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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이행기
- 1962년 부산 수정동 출생 - 부산금성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및 동대학원 중남미지역연구학과 졸업(석사)- (주)대우 무역부문 근무- 페더럴-모굴 코리아 근무
2권을 시작하며
1886년 조선
군사 1명 양성에 연간 최소 200냥과 쌀 10석이 필요 | 제2차 조러밀약과 고종 폐위주장 | “권력자들의 명령을 장님처럼” 따르는 조선 백성 | ‘조선대국론’, ‘유언사조’ ‘시사지무십관’ | 고종이 본 위태로운 조선 | 고종의 용기와 과단성 부족을 지적한 좌의정| 월급을 못 받는 관리들 | “어찌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 러시아 상인이 본 금광 노동자들의 삶 | 김규식, 배재학당, 육영공원, 콜레라
1886년 일본
콜레라 사망자 11만여 명 | 건축학회, 학교령, 교과서 검정제도, 관료임용제도 | 불공정조약 개정 회의 | 김옥균의 상소문 | 이홍장의 거문도 철수 협상 | 화물선 침몰 사고와 영사재판권 문제 | 헌법 초안 기초 작업
1887년 조선
“오늘날의 도적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합니다” |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지석영의 유배 | 조선의 독립에 비관적인 러시아·미국공사 |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부족하여 무덤까지 파고 있다” | 외교고문 데니의 활약 | 해외 공사 파견에 간섭하는 청 | 주미공사 파견과 청국에 항의한 미국 | 박정양의 신임장 단독 제정과 러시아 외무상의 보고 | 박정양의 귀국과 황현의 기록 | 외국 공사들의 반응 | 연무공원
1887년 일본
건전지, 수력발전소 | 일본적십자사 | ‘방어선’ 확장 | 조약 개정 반대 여론 | 시베리아 철도 건설 논의 | 헌법 교육을 받은 천황 | 보안조례 | 호예원 | 전자기파
1888년 조선
박영효의 ‘건백서’ | 궁전 공사비 50만 냥 |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오른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병조판서 | 러시아와 프랑스 정부의 대(對)조선 지침 | 외국인에 대한 소문 | 대궐 내에서 노름하는 군사 | “벙어리에 귀머거리, 소경까지 겸했으니” | “모리배들”에게 놀아난 화폐주조 | 조선이 청에 흡수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공사 | “마른 수레바퀴 자국 안에서 헐떡거리는 붕어보다” 심각한 백성 | 관직매매와 ‘벼락감투’ | “상인들은 낮으로 울부짖고 행인들은 밤으로 통곡하는데” | 무정부 상태 | 데니의 외로운 투쟁
1888년 일본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 ‘제국헌법’안 심의와 추밀원 | 전국이 초토가 되더라도 저항할 것 | 불공정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영국 | 물리학 용어의 번역 통일 | 롤 필름과 코닥 카메라 | 서태후, 해군 예산을 황실 별장 공사에 전용 | 데니, 《청한론》 발간
1889년 조선
제대로 안 되는 현지 보고 | 진주의 환곡, 징세 문제와 광양의 “반란” | 행동을 하지 않는 고종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출근을 거부하는 영의정 | “당장 부끄러움으로 죽고만” 싶은 호조판서 | 토목공사, 기도비용, 사치를 억제하라는 상소 | 평안감사의 사직상소 | 아직까지 세계 지도도 안 본 고종과 신하들 | “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놓인 조선 | 러시아 장교와 영국총영사가 본 조선 | 방곡령
1889년 일본
메이지헌법 발포와 선거법 | 오스트리아 교수가 강조한 조선의 중요성 | 서구의 메이지 헌법 평가 |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외무대신 | 징병제 개정, 육군사관학교 1기생, 히비야 공원 | 에펠탑과 엘리베이터
1890년 조선
“모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습니다” | 조선의 차관 도입을 막은 청 | 대왕대비 장례비 122만 냥 | “털끝까지도 모두 병이 든 것과 같다” |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백성들 | 속방의식을 본 외교사절 | 프랑스공사와 영국총영사의 보고 | 미국공사의 보고 | 러시아공사의 보고 | 원세개의 《사한기략》 | 끝없는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 | “거북의 등에서 털을 깎아내야 할 정도”의 재정 상태
1890년 일본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공포 | 조약 개정 방침 | 첫 중의원 선거, ‘교육칙어’, ‘불경사건’ | 주권선과 이익선 | 비스마르크의 퇴진
1891년 조선
돈이 없는 군부 |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마시고” | “과연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보십니까” | “과거를 설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 73년 전과 다름없는 과거의 문제점 | 천둥의 마지막 기록 | 조선의 관리를 “강도들”이라 부른 영국 인류학자 | 전 영국군 장교와 미국공사가 본 조선
1891년 일본
오쓰 사건 | 죄형법정주의와 사법부 독립 문제 | 시베리아 철도 착공 | 북양해군의 일본 방문 | 행정부와 의회의 충돌 | 삼국동맹, 독러 재보장조약, 러불동맹, 삼국협상
1892년 조선
“나라의 군대 위용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조정 백관들은 고식적인 의논을 능사로 삼고 지방관들은 탐학만을 일삼고” |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니” | “조석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몹시도 두렵습니다” | 좌의정이 지적한 당시 조선의 문제점들 | 11년 후의 러시아 민속학자 | 미국공사의 정확한 예측 | 청으로부터 20만 냥 차관 도입 | 함경북도와 평안도의 민란 | 동학교도의 삼례역 집결
1892년 일본
의회 해산과 총선거 |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 제국대학 교수 해임 사건 | GE, 디젤 엔진
1893년 조선
광화문 앞 ‘봉장규혼’ | ‘봉장규혼’ 비판 상소와 체포 명령 | 외국 군함들의 인천 입항 | ‘척왜양창의’ | 청국군 파견 요청을 제기한 고종 | 탐관오리와 조선왕조 | 동학교도들의 귀향 |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보아도 결국은 전혀 대책이 없고” | 무당과 점쟁이에 심취한 왕과 왕비 | 만석보 수세와 전봉준, 함경도 | 평안도와 황해도 민란
1893년 일본
정부와 의회의 타협 | 조선에 대한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육군참모차장의 조선과 청국 시찰 | ‘전시대본영’ 조례 | 군비의견서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메이지 천황의 후회 | 기타무라 도코쿠 |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
1894년 조선
고부군아 습격과 해산 | 고부민란에 관한 기록 | 주청 러시아공사의 보고 | “그의 사지를 찢고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 러시아공사가 본 동학난의 원인 | 파병 준비를 건의한 일본 임시대리공사 | 청국군과 일본군의 상륙 | 전봉준의 원정서 내용과 고종의 책임 | 전주성 탈환 및 동학도들의 귀향 | 미국공사의 보고 내용 | 조선의 마지막 사신, 걸어서 북경까지 | 일본의 개혁 항목 제시와 조선의 거부 |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 | 청일전쟁 개전과 고승호 사건 | 190년 만에 폐지된 명나라 황제 제사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 그리고 방해 세력 |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 일본을 의심하는 마음” | 도량형과 〈신식화폐장정〉 | ‘교환의 매개’ 기능을 상실한 엽전 | 경장을 알리는 고종의 교서 | 〈조일 잠정합동조관〉, 〈조일동맹조약〉 | 박영효의 사죄의 글 |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 발각된 대원군의 밀서 | 동학도의 2차 봉기 |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 전봉준 | 갑오개혁 비판 상소 | 일본의 개혁안 20개조 | 강원도와 황해도에서의 전투 | 김개남의 체포 | 홍범 14조 | 두 명의 탐관오리가 120만 냥 횡령
1894년 일본
중의원 선거와 야당의 승리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대본영 설치 | 청과 일본의 파병 통지 | 내정 개혁 추진 방침을 청에 통보 | 청, 영국과 러시아에 공동철병 중재를 요청 | 조선 내정 개혁을 거부한 이홍장 | 조선 내정 개혁안 확정 | 미국·영국·일본공사들의 움직임 | 일본에 유감을 표명한 미국 | 공동철병에 대한 러시아와 영국의 조치 | 제2차 절교서 | 베베르와 이홍장의 회담 | 청 해군의 실상 |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청 | 조선의 운명을 예측한 주청 러시아 무관 | 청, 조선에 군대 증파 | 영일통상항해조약 | 외국의 자국 침략에 대한 일본의 의지 | 청국 내의 주전론과 일본의 출전 명령 | 청과 일본이 조선을 공동 점령할 것을 재촉하는 영국 | 청일전쟁 | 고승호 사건과 영국 여론 | 대조선 정책 결정 | 일본 의회의 방향 전환 |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확전론과 야마가타의 소환 | 독일, 러시아,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청 |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 | 니콜라이 2세 즉위 | ‘사한기략’과 ‘속국’
1895년 조선
재산을 뺏기는 동학도 | 청나라 연호 사용 폐지 | 지방관의 저항으로 좌절된 징세 제도 개혁 | 회계법 | 이준용 모반 사건 | 독립경축 행사에 불참한 미국공사 | 베베르에 대한 고종의 신임 | 갑오개혁의 파탄 | 갑오개혁에 대한 고종의 불만 | 갑오개혁과 왕의 권력 | 갑오개혁의 반대 세력 | 죽음을 예감한 총리대신 | 콜레라 발생과 인구 변동 | 을미사변 | 민영준에 대한 프랑스공사의 보고 | 스기무라 서기관의 기록 |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한 고종 | 양력, 소학교, 단발령, 연호, 의복제도 | 춘생문 사건 | 미국무장관의 훈령 | 영국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선
1895년 일본
전염병으로 5만 3천여 명 사망 | 센카쿠제도 편입 | 일본은행, 조선에 300만 원 차관 제공 | 정여창 제독의 자결 | 러시아 무관의 일본군에 대한 평가 | 미국이 파악한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움직임 | 러시아의 삼국간섭 방침 확정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과 청국 내 반대 세력 | 양계초, 엄복, 담사동의 비판 | 일본의 환호와 삼국간섭 | 러시아 함대의 중국 집결 | 일본, 요동반도 포기 결정 | 군사 1백여 명의 자결 | 1만 4천 명을 희생한 대만의 저항 | 일본, 조선에 대한 간섭 배제 결정 | “빗물로 머리를 감고 불어오는 바람으로 목욕을 하면서” | 향후 10년간 전함 건조 계획 | 미우라 고로 임명 | 청의 차관 도입과 러시아 | 요동반도 반환 각서 교환 | 미우라의 을미사변 보고서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에 감사를 표시한 조선 | 대조선 불간섭 정책 | 요동반도 반환조약 | 대폭 증가한 다음 해 예산안 | 러시아의 마산포 관심 | 과학사
1896년 조선
단발령 반대상소 |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 단발령으로 인한 사회 혼란상 |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사회 혼란상 | “차라리 머리털을 보존하다가 (조선이) 망하는 편이 낫다” | 아관파천과 대신들의 처참한 말로 | 고무라 공사의 보고 | 단발령 철회 | 경인철도 부설권과 독립신문 창간 | 고무라-베베르 협정 | 경의철도 부설권 | “초조함과 근심은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산업이 날로 쓸쓸해지고” | 압록강과 울릉도 삼림벌목권 양도 | 내각 폐지와 의정부 부활 | 외국인과 외국정부가 본 조선 |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조선 | 당시 조선 주변의 상황 | 조선군의 실상 | 예산의 98%가 관리의 월급과 비용 | 고종과 신하들에 대한 러시아 측의 보고
1896년 일본
일본과 러시아의 대화 채널 | 조선과 관련한 조약 체결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한반도 중립화를 제의한 영국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와 39도선 | 민영환의 러시아 방문 | 민영환 일행의 방문 기록 | ‘동청철도’와 남만주지선 | 러-청 비밀동맹 조약과 동청철도 협정 | 일본의 해군 확장 계획
1897년 대한제국
김홍집 등을 “역적”, “흉적”으로 본 고종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도리어 전보다 심하니” | 독립신문의 ‘조선병’ 치료 방법 | 고종의 환궁 | 미국무장관의 훈령 | 백성의 원망을 듣는 암행어사 | 외부대신은 56일, 군부대신은 64일 | 고종의 결의와 단발령 취소, ‘광무’ | 러시아 외무상의 훈령 |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는 상소들 | 고종, 황제에 오르다 | ‘황제’에 반대한 서로 다른 이유 | 여전한 왕실 행사비 지출 | “상호 시기하고 의심하는” 군부 | 4만 호의 인구에게 1년에 5만 원도 큰돈 | 백성을 수탈한 지방군
1897년 일본
5연발식 무라타 총, 교토제국대학, 영화 | 야하타 제철소 | 러시아의 대일 정책 | 러시아의 현상 유지책 | 경봉철도 | 독일의 교주만 점령 | 러시아의 대련, 여순 점령 | 일본 외무성의 반응 | 독일의 해군증강책
1898년 대한제국
“조선 백성들은 몇백 년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아” | “나라의 재정은 꾸릴 방도가 없고” | 러시아의 철수 | 러시아와 프랑스공사의 본국 보고 내용 | ‘주막의 나그네’ | 장례비와 기민의 구휼비 비교 | 황국협회 | 최시형의 사형 집행 | 배신자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유럽전권공사의 사직의 변 | “필요한 때에는 … 잡세”를 신설 또는 증설할 수 있다 | 조약 이행을 강조하는 외부대신 | “글이 매우 외람”된 상소 | 경부철도 부설권 | “협회라는 것”의 활동 금지 명령에 “분통이 치밀어” 오른 윤치호 | 헌의 6조 | 독립협회 “혁파”와 박정양 등 파면 | ‘익명서 조작 사건’과 독립협회 간부 체포 | 만민공동회의 철야 시위, 독립협회 간부 석방 | 보부상의 습격과 독립협회 복설 | 외국 공사들의 회의 | 고종의 약속 미준수 | 독립신문의 사설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해산과 집회 금지 |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급한 탁지부 | 러시아·일본·미국공사의 보고
1898년 일본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한 러시아 | 양자강 연안 불할양 협정 | 독일 및 러시아의 조차 조약과 남만주지선 철도 부설권 | 일본과의 연합을 주장한 미국 해군 전략가 | 영국 식민상의 일본과의 동맹의사 | 니시-로젠 협정 | 미국 언론의 선동과 미국-스페인 전쟁 | 러시아와 영국의 철도 건설 상호 인정 | ‘무술변법’ | ‘무술정변’과 ‘백일유신’, 광서제 유폐 그리고 조선 | 담사동 | 강유위, ‘동아동문회’ | 영국과 일본 | 경봉철도 건설 차관계약 | 한반도 점령을 건의한 러시아 해군 제독 |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1899년 대한제국
학부 예산은 세출 예산의 2.2% | 독립협회 지회 활동도 금지 | “구보나 하는 능력”의 군사들 | 주미공사 부임 거부의 변 | 프랑스공사가 보고한 관직매매 | 빈번한 법령 공포 | 무덤가 돌 장식 비용의 반도 안 되는 교육비 | 러시아 해군의 마산포 측량과 토지 매입 시도 | 대포 소리,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경성 | 원수부 설치 | 대한철도회사 | 이승만의 탈옥과 체포 | 대한국국제와 홍범 14조 | 세금 체납을 “탄식”하는 고종 | “백성들이 …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 매일신문, 독립신문 폐간
1899년 일본
소학교 학생 346만 명, 수족관 | 의화단의 등장 | 루즈벨트 주지사의 연설 | 이토의 부국강병론 |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협정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 마산포를 원한 러시아 해군 | 남만주철도 건설 시작 | 제2차 보어전쟁 | ‘대한정책의견서’와 마산포 | 프랑스의 광주만 조차
1900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616만 원 | 각종 비용 항목과 금액 | 예산의 10%가 넘는 왕실 비용 지출 내역 | 땅에 떨어진 대신의 권위 | 내장원에 진 빚을 갚으라고 탁지부를 독촉하는 고종 | 고종 폐위 쿠데타 주모자 처형 | 마산포 조차 조약 |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해나가는” 군부 | “협잡꾼들”을 보내 세금을 걷는 황실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절박”한 경기도 | “위란이 곧 닥칠 형세입니다” |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신하들 | 귀임한 주일공사 | 족보 위조 | 가로등 3개 점등과 파리의 지하철
1900년 일본
세계의 주요 지표 | 선거권자 자격, 공중전화, 아드레날린, ‘무사도’ | 러시아 해군대학의 전쟁 도상 훈련 | 의화단의 난, 8개국 연합군, 러시아의 만주 점령 | 제2차 문호개방 선언 | 러시아의 한반도 분할론 | ‘북청사변선후책’과 일본의 만한 교환 제의 | 일본과의 비밀조약 체결을 제의 | 대한제국의 중립국안 제의 |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희망한 루즈벨트 | ‘국민동맹회’의 정부 압박 | 러-청 비밀협정 가조인 | 대한제국 중립화를 제의한 러시아 | 영국, 일본, 미국의 공동의 적이 된 러시아 | 독일, 함대건설법 통과
1901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907만 원 | 세출 예산의 약 20%가 황실 비용 |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일공사 | 이재수의 난 | 세금의 몇 배를 거두어들이는 봉세관 | 50일 묵는 데 2만 3천여 원 지출 | ‘저주받은 인민들’ | 200년 전에 살고 있는 신하들 | 경부철도 기공식 | 법집행이 안 된다 | “세금을 받아 낼 길이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다 | 고종의 세금 독촉 | “집들은 텅 비고 누더기를 걸친 굶주린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 “가죽을 벗겨 내고 뼈를 긁어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 신하들의 경고 | 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 | 백성은 쉽게 사형 당했다 | 유길준의 고종 폐위 쿠데타 실패
1901년 일본
야하타 제철소 완공 | 람스도르프-양유 협의 | 가쓰라 다로와 고무라 | 영국과 일본의 교섭 시작 | 베이징 의정서 | 배상금 포기 | 외무대신의 적극적 정책 | 영국의 동맹조약 초안 | 러시아와의 협상 우선을 주장한 이토 | 초조한 영국 외무상 | 외부대신의 일본 방문 | 이토의 러시아 방문 | 일본의 수정안 제시 | 서태후의 ‘변법상유’ | 유에스스틸, 노벨상, 로이터와 특약
1902년 대한제국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 “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가져가는 세금 | “말류의 폐단”을 걱정하는 내장원 경 | 즉위 40주년 행사 | 제2의 수도 건설 결정 | “통탄”하는 탁지부대신 | “사람마다 열 손가락은 피가 흐르고 입은 푸성귀 색깔이니” | “별다른 대책”이 없고 “나라 창고는 비어” | 행사비와 건축비에 148만 원 | 왕실 경비와 서경 공사비가 예산의 최소 25% | 제2수도 공사비에는 은화 55만 원, 수만 명 죽은 전염병 퇴치에는 “특별히 은화 3,000원” | 관우 외에 유비와 장비에게도 제사지냈다 | 지방 유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 여전히 중화사상에 잠겨 있는 1902년 10월의 대한제국 | 1년은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본 미국공사 |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본 러시아공사들 | 굶어 죽은 백성들에 관한 기록 | 유길준과 이승만 | 군부의 실상 | 두어 달 근무한 유럽공사와 황족의 해외 유람 보고 | 권력 투쟁 | 하와이 이민
1902년 일본
무선 기술 연구, 해외 유학생 수 1만 1천여 명 | 나쓰메 소세키가 본 일본 | 청의 대규모 일본 유학생 파견 | 동사 사고 | 영일동맹 | 동맹 조약 제1조에 관한 주영 일본공사의 설명 | 일본의 지위 향상 | 프랑스, 독일, 미국의 입장 | 만주 철군 협약 | 드러난 영국의 문제점들 |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권유한 프랑스 대통령 | 대한제국의 양도를 주장한 주한 러시아공사 | 동청철도 파괴를 주장한 참모들
1903년 대한제국
“빼돌리는 것이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 “정승의 직책은 한갓 이름만 있고” |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화를 만들어 내니” | 최소 열두 번 사직을 청한 외부대신 | 황성신문의 우려가 현실로 | 주일공사는 공석 중 | “귀머거리에게 듣는 일을 시키고 벙어리에게 말하는 일을 시키는” |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 가는 경상도 백성들 | “밥 짓는 연기도 거의 나지” 않는 전라도 | “떠돌다가 점점 죽고 말” 경기도 백성들 | “백성의 근심은 죽음보다 심한” 충청도 | 제2수도 건설 공사비에 짓눌리는 평안남도 | “흩어져 떠돌고 있는 무리가 줄을 잇고” 있는 함경도 | 제2수도 건설 공사에 추가 지출 | 청과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는” 백성들 | 대신들의 출근 불량 | 신라왕릉 보수 요청 상소 | 백동화의 폐단 |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 | 순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 | 이태리 총영사의 기록 | 미국 기자의 기록 | 전 러시아공사의 기록 | 러시아 민속학자의 기록 | 러시아의 경의철도 부설권 요구 | 러시아의 용암포 땅 매입과 영국, 일본 | 조차 조약 체결을 부인하는 대한제국 | 신뢰를 잃어가는 대한제국 | 경성-개성 철도공사 계약 | 일본의 개전을 바라는 황성신문 |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 | 러시아 영토로의 피신을 문의한 고종
1903년 일본
제2차 만주 철군 취소와 동청철도 완공 | 러시아 해군의 전쟁 예측 | 러시아 내 강경파의 등장 | 만주 철군을 위한 7개 항 요구 조건 | 전쟁 불사 결정과 영국공사의 보고 | 주청 러시아 무관의 강경론 | 러시아 황제의 강경책으로의 전환 | 청국 내 반청 세력 | 러시아 육군상의 일본 방문 | 개전론과 어전회의 | 대한제국을 넘겨줄 것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7박사 건의서’ | 알렌과 록힐의 설전 | 총리의 사직서와 원로들의 퇴장 | 주일·주청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 러시아에 6개 조 협약안 제시 | 러시아, 만주에 극동총독부 설치 | 일본과 러시아가 거부한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제의 | 러시아의 3차 철군 거부 | 일본의 제안과 크게 다른 러시아의 1차 회답 | 일본 내 반러시아 여론 | 고다마 겐타로와 도고 헤이하치로 |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과 일본의 2차 서한 | 더욱 커지는 반러 여론 | 러시아의 2차 회답 | 환영받지 못한 고종의 특사 | 개전을 결심한 일본 총리 | 주일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의 3차 서한 | 대한제국과 ‘보호 조약’ 체결 방침 확정 | 영국의 엄정중립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 포드자동차, 퀴리, 라이트 형제, 등대, 회전목마
1904년 대한제국
불안한 서울 민심 | 파천에 실패한 고종 | “어찌 야만인이라 하지 않겠는가” | 중립 선언 | 러일전쟁 발발과 황성신문 | 한일의정서 | 이때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 한일협정서 | 백성들이 “구렁과 골짜기에 나뒹굴 상황”의 함경도 | “민력이 이미 고갈”된 평안도 | “도탄에 빠진” 황해도와 “이산하는 실상”이 심각한 강원도 | “소요”와 “유랑”이 계속되는 경상도 | “약탈”과 “민란”의 충청남도와 “탄식”과 “기근”의 전라도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조석도 보전할 수 없을 만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 | “나라의 비용을 소모하여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 외교를 담당할 인재가 없다 | 파산 상태임을 알리는 탁지부대신들 | 부정부패와 “착취”가 일상임을 알리는 내부대신들 | 인재 육성이 없었다는 학부대신 | 1904년의 대한제국 | “오늘날 폐하의 백성들이 불쌍하고 가엽지 않습니까?” | 권한이 없는 의정부 | “폐하의 것”, “폐하만이 부유해질 리가 있겠습니까?” |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 “장기짝”처럼 교체되는 대신들 | 내시, 점쟁이, 무당을 가까이 한 고종 | 직급이 낮다고 면박당한 상소 |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 “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 손병희 | “자신만이 현명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 “성인군자의 학문에만 갇혀” 산 중국 사대부 | 두 명의 장례 비용이 예산의 최소 10% | “항상 그랬듯이 이 사람들은 주인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 실패한 의정부 중심의 국정 운영 시도 | 경운궁 화재 | 근무 기강을 질책한 고종 | “비옥한 땅을 그대로 버려두고 있습니다” | 해외 공관원들 철수 | 《독립정신》 서문 | 일진회에 대한 《매천야록》의 기록 | 민란 | 동학도 소탕을 명하는 고종 | 고위관리들의 도박 | “이 변고는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
1904년 일본
미국과 독일의 중립 선언 | 주일 러시아공사의 본국 건의 | 주일 미국공사와 러시아무관의 보고 | 러시아와 일본의 마지막 교신 |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에 중재 요청 | 일본, 개전 결정 | 여순 공격과 선전포고 | 외채 발행에 실패하면 일본은 붕괴된다 | 에드워드 7세와 시프 | 목표의 8배의 외채 발행에 성공 | 루즈벨트와 미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 | 영불협정 | 일본의 승전을 바라는 중국 신문들 | 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삼는다 | 루즈벨트의 강화조건과 독일 황제 | 고무라의 12개 조 강화 조건 | 요양전투 | 미국의 ‘한일협정서’ 인정 | 영국의 러시아 함대 견제 | 도거 뱅크 사건 | 러시아 민심과 레닌의 러일전쟁 비판 | 여순전투 |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 | 미쓰코시 백화점
1905년 대한제국
1월, “썩은 밧줄에 매달린 것 같고” | 2월, “언제 망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3월, “팔짱을 끼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 4월, “강제로 빼앗고 토색질을 감행하여” | 5월, “나라의 운명이 안착할 곳이 어디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 8월, “이는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무정부라는 것입니다” | 외국 공사들이 본 대한제국의 무정부 상태 | 한날에 올라온 4부 대신들과 협판들의 사직상소 | 경무사의 사직상소 | “집들은 모두 텅” 빈 함경도 | “물 없는 연못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 같은 평안남도 백성들 | “구렁텅이에서 죽어” 나뒹구는 황해도와 다스리기 번거로운 강원도 | 도둑이 극성인 충청남도와 “이미 구제할 수도” 없는 경상남도 | 경부선 개통 | 일본군을 위문하고 온 위문사와 특파대사 | 러시아 황제에게 밀서를 보낸 고종 | 신하를 비난하는 고종 | 신하들의 고언 | 루즈벨트 딸의 방문 | 영일동맹 조약 내용에 항의한 외부대신 | 의병 소탕 명령 | 450년 전에 사는 신하들 | 이토 도착 5일 전 대한제국 궁궐 내부의 실상 | ‘한일협상조약’ 초안 | ‘한일협상조약’ 체결 | 을사조약 비판 상소 | 외국공사관의 철수 | 민영환과 조병세의 자결 | 해외 공사관 폐쇄 | 1906년 세출 예산 796만 원 |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주기를 상소한 다섯 대신 | 고종이 신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례들 |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충청남도 관찰사의 사직상소 | 알렌, “너무도 오랫동안 무사안일의 세월을 보냈다” |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다
1905년 일본
대학의 독립과 학문의 자유 | 여순 전투 | 프랑스 무관의 러시아 해군 평가 | 피의 일요일 사건 | 대한제국 병합 의사 표명 | 독도 편입 | 봉천전투 | 비테, 대한제국 양여 등 종전 조건 제시 | ‘한국보호권확립’ 통과 | 중국신문, 일본의 승전을 기원 | 강화 조건과 제2차 일영동맹안 | 일본의 쓰시마해전 승전과 강화 협정 중재 요청 | 러시아 내 시위와 유혈 사태 | ‘중국혁명동맹회’, 일본과의 연대를 중요시 | 이승만의 석방과 미국 파견 | 주한 영국총영사,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건의 | 미육군장관의 일본 방문 | 강화 협상 시작 | 제2차 영일동맹 | 전쟁의 인적·물적 손실 |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고종의 밀서 |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 | 분노에 찬 일본 여론 | 루즈벨트와 고무라의 회담 | ‘만한시설강령’ | 영국,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지지 표명 | ‘10월 선언’ |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조선왕조 | 기아선상에 놓인 주미공사관원들 | 보호 조약 체결에 관한 고무라의 구상 | 만주 철병과 철도 인도 |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해외에 통보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이론 발표
책을 마치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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