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윤동주 살아있다>는 2022년 윤동주 순절 77주년을 맞이하여, 이제까지 발표된 국내외 윤동주 관련 자료와 새로 취재해 찾아낸 놀라운 사실들을 한 권에 수록한 책이다. 영원한 대한민국 청년시인 ‘윤동주 시정신’을 지키고 기리기 위해 2017년 ‘윤동주탄생100주년문화예술제’를 하면서부터 기획된 책이다.
최근 중국에서, 일본에서 생뚱맞은 근거를 내세워 윤동주를 자기들의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만큼 윤동주 시인이 탐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 보유국은 대한민국이라는 근거를 이 책은 하나하나 밝히고 있다.
출판사 리뷰
한글을 누구보다 더 사랑했던 시인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윤동주에 대하여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윤동주의 모든 것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중국과 수교 전에 윤동주 생가와 묘를 다녀온 이근배 회장의 절절한 헌사와 무진기행 김승옥 작가의 그림과 함께 쓴 추모 글
이 책은 그동안의 기록과 폐간되어 없어진 국내외의 신문 잡지를 찾아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고 번역했다. 따라서 윤동주의 탄생부터 서거까지를 망라한 책으로 영원한 청년 시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그의 친구, 스승, 가족과 함께 사후 윤동주를 연구하고 사랑한 사람들의 글을 통해 그의 한글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염원과 시를 쓰는 절절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인의 ‘시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근배 시인의 헌사
내가 세 번째로 윤동주 묘소를 찾은 것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였다. 시비(詩碑)는 옛모습 그대로인데, 콘크리트로 봉분 둘레를 새로 단장해 놓았고, 옆에 “윤동주(1917-1945)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다”로 시작되는 문구를 새긴 표지석도 세워놓았다.
“애국시인이라니!”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조국 한국을 사랑했고 한글로 시를 썼고 한국을 사랑한 까닭으로 스물여덟에 목숨을 잃었는데, 언제 어떻게 중국을 사랑했다는 것인가. 더욱 가슴을 치게 하는 것은 생가를 복원해놓고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고거(故居)”라고 크게 푯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애국시인인 윤동주가 중국의 애국시인으로 못 박히는 것을 동주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아니 용정에 있는 한인교회 공동묘지의 산소를 옮겨 올 수 없다면 서울에 ‘윤동주 시공원’을 하루라도 빨리 조성해서 가묘(假墓)라도 만들어놓고 높이 시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을 앞세우고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기 스물두 해 전 만주국 간도성 용정가 231동 36호에서 태어나,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눈감은 동주의 시를 공부할 때도, 문단에 발을 내딛고 서도 이름만 알고 몇 편의 시만 어찌하여 어렵게 찾아갔던 것인지, 그리고 오늘 그 날짜를 당도하여 나는 왜 나도 모르게 동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 옷깃을 여미고 육필 시고를 다시 읽고 유고시집 책장을 다시 넘긴다.
동주여! 먼 은하의 별들로 두 쪽 난 그대 조국의 하늘과 땅에 눈부신 광채를 뿌려 주는 아이배(童舟)여! 오늘토록 내게 던져준 이 아프고 질긴 닻줄을 거두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돛폭을 올리고 모국어의 더 너른 바다로 저어가라. 여기 『윤동주 살아있다』에 바쳐지는 헌사(獻辭)처럼 영원토록, 영원토록! -동주 별 은하로 뜨다(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민윤기 시인의 책머리에
우리나라는 윤동주 보유국입니다. 일본도 윤동주 시인을 탐하고 중국도 윤동주 시인을 욕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윤동주를 지키고 기려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하늘’이고 ‘바람’이며 ‘별’이고 ‘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청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고, 시인들에게는 왜,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2017년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을 가진 후부터 저는 윤동주 시인의 혼적이 남아 있는 많은 현장을 탐사하면서 윤동주 시인의 유혼(幽魂)과 만났습니다. 이를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윤동주 관련 유의미한 자료 수집은 물론 아직 규명되지 않은 윤동주 죽음의 미스터리를 취재하여 그 결과물들을 이 책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윤동주를 ‘발견하고’ ‘지키고’ ‘기리는’ 일의 시작일 뿐이어서, 누군가 더 능력 있는 분들이 더 ‘깊이’ ‘정확하게’ 계속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2022년 윤동주 시인 순절 77주년에 맞춰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펴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문학평론가 저널리스트 서울시인협회 회장)
처음 공개되는 사실 10가지
01 윤동주 시신을 화장한 화장터는 후쿠오카 히바루 장제장이다
02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시」라는 제목이 없다
03 왜, 어떻게 고향에서 윤동주 가족은 재산도 빼앗기고 쫓겨났을까?
04 ’윤동주는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중국 동북공정의 음모
05 이떻게 일본 국어교과서에 윤동주 시가 실리게 되었을까?
06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를 어떻게 참혹하게 죽어갔을까?
07 신사참배 반대운동 앞장서다 숭실중학을 자퇴한 윤동주의 용기
08 윤동주와 교유한 일본시인을 최초로 공개한다
09 윤동주는 창씨개명하지 않았다
10 윤동주에게는 시인 막내동생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사랑한 사람들
윤동주는 죽기 전에 그의 시 속에서 죽고, 그 시를 열고 이제 부활하였다.(문익환)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윤동주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태어났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몹시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CCC라는 글자가 새겨진 교복의 단추를 모로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었다. (정병욱)
윤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달변과 교수 기술과 박학으로 명강의를 하는 정인섭 선생님에게는 누구나가 매혹되는데, 학기 말 시험에 엉뚱하게도 작문 제목을 하나 내놓고 그 자리에서 쓰라는 것이다. 밤새워 해 온 문학개론의 광범위한 준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억지춘향으로 모두 창작 기술을 발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 역시 진땀을 빼며 써냈더니 점수가 과히 나쁘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동주는 바로 그 제목의 그 글을 깨끗이 옮겨서 신문 학생란에 발표하였다. 제목은 「달을 쏘다」라는 것이다. (유영)
조용한 몸가짐에, 격동하는 마음을 가진 시인이 윤동주입니다. 모진 바람이 불어오고, 눈보라 속에 휘말려도, 조용히 이를 맞아 가며 사는 시인이었습니다. 죽음의 뜻을 깨쳐 가며 사는 시인이었습니다. 순수하기만 한 시인입니다. 늘 잠잠한 표현을 합니다. 그런 삶의 리듬이 시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읽혀지는 것이라 봅니다.(박창해)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부음을 나는 신경(新京)에서 받았다.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기는 동주가 사망한 지 10일 후였다. 면회 절차 수속을 밟으며 뒤적거리는 놈들의 서류를 보아한즉 ‘독립운동’이라는 글자가 한자(漢字)로 판 박혀 있는 것이었다. 시체실로 찾아가 동주를 찾았다. 관 뚜껑을 열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라고 동주는 내게 호소하는 듯했다. 사망한 지 열흘이 되었으나 규슈제국대학에서 방부제를 써서 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본 청년 간수 하나가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 “아하,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면서 운명했지요.” 하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 (윤영춘)
처음 얼마 동안은 하숙생을 과히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신경질만 부렸던 김 송 씨도 오히려 그들이 연희전문 문과생이라는 것과 특히 윤동주 학생이 시를 쓰는 젊은이임을 알게 되자 차츰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산책길에도 함께 나서는 등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었다.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내게 된 윤동주는 특히 그 집 막내아들과 양견(洋犬) 포인터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었다. 다정다감한 윤동주 청년의 프로필은 누상동 어귀나 골목에 끈적끈적한 여운을 남겼다. 인왕산 산책길에 김 송은 윤동주와 자주 동행하였다. 윤동주는 치마바위에 걸터앉아 사색을 즐기는 성 싶었다. 어느 날 그는 그곳에서 장안을 눈 아래 굽어보면서 말을 꺼냈다. “김선생님, 조선 시단의 흐름이라고 할까, 시단의 현황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권일송)
지난 날(1942년) 나는 ‘말레이 작전’에 종군, 부상을 당하고 구사일생 끝에 살아나 군마현 누마다 육군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8월 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타났다. 환자옷 차림의 나를 보더니 그는 연민스런 미소로 나를 껴안아 주었다. 그는 9월부터 교토의 대학에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단정한 그의 모습은 어딘지 스산해 보였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둔한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전우인 조선 출신 고(高) 중위의 동생이 맡겨놓은, 새로 출간된 일본 시집을 집어 들었다. “동주야, 네가 좋다면 그 시집을 선물할게.” 이윽고 나는 아카기산(赤城山)이 바라보이는 그 병원을 떠났다. 상처가 대충 원상으로 회복되자 되찾은 시력으로, 교토를 방문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나는 조선해협을 건너 만주로 갔다. 나는 그 무렵 윤동주가 암흑의 동굴 속에 있으면서 더욱 더 한 줄기 불빛을 비추고 있는 꿈을 꾸었다. 쇼와 18년(1943년) 수도 신경 초여름의 상쾌한 관사에 있던 나에게 보내온 친구의 전문(電文)은 “동주 체포”였다. 한 순간 눈앞을 검은 장막이 뒤덮고 솟아오르는 분노로, 예전에 전차포를 우리 아군의 사령부를 향해 발사한 사고思考의 흐트러짐을 내 정신의 분열과 함께 느꼈다. 윤동주는 나의 뇌리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불꽃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치안 유지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윽고 윤동주는 조국의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옥중사(獄中死)했다. (우에모토 마사오)
윤동주는 언제나 ‘재생’과 ‘부활’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리며 살았던 시인이었다.(마광수
윤동주의 작품 가운데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연애를 했다는 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윤동주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서 막연하게나마 어떤 ‘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원초적 심상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은 단순한 이성적 연애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 혹은 연민의 정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주 ‘순이’를 부르고 ‘어머니’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던 크나큰 고독감을 사랑에 대한 갈구 또는 상상으로 채워나가려고 했다는 사실이 짐작된다. 특히 시인 윤동주가 사랑했던 대상들은 모두가 작고 어리고 연약한 것들이었다.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하고 불쌍한 우리나라 동포가 되기도 하고 또는 작은 짐승, 작은 들꽃이 되기도 한다. (마광수)
- ‘순이는 사랑의 상징 이웃은 연민의 상징’ 중에서
젊어 요절한 시인에게는 특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킨 것 같은 맑고 깨끗함이 후세의 독자까지 매료시켜 항상 수선화와 같은 좋은 향기가 풍긴다.
요절이라고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바로 반 년 전,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처음에는 릿교대학 영문과에 유학, 이윽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적을 옮겼고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시모가모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로 보내졌다.
거기서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기 직전, 모국어로 어떤 말을 큰 소리로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이 무엇인지 일본인 간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주 씨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절명하셨습니다.”라는 간수의 증언은 남았다. 말하자면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시인에 가까이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도 조금씩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9년째가 되는 1984년에 이부키 고 씨에 의해 그의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일본어로 완역되었다.
내가 그의 시집을 번역하겠다는 의욕은 꺾였지만 이부키 고 씨의 훌륭한 번역과 연구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의 사랑스러운 동시(童詩)까지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이바라기 노리코)
- ‘비운의 조선 청년 시인 윤동주’ 중에서
시를 쓰는 것은 시대의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거는 일이다. 창씨개명과 조선어사용 금지, 강제 공출과 징병제 등으로 식민지 피지배의 ‘어둠’이 깊어갈 무렵 청년 시인 윤동주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쉽게 씌어지는 시」) 시인이었다. 앞을 향해 내딛을 길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 속에서 홀연히 닥칠 ‘아침’을 기다리던 윤동주는 안타깝게도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속에서 끝내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고 원통한 삶을 끝냈다. (장석주)
-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민윤기
1966년 6월호 월간 ‘시문학’에 박두진, 김현승, 문덕수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시와 시론’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베트남전쟁 파병 병사 신분으로 종군체험 타이핑 시집 『우기雨期의 시』 속에 「내가 가담하지 않은 전쟁」 연작시 30여 편을 발표하였고, 1974년 시집 『유민流民』을 출간하였다. 1970년대 군사정권 후반 이후 절필 상태로 시 발표를 중단하고 신문 잡지 출판 편집자로 일하였다. 2011년 오세훈 시장 시절 문화관광디자인부 위촉으로 지하철 시 관리용역을 맡으며 다시 시 쓰기를 시작하였다. 2014년 시의 대중화운동을 위한 시잡지 ‘월간시’를 창간하였으며 2015년 제3시집 『시는 시다』 2017년 제4시집 『삶에서 꿈으로』 2019년 제5시집 『서서, 울고 싶은 날이 많다』2020년 제6시집 『홍콩』을 출간하였고, 2021년 시선집 『사랑하자』를 출간하였다. 현재 ‘월간 시’ 편집인, 서울시인협회 회장이다.
목차
머리말
엮은이가 독자에게
일러두기
1
윤동주의 최후의 사진 - 야나기하라 야스코
윤동주 도쿄 하숙집과 그 집에서 쓴 다섯 편의 시 - 야나기하라 야스코
윤동주는 ‘시대의 아침’을 기다렸다 - 이부키 고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 - 고노 에이지
「서시」는 원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 민윤기
윤동주를 향한 일본인의 긍정 부정 3가지 시선
윤동주의 혼이 부산에 머물고 있다 - 양왕용
일본어 번역 「서시」 오역 상태가 심각하다 - 가와즈 기요에
윤동주 추모비 옆 무궁화나무 테러에 시달린다
윤동주 시신을 화장한 화장터를 찾았다
일본아, 한국 국민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 - 미즈노 나오키
릿교대에도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다
윤동주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7가지 - 신길우
윤동주 가족은 명동촌에서 이렇게 쫓겨났다
2
윤동주의 소년 시절 - 김정우
중학생 윤동주 - 박용일
‘대학생’ 윤동주 — 정병욱
연희전문 시절의 벗 윤동주 — 유영
윤동주와 나 — 장덕순
윤동주를 생각함 — 박창해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 윤영춘
나의 형 윤동주 — 윤일주
왜 윤동주는 누상동 하숙집을 두 번 옮겼을까? — 권일송
막내동생 윤광주의 가엾은 인생 — 리광인
나는 윤동주의 친구였다 — 타고 기치로
비운의 조선 청년 시인 윤동주 — 이바라기 노리코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윤동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3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 고석규
하늘·바람·별의 시인 윤동주 — 문익환
윤동주는 가장 훌륭한 시인이다, 동시에 아주 희귀한 유형의 시인 — 김용직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 — 임윤덕
‘순이’는 사랑의 상징 ‘이웃’은 연민의 상징 — 마광수
윤동주는 순결한 영혼의 불꽃이다 — 이숭원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 장석주
4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난 108호 죄수 — 김헌술
윤동주의 처절한 최후 — 고희욱
5
윤동주 시집의 숨은 공로자 정병욱 ‘윤동주를 말하다’
윤동주 판결문 전문(한글 번역)
윤동주 시인이 애독한 시집들
황량한 벌판의 서글픈 만남 — 김승옥
윤동주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