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성정현 시인은 시와 시조의 형식을 넘나들며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응시하여 내밀하고 고요한 내부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린다. 웅숭깊은 시선과 서정으로 우리 시대 평범한 이웃들의 아픔까지 표출해 내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깨어 있는 시인으로서 부딪히고 넘어지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깨달음의 시편을 아름다운 무늬로 직조해 내고 있다.
출판사 리뷰
성정현 시인의 시는 무엇보다 따스하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겨울이 채 가시기 전에 담벼락에서 쬐는 햇살 같은 따스함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그 따스함은 따스하지 않은 것들을 외면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그러안으려는 시인의 우물 같은 깊은 연민과 이웃에 대한 애정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가령 ‘도마가 순순히 칼날을 받아내’(「그런 저녁이 있었네」)듯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를 떠올린다.
‘구순 아버지’를 업고 ‘가을엔 엄마 보러 가기 좋겠네’(「동굴」)하는 예순 아들의 옹알이 같이 중얼거리는 요양원 풍경도 한몫 한다. ‘한센인 장 씨’의 ‘짤막하고 뭉텅해진 손가락’으로 캐온 냉이를 국 끓여서 나눠 먹으며 그의 손가락이 활짝 펴지기를 기원하는 모습에 눈물이 짠하게 배인다. 또 ‘데워주지도 풀무질이 되지도 못한’ ‘먼지 같은 세월이 미안해져/ 남의 편 같던’ 남편을 ‘내 편처럼 생각’(「내 편」)하는 반성적 방향 전환도 따스함을 더해준다.
돌 같이 무거운 현실을 희망의 물길로 열어가는 성정현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담요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다 읽고 나면 그 온기가 온몸에 오래오래 남게 된다. 물질을 앞세워서 자꾸만 차가워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정현 시인의 이번 시집은 체온을 느끼기에 더 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시적 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단언컨대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을 시집이 될 것이다.
내 집은 공중그네 어둠에 주추를 놓고
아무도 깃들지 않은 바람으로 엮은 처마
벼랑을
짚고 짚어도
하루살이만 숨죽이고
언제쯤 우리도 남루한 저녁 한때
끼니 걱정 하나 없이 마음의 빚도 없이
단 한 번
사랑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을까
바지랑대 선회하던 그림자 길어지면
너를 포획하기 위해 중심에 붙박인 몸
열두 번
허물을 벗어
허공으로 길을 낸다
―「호랑거미」 전문
공범인 우리
사랑의 유효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어요
시효 넘긴 갈망처럼
잘못 짚은 성감대처럼
서로를 알려고 할수록
점점 밀어내고 있었지요
미움은 사랑이 식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란 걸
반대말이 무관심인 걸 그즈음 알았지요
현실은 오해가 자라나 버려진 정원 같았어요
어디 당신만의 잘못이겠어요?
우리는 공범인걸요
술이 당긴다고 할 땐
장래가 불안하다는 말
반찬이 이게 뭐냐고 화낼 땐
마누라까지 무시해 성질난다는 말
산에서 혼자 살고 싶다고 할 땐
고생했는데 몰라줘서 슬프단 말이었다니
입술에서 가슴까지 닿는 시간
지척에 두고도 읽을 수 없는 시간
어쩌다 잘못 들어간 시간
우주에서 처음 본 시간
아, 어쩌죠
우리가 공범이었던
이 지독한 난독의 시간들을
―「난독증」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성정현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201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무꽃에서 라일락 향기 읽는 봄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 난독증 / 무꽃에서라일락향기읽는봄밤 / 엄마 사용 설명서 / 감나무 이발관 / 그런 저녁이 있었네 / 봄바람이 몰려와요 / 원대리에 가고 싶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 센스티브 / 노래를 바꿔 봐 / 내 편 / 우울한 캔디 / 어른아이
2부 등의 내력
가시나무 / 동굴 / 등의 내력 / 단팥빵 / 노랑어리연 / 물집 / 희망 프레임 / 손을 펴라 / 되돌아온 바람 / 안녕, 파킨슨 씨 / 꽃 적금 타는 날 / 산사의 오후 / 지리산에서 온 편지
3부 길에서 만난 민낯들
제 몸속 그리운 것들은 / 먼 나무 / 천리포 노을 / 가을로 가는 숲길 / 율곡동栗谷洞엔 밤나무가 없다 / 얼마나 그리운지 알기 위해 / 슬픔이 진 자리에 / 풍경 하나 / 있을게요 / 동백은 지네 / 꽃으로 살래요 / 나는 한때 비 / 달이 다녀간 뒤 / 꽃은 핀다 / 겨울, 감나무 / 와락, 그때 /
4부 경계에 서다
호랑거미 / 김밥천국 / 환승역 그 어디쯤 / 우리가 날 저물어 / 서울 이발관 / 우산 하나 서 있을까 / 오월이 오면 / 발톱을 깎으며 / 답장으로 받은 꽃잎 / 비슬산 참꽃 보러 / 분꽃시계 / 꽃다지 다시 피면 / 17시 50분 / 담쟁이 / 대추를 털며 / 햇살 어린 복숭아 / 춤추는 신호등 / 첫눈
해설|김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