 소설을 발표했다. 1936년 첫 창작집 《만년》을 출간하며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1939년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 후 《달려라 메로스》, 《여학생》, 《정의와 미소》 등을 발표하며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전쟁 시절에는 《쓰가루》, 《옛날이야기》, 《우대신 사네토모》와 같은 여행기와 시대물을 발표하며 국가의 검열을 피했다. 1947년 《사양》을 출간하며 전후 사상적 공허감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듬해 1948년 다자이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인간 실격》을 완성하고, 책의 출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연인과 함께 강에 뛰어들어 서른아홉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인생에서 다섯 번째 자살 시도였다.
지은이 : 모리 오가이
본명은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기 지식인이자 근대 문학의 선각자다. 오가이(鷗外)는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 출신의 군의관으로 독일 유학(1884∼1888)을 가서 위생학 연구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1894년 가을, 1개월간 군의관으로 조선 부산에 체재하면서 남긴 일기 등도 있다. 동서양에 걸친 넓은 시야의 소유자로서, 동서양의 학문과 문학 일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 삼아 일본 근대 문학 초창기에 평론과 번역으로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소설가·시인·학자로서도 여러 업적을 남겨 근대 문학 성숙기의 일본 문단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쌍벽을 이루는 작가다. 오가이의 대표작은 일본 근대 최초의 번역 시집 ≪그림자(於母影, 오모카게)≫(1889)와 서양 문학 번역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1892), 입센의 ≪노라(인형의 집)≫(1913), 괴테의 ≪파우스트≫(1913)가 있고, 단편 소설 <무희(舞姫)>(1890), <망상(妄想)>(1911), 장편 ≪청년≫(1910), ≪기러기(雁)≫(1911), 역사 소설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 <산쇼 대부(山椒大夫)>(1915) <다카세부네(高瀬舟)>(1916), 역사 인물 전기 ≪시부에 추사이(渋江抽斎)≫(1916), 그리고 ≪시로 쓴 일기(うた日記)≫(1905)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오가이는 ‘서양에서 돌아온 보수주의자’답게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비슷한 소위 ‘화혼양재(和魂洋才)’로서 동서양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복안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바람직한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했다.
지은이 : 요시카와 에이지
1892년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히데쓰구英次.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미야모토 무사시》, 《삼국지三國志》, 《신新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등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소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을 위해 직공과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독학으로 문학 공부를 계속하던 중, 1926년 《나루토 비첩鳴門秘帖》을 통해 일약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1935년부터 〈아사히신문〉에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1939년 연재를 마치고 한 달 후부터는 중일전쟁의 마이니치 신문사 특파원으로 종군하면서도 《삼국지》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962년 암이 악화되어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남긴 작품은 200편이 넘고,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이 제정되었다.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현재까지도 일본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읽히는 대중소설로 영화와 드라마로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으며 《슬램덩크》로 유명한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에 의해 《배가본드》라는 제목의 만화로 현재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지은이 :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년(메이지 19) 일본의 동북 지역인 이와테현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일본의 승려는 일반적으로 대처승으로 가족이 있다). 모리오카(盛岡)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조숙하게도 후일 아내가 되는 세쓰코(節子)와 연애에 열중하기도 했다. 졸업을 반년 앞두고 중학교를 중퇴해, 학력 사회가 되어 가는 근대 일본 사회에서 불리한 인생길을 걷게 된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쿠보쿠는 문학적 재능을 입신의 기회로 삼고자 시, 문학 서평 등을 분주히 발표한다. 그러나 다쿠보쿠의 아버지가 호토쿠사 주지직을 파면당하면서, 이후 그는 생활고와 싸우며 문학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05년 20세 때, 시집 ≪동경(あこがれ)≫를 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는 글을 써서 생활할 수 있는 소위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신문이나 상업 잡지 등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소설류였기 때문이다. 1907년 22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보고자 홋카이도에 건너가 임시 교원, 신문 기자 등을 하며 생활인으로서 동분서주해 나름대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의 안정은 곧바로 문학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자각시켰고, 약1년여의 홋카이도 생활을 뒤로한 채 다쿠보쿠는 상경 길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인생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상경 후, 다쿠보쿠는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소설을 쓴다. 당시는 자연주의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로 리얼리즘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다쿠보쿠의 소설은 낭만주의적 성향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다쿠보쿠 자신의 생활이나 발상이 다분히 현실적이지 못하고 낭만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팔리지 않았고, 다쿠보쿠는 문학적 좌절과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다쿠보쿠는 많은 수의 단가를 지으며 현실적 고뇌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무렵 쓴 단가들은 후일 그의 대표 가집인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에 수록된다. 1909년 3월 24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을 위해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도쿄아사히신문사 교정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가족을 맞이해 비로소 일가 단란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도 잠시, 그해 가을 생활고와 고부간의 갈등을 참지 못한 아내 세쓰코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얼마 후 아내는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 다쿠보쿠는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사상은 급격히 변했다(僕の思想は急激に?化した)’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평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생활의 시(食ふべき詩)’에서는 공상적 시인의 발상을 버리고 현실적 감각에 의한 문학 추구를 주장한다. ‘가끔씩 떠오르는 느낌과 회상(きれぎれに心に浮んだ感じと回想)’에서는 국가 권력을 강권으로 이해한 면모가 드러나 있다. 당시 국가의 실체를 강권으로서 인식한 문학자는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국가 인식은 다음 해에 쓴 <시대 폐쇄의 현상(時代閉塞の現狀)>의 하나의 기반이 된다. 25세 때인 1910년 초여름, 대역 사건이라 칭하는 사회주의자 탄압 사건 일어나게 된다. 다쿠보쿠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그해 8월, <시대 폐쇄의 현상>을 집필하게 된다. 이것은 메이지 제국주의 사회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당대 최고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그해 12월 다쿠보쿠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 그의 이름을 각인한 단가집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를 간행한다. 이 단가집에 담긴 대부분의 단가들은 1910년에 쓴 것으로, 도시 생활의 애환을 그린 것과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세의 문학 연구가들은 이 단가집의 단가를 평해서, 다쿠보쿠식 단가 또는 생활파 단가라 칭했다.이듬해 다쿠보쿠는 점점 병약해져 대학 병원에 입원하기 까지 했다. 그러는 가운데 문학적 의지를 보이며 시 노트 ‘호르라기와 휘파람(呼子と口笛)’을 작성한다. 혁명에 대한 동경과 생활인으로서의 꿈이 그려져 있어 분열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시 노트는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으나 다쿠보쿠 생전에 빛을 보진 못했다. 다쿠보쿠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더 이상 집필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1912년 4월 13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지은이 : 하야시 후미코
1903~1951.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사후에도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제작됐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청빈의 서』, 『만국』, 『뜬구름』, 『밥』 등이 있다.
지은이 : 우메자키 하루오
후쿠오카 출신이다.1940년 도쿄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1944년 해군에 소집되어 암호특기병으로 근무,1946년 서조사에 근무.퇴직후 작품활동중이다.
지은이 : 에도가와 란포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거장.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로,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착안한 필명이다.1894년 미에 현에서 출생한 에도가와 란포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 조선소, 헌책방, 신문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1923년 문예지 《신세이넨》에 단편소설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하였다. 추리에 기반을 둔 이지적인 탐정소설을 지향했던 란포는 1925년 밀실 범죄를 다룬과 후속작 <심리시험>(1925)에서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창조하였으며, 이 시기 작품들은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최초의 사립탐정 캐릭터인 아케치 고고로는 범행 동기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심리적 추론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가즈미 교스케’와 함께 일본의 3대 명탐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한편 환상, 괴기, 범죄 등의 이른바 변격(變格)소설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높아지자 란포는 이를 수용, <천장 위의 산책자>(1925), <인간 의자>(1925), <거울 지옥>(1926)와 같은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난쟁이》(1926)가 아사히신문에 연재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란포는 그러나 트릭과 논리를 지향하는 자신의 이상향과 독자를 의식하여 쓰는 작품과의 괴리에 스스로 한계를 느껴 1927년 휴필을 선언하였다. 1928년 《음울한 짐승》으로 복귀한 란포는, 이 작품이 연재되는 잡지가 3쇄까지 증쇄되는 등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936년 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탐정소설 《괴인 20면상》으로 란포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국민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활극적 탐정소설에서 란포의 장기인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한 면을 제거한 이 작품은 ‘뤼팽 대 홈스’를 ‘20면상 대 아케치 고고로’로 치환한 것으로, 청소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소년탐정단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20권이 넘는 속편이 출간되었다.태평양전쟁 이후 란포는 일본탐정작가클럽(現 일본추리작가협회)을 창설(1947), 자신의 이름을 딴 ‘에도가와 란포 상’을 통해 신인작가를 발굴하였으며, 일본 최초의 추리문학 평론지 《환영성》을 간행하는 한편 강연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추리소설 저변 확대와 신인작가 등용을 위해 1세대 작가, 평론가로서 전력을 쏟아부었다.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요코미조 세이시, 시마다 소지 등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문학 작가들이 란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란포의 영향력은 장르를 넘어 만화,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란포(大亂步)’로도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는 미스터리 소설 대국 일본을 있게 한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은이 : 사카구치 안고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 현 니시오하타(西大畑)에서 지방 정치가이자 한시인(漢詩人)이던 진이치로와 그의 후처인 아사 사이에서 열세 형제 중 열둘째(5남)로 태어났다. 이름은 병오년에 태어난 5남이라는 의미에서 헤이고(炳五)가 되었다. 안고라는 필명은 중학교 한문 시간에 선생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두운 놈’이라는 의미로 ‘안고(暗吾)’라는 별명을 붙인 데서 유래했다.1925년 스무 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학교 분교의 대용 교사(자격증이 없는 교원)로 근무했으나 안온한 교사 생활보다 구도자의 길에 대한 동경이 커져, 1926년 3월 도요대학 인도 철학과에 입학했다. 1930년 아테네 프랑세즈의 문우들과 동인지 ≪말(言葉)≫을 창간해 이듬해 제2호에 데뷔작 <찬 바람 부는 술 창고에서(木枯の酒倉から)>를 발표했고, ≪청마(?い馬)≫로 동인지명이 바뀐 후 <고향에 부치는 찬가(ふるさとに寄する讚歌)>, <바람 박사>,<구로타니 마을> 등을 발표해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의 절찬을 받고 참신한 주제와 기법으로 무장한 신예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의욕적으로 수작을 발표했다. 1945년 일본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두 눈으로 지켜보겠다며 도쿄에 남아 있던 안고는 1946년 ≪신조(新潮)≫ 4월호에 <타락론>을, 6월호에 <백치>를 발표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타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타락론>은 패전 후의 혼미 속에서 재빨리 전후의 본질을 파악하고 통찰했다는 점에서 일약 전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이때부터 안고에게는 집필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외투와 푸른 하늘>, <여체>, <사랑을 하러 가다> 등 종래의 육체를 사상(捨象)한 사상이나 관념에 맞서, 육체 자체가 사고하는, ‘성의 사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안고는 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이시카와 준(石川淳) 등과 함께 신희작파, 무뢰파라고 불리며 전후 난세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유행 작가, 평론가가 되었다.<돌의 생각>,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 숲 아래> 같은 걸작을 썼고, 결혼 후 아내의 헌신적인 모습을 슬프게 그린 <파란 도깨비의 훈도시를 빠는 여자>, 전후 풍속을 파헤친 <금전무정> 등을 썼으며, 한편으로 <도경(道鏡)>, <오다 노부나가> 같은 역사 소설, ≪불연속 살인 사건≫(제2회 탐정 작가 클럽상) 같은 추리 소설에도 도전했다.1949년 2월 수면제와 각성제 중독 증상이 심해져 도쿄대학 병원 신경과에 입원했다. 일상생활에서 광포하고 착란적인 행동이 이어진 가운데, 1950년부터 2년간 전후 문화와 메이지 개화기 문화의 경박성을 비판하며 토착적인 인간성을 파헤친 문명 비평서 <메이지 개화 안고 포물첩(安吾捕物帖)>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다. 그와 동시에 ≪문예춘추≫지에는 천황제, 공산당을 비롯한 터부에 도전하며 <안고 항담(安吾巷談)>(문예춘추 독자상)을 연재하는 등 독자적인 문명론을 전개했다. 또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해 천황가가 조선계라는 것, 조선의 역사가 일본에 반영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독자적인 고대사를 구상해 <안고 사담(安吾史譚)>, <안고 신일본 지리>, <안고 신일본 풍토기> 등 탁월한 사관을 전개했다. 이른바 ‘안고물(安吾物)’로 일컬어지는 이 연작 문명 비평서는,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통쾌히 해소하며 독자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어 안고는 인기 평론가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1953년 8월 장남 쓰나오(綱男)의 탄생으로 비로소 자신이 일가를 이루었음을 실감한 후, 고대사의 웅대한 구상과 함께 원풍경에 유래하는 창작 활동에 의욕을 불태우던 안고는 1955년 2월 17일 아침 자택에서 뇌출혈로 급서했다. 향년 49세. 안고의 죽음에 대한 반향은 전후 최대의 유행 작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쓸쓸한 것이었으나, 1970년 무렵부터 젊은이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면서 안고는 대대적으로 부활했다.
지은이 : 다카무라 고타로
일본에서 국민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카무라 고타로(1883∼1956)는 그의 생애 동안 720여 편에 달하는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7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 조각가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번역, 평론 등에서 업적을 남긴 예술인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1883년(메이지 16) 도쿄 시타야(下谷)에서 불사(?師)였던 아버지 고운(光雲)과 어머니 와카[わか, 통칭은 도요(と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 2월에서 1909년) 6월에 걸쳐 미국 뉴욕,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를 통해 예술혼에 눈뜨고 서구 문명과 그 속에서 형성된 근대적 자아를 체득하게 된 고타로는 귀국 후 제2의 고운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파벌이나 연고(?故)가 일체를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일본 예술계라는 벽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귀국 직후 예술 전위 모임인 ‘팬의 모임(パンの?)’에 참여해 질풍노도의 탐미적·데카당스적인 생활을 보냈다. 1909년에는 고마고메(駒?)에 있는 조부의 은거처를 아틀리에로 개조해 예술 활동을 하고, 1910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琅?洞)를 열기도 했으나, 공조자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2월에 하시모토 야에코의 소개로 지에코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나와,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진 두 예술가의 만남은 연애 시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타로의 첫 시집 ≪도정≫은 지에코와 결혼을 앞둔 1914년(다이쇼 3) 10월 출판되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그것을 지에코의 사후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고(1941. 8),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타로는 지에코의 죽음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의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9월 공습으로 도쿄에 있던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했는데, 종전 후에도 이와테현 시외에 있는 오타무라 야마구치(太田村山口)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자기 유적(自己流謫)의 자연 친화적 생활을 보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는가 하면, 1947년 7월에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자전적 시편인 ≪암우소전(暗寓小?)≫을 발표함과 더불어 제국예술원(帝?芸術院) 회원으로 추대되지만 이를 사퇴한다. 1950년 11월에는 ≪지에코초 그 후(智?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판하고, 70세가 되던 1952년 10월에 도와다 호반(十和田湖畔)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新聞)≫에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1956년 4월 화가 나카니시 도시오(中西利雄)의 아틀리에에서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영원한 반려자인 지에코와의 만남과 결혼, 사별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인생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도정≫, ≪지에코초≫, ≪기록≫, ≪전형≫, ≪지에코초 그 후≫를 포함하는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크나큰 감명을 주고 있다.
지은이 : 이즈미 교카
가나자와 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즈미 교타로(泉鏡太郞)이다. 예술가이자 장인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심과 예술적인 자질을 물려받았다. 메이지 시대 후기부터 다이쇼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말기까지 활동했으며 장?단편소설과 수필, 가부키 등 3백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895년 「외과실(外科室)」과 「야행순사(夜行巡査)」를 발표하면서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고야성(高野聖)」 「유지마 참배」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여성을 찬미하거나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여 등장인물로 하여금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게 했다.
지은이 : 호리 다쓰오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 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열아홉 살부터 폐결핵을 앓았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해 나카노 시게하루와 동인지 〈로바〉를 창간했으며, 졸업 후 1930년 《성가족》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의 요양소에서 약혼녀를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이 분다》를 집필하였다. 《바람이 분다》를 통해 순수한 사랑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며, 이후 《아름다운 마을》, 《하루살이의 일기》, 《나오코》 등의 대표 작품을 남겼다. 1953년,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 : 유메노 큐사쿠
일본 미스터리의 여명기인 1920~1930년대에 활동했던 추리소설 작가다. 본명은 스기야마 다이토. 후쿠오카 우익 정치단체인 겐요샤(玄洋社)의 거두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1세에 게이오 대학에 입학해 역사를 전공했지만 중퇴하고 고향인 후쿠오카로 돌아가 농원 경영자, 승려, 신문 기자 등의 여러 직업을 거친다. 이후 정계의 거물 인사인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작가의 길로 접어든다. 자신이 쓴 작품을 아버지에게 처음 보여주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몽상가가 쓴 것 같은 소설이구나(夢の久作の書いたごたる小?じゃね?)”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힌트를 얻어 필명을 지었는데, 그의 필명 유메노 규사쿠(ゆめのきゅうさく)는 ‘몽상가’라는 뜻이다. 1926년 잡지 『신청년(新靑年)』의 현상 공모에「기괴한 북(あやかしの鼓)」이 당선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작품 활동에 매진해 〈유리병 속 지옥〉, <미치광이 지옥>, 〈이누가미 박사〉 등 괴기미와 환상성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구라 마구라》는 구상에서 탈고까지 10년 이상이 걸린 작품으로 일본 추리소설사의 3대 기서(奇書) 중 하나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한번쯤은 정신이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로도 유명하다.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도구라 마구라》를 발표한 이듬해인 1936년에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지은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도쿄(東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축산업을 했고 생후 7개월쯤 어머니가 정신 장애를 일으키자 어머니의 친가인 외삼촌 부부에게 맡겨진다. 결국 어머니는 33세의 나이로 그가 10세 때에 죽는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중학생이 된 아쿠타가와는 동급생들과 회람잡지 ≪유성≫을 발간했고, 다년간 성적 우수자로 제일고등학교 문과에 무시험 입학한다. 수재형 모범생으로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아나톨 프랑스, 베르그송 등을 섭렵한다. 고등학교 동기인 구메 마사오, 기쿠치 간 등과 함께 제3차 ≪신사조≫를 간행하고 데뷔작 <노년>(1914)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쇼몬>(1915)과 <코>(1916), <마죽>(1916), <수건>(1916)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신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작품 <코>는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았고, 도쿄대학 영문과를 차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역사 소설로 역설적인 인생관을 나타내려는 이지적인 작풍을 나타내며, 작가 생활 10여 년간 150여 편의 작품을 남긴다. 복잡한 가정 사정과 병약한 체질은 그의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페미니스틱하고 회의적인 인생관을 갖게 된다. 결국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의와 초조, 불안에 휩싸여 심한 신경 쇠약으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자살하고 만다. 문예춘추사의 사장이던 기쿠치 간이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해 매년 2회, 1월과 7월 수여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다.
지은이 : 요코미쓰 리이치
1898년, 후쿠시마 현(福島縣)에서 태어났다. 1917년 ≪문장세계≫에 <신마(神馬)>를 투고한 것을 시작으로, <활화산>, <불> 등을 발표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사소설적인 소재가 많았다. 이후 <파리>, <태양>, <마르크스의 심판>, <옥체> 등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신진 작가로서 빛을 발했다. 1928년 이후 <눈에 보인 이>, <신감각파와 코뮤니즘 문학> 등을 통해 유물론적 문학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대항 의식을 표면화했다. 그러나 1930년, 심리와 감각의 얽힘이 두드러진 <새>와 <기계>를 발표함으로써 신심리주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1936년 유럽 여행 경험을 토대로 서양 사상과 일본의 고신도(古神道), 그리고 과학과 일본 사상을 다룬 장편 소설 ≪여수(旅愁)≫의 신문 연재를 시작한다. 1945년 야마가타 현(山形縣) 소개지에서 패전을 맞이했는데,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전시하의 답답한 심경을 그린 ≪밤의 구두≫와, ≪우아한 노래≫를 출판한다. ≪여수≫를 미완으로 남긴 채, 1947년 단편 <남포등>을 집필하던 중 위궤양과 복막염으로 숨을 거둔다.
지은이 : 미야모토 유리코
소설가, 사회운동가. 도쿄의 명망 있는 건축가의 장녀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열여덟 살에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천재소녀로 주목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깨닫고 문학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수차례 투옥 및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패전 후 피폐해진 사회상을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반슈평야」를 비롯해 「두 개의 정원」, 「도표」 등 역작을 남겼으며 집필, 강연,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은이 : 나오키 산주고
소설가, 각본가. 오사카에서 헌옷가게를 운영하는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제적당했다. 그러나 수업은 꾸준히 들어서 졸업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동료의 도움으로 톨스토이 전집 번역에 참여했으며 서른한 살에 필명을 산주이치(三十一)로 짓고 매년 숫자를 늘려 이름을 바꾸다 산주고(三十五)에서 멈췄다. 「남국태평기」,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장르소설, 시국소설을 주로 다뤘으며 무성영화 각본을 쓰기도 했다. 『문예춘추』 창간으로 큰 성공을 거둔 기쿠치 간은 친구의 업적을 기리며 뛰어난 대중소설에 수여하는 나오키상을 제정했다.
지은이 : 나가이 가후
나가이 가후[본명 소키치]는 1879년 12월 3일 도쿄 고이시카와 구에서 태어났다. 1894년 병에 걸려 입원하는 바람에 학업을 잠시 중단한 가후는 병원과 요양지에서 에도 시대의 통속 소설인 희작 문학을 탐독했다. 반년 후 복학했지만 학업에 흥미를 잃은 가후는 퉁소와 한시를 배우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897년 엄격했던 아버지가 일본 우선(郵船)의 상해 지점장이 되어 집을 비우자 유곽에 출입하면서 한학자의 아들답게 에도 음악, 만담, 우키요에 등에 빠져 지냈는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 있던 한문 서적을 내다 팔기도 했다. 1898년에 히로쓰 류로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와야 사자나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 1902년부터 ≪야심(野心)≫, ≪지옥의 꽃(地獄の花)≫, ≪꿈의 여자(夢の女)≫를 발표했는데, 특히 ≪지옥의 꽃≫은 모리 오가이의 극찬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1908년 가후는 8월에 ≪미국 모노가타리(アメリカ物語)≫를, 이듬해 3월에는 ≪프랑스 모노가타리(ふらんす物語)≫를 출간했지만 퇴폐적 내용과 일본에 대한 모욕적 표현 등이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를 당한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아사히(朝日) 신문에 ≪냉소≫를 연재하면서 신인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1910년 모리 오가이와 우에다 빈의 추천으로 게이오대학 문학부 교수가 된다. 불어와 불문학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대문호들과 친분을 쌓는다. 1916년 대학과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은 가후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신주쿠의 요초마치(余丁町)로 이사하는데, 자기 집을 단초테이라고 부르고 1917년 9월부터 여기에서 이름을 따 ≪단초테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단초테이 일기≫는 1959년까지 40년 이상 계속되어 가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후 가후는 ≪힘겨루기≫를 비롯해 ≪에도 예술론(江?芸術論)≫, ≪오카메자사≫, ≪장마 전후≫, ≪그늘의 꽃(ひかげの花)≫, ≪묵동기담(?東綺譚)≫ 등의 작품을 남긴다. 1952년 에도 문학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뽑힌다. 말년에 두문불출하고 홀로 살다가 1959년 4월 30일 새벽 서재 겸 침실에서 피를 쏟고 쓰러져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향년 80세였다.
지은이 : 마키노 신이치
1896년 가나가와(神奈川) 현 오다와라 시에서 태어나 39세에 자택에서 자살했다. 191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열세 명의 동인을 모아 ≪13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거기에 첫 작품 <손톱>을 발표했고, 당시 자연주의의 대가였던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후 전기에는 대부분 신변잡기적 사소설풍의 육친 혐오적 작품을 썼다. 그러나 중기에는 작풍이 다소 변화되어, 이른바 환상풍의 경지를 개척하게 된다. 고향 오다와라(小田原)의 풍토에 고대 그리스나 유럽 중세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꿈과 현실을 교착시킨 환상적인 작품들로, 지적인 유머나 풍자성이 그 특징이다. 후기에 해당하는 1931년 무렵부터는 신경쇠약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작품은 다시 전기의 사소설적 경향으로 바뀌며 더욱 어두워졌다. 이런 마키노 문학은 일본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의 전통을 이은 ‘사소설’의 방류로 평가되며, 그 작품은 ‘변형 사소설’로 불린다. 마키노 문학의 미학적 본질은 창백한 자의식에서 반사되는 신경증적 양상과 비애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살도 채 안 된 자신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가 버린 아버지의 보헤미안적이고 데카당적인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고 훈육에 엄격했다. 어머니의 엄한 양육 방식은, 아버지를 닮아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던 마키노의 유년 시절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 트라우마는 끝내 치유되지 못했다. 그것이 육친 혐오 양상이나, 신경증적 양상, 그리고 방랑이나 위악성과 자조성, 광기 등으로 표출되는 것이다.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起夫)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풍토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 이것을 서구적 교양으로 치환해 바라보고, 서구적 환상으로 장식해, 언어 예술만이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같은 이중의 영상을 작품 세계로 해, 그 신비한 지적 감각 체험에 독자를 이끌고 가는 하이칼라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의 본질을 짚었다.
지은이 : 야마모토 슈고로
야마나시 현 출생으로 본명은 시미즈 사토무.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전당포의 종업원으로 일하다 신문, 잡지의 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 『문예춘추』(1926년 4월호)의 현상에 투고한 「스마데라 부근」으로 문단에 나왔다. 처음에는 극작이나 동화의 집필을 주로 했으나 이후 대중오락잡지를 작품 활동의 주 무대로 삼았다. 이에 초기, 중견 시대에는 순문학자나 비평가들로부터 거의 묵살 당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문학에는 ‘순’도 없고 ‘불순’도 없으며, ‘대중’도 ‘소수’도 없다. 단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이다.”라는 신념하에 보편타당성을 가진 인간상의 조형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야마모토는 언제나 볕이 들지 않는 서민 편에 서서 기성의 권위에 용감히 저항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1943년에 아쿠타가와상을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수상을 요청받은 문학상 전부를 일축한 이유는 ‘문학은 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윤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마침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수많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사후 “귀여운 여인을 묘사한 체호프를 능가한다.”, “100년 후, 일본의 대표적 단편작가로 남을 것이다.”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얻었다.
지은이 : 기타하라 하쿠슈
지은이 : 무로 사이세이
일본의 시인이자 소설가. 사생아로 이시카와 현에 태어나 역경의 유소년기를 거쳐 시인을 꿈꾸었다. 동문이었던 하기와라 사쿠타로와 친해져 작가의 길로 들어감. '사랑의 시집', '서정소곡집'으로 시단에 지위를 확립. 근대 시 완성에 큰 역할을 함. 후에 소설도 발간.
지은이 : 이토 노에
지은이 : 호조 다미오
지은이 : 다네다 산토카
지은이 : 오구마 히데오
지은이 : 기시다 구니오
지은이 : 『반장난』 편집부
1장 쓸 수 없다
작가의 초상 _ 다자이 오사무
슬럼프 _ 유메노 규사쿠
독감기 _ 우메자키 하루오
쓰지 못한 원고 _ 호조 다미오
서재와 별 _ 기타하라 하쿠슈
쓸 수 없는 원고 _ 요코미쓰 리이치
나의 생활에서 _ 마키노 신이치
첨단인은 말한다 _ 호리 다쓰오
잡언 _ 다네다 산토카
위가 아프다 _ 사카구치 안고
시에 관해 말하지 않고 _ 다카무라 고타로
어쨌든 쓸 수 없다네 _ 나쓰메 소세키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_ 요시카와 에이지
2장 그래도 써야 한다
의무 _ 다자이 오사무
책상 _ 다야마 가타이
나는 이미 나았다 _ 사카구치 안고
나와 창작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홀리다 _ 무로 사이세이
한밤중에 생각한 일 _ 모리 오가이
때늦은 국화 _ 나가이 가후
나의 가난 이야기 _ 다니자키 준이치로
신문소설의 어려움 _ 기쿠치 간
독서와 창작 _ 나쓰메 소세키
메모 _ 호리 다쓰오
세 편의 연재소설 _ 에도가와 란포
어느 하루 _ 하야시 후미코
3장 이렇게 글 쓰며 산다
문인의 생활 _ 나쓰메 소세키
나의 이력 _ 나오키 산주고
생활 _ 하야시 후미코
버릇 _ 요시카와 에이지
책상과 이불과 여자 _ 사카구치 안고
원고료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방구 만담 _ 다니자키 준이치로
쓴다는 것 _ 이즈미 교카
푸른 배 일기 _ 야마모토 슈고로
번민 일기 _ 다자이 오사무
일곱 번째 편지 _ 미야모토 유리코
달콤한 배의 시 _ 오구마 히데오
4장 편집자는 괴로워
매문 문답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의 원고 _ 무로 사이세이
편집 중기 _ 요코미쓰 리이치
편집실에서 _ 이토 노에
편집 여담 _ 마키노 신이치
펜을 쥐고 _ 다네다 산토카
소식 _ 이시카와 다쿠보쿠
편집자 시절 _ 우메자키 하루오
편집 당번 _ 기시다 구니오
새하얀 지면 _ 『반장난』 편집부
작가 명단에서 빼버릴 테야 _ 호리 다쓰오
출간 연기에 대해 _ 다니자키 준이치로
추천의 글 _ 장정일
엮고 옮기며 _ 안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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