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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순을 잡아주며
시와정신사 | 부모님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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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순을 잡아주며


처음엔 옮겨준 곳
뿌리 내리기 힘들었는지
송충이 같은 오이 몇 개
맺다 떨구고 맺다 떨구더니
몇 번을 그렇게 허방 치더니
포도시 살아 하루가 다르게 커가며
손가락만한 오이 여기저기 달랑거린다
이쁜 마음에
옹알이 하는 애기 쉴 새 없이 들여다보듯
아침저녁, 저절로 발걸음 텃밭으로 향한다
밤새 무얼 먹는지
금방금방 자라는 여린 연둣빛 순,
꺾일 듯 허공에서
갈 곳 몰라 헤매고 있다
금세라도
또르르 떨어질 것 같은
허한 눈망울들
영문도 모른 채
제 젖무덤 빼앗기고 옮겨진 자리
몸 붙이기 힘든지 이리저리 보채다
한번 기댄 가슴 놓지 않으려
죽어라 꽉 쥔 파리한 고사리 손,
거지중천 한없이 휘젓는다
오이순 잡은 손
떨어지질 않는다

모녀


며칠째,
야문 것에 가끔 힘들어하던 이
뜨거운 차가운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왼쪽 위 어금니, 그 옆 이까지 흔들린다
잇몸치료하고 위 두 개는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한다
찬찬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팔순 엄니,
틀니를 끼고 뺄 때마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바라봤던
골 깊이 패인 합죽한 얼굴,
엷은 미소로 고개 끄덕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하나 둘, 엄니 닮아가는 것들이 많아진다
오늘, 긴긴 동짓달 밤
실한 소족 하나 푸욱 과서
팔남매 세상 내보내기에 꺼질 날 없던,
아버지 손길 멎은 지도 삼십여 년
쭈글거리는 배 거죽만 남은 엄니,
배앓이 한번 못해보고
머리에 허연 파뿌리
고스란히 피우고 사는 딸,
서로서로 다독이며
푸지게 한 사발씩 나눠먹어야겠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은순
충남 금산 출생. 2006년 계간 『문예연구』 여름호에 「텃밭」, 「장담기」 외 3편이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한남문인회’, ‘오정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005 시인의 말

____ 제1부

013 나에게 당신은
014 오이순을 잡아주며
016 술래잡기
018 안부
020 둥근 것에 대하여
022 풍선을 부는 여자
024 오징어를 데치며
026 흘려보낸다
028 등나무 아래서
030 숲에 들어
032 말복도 지나고
033 엄마, 엄니
034 대파를 썰며
036 모녀
038 김장배추
039 눈 오는 강가에서

____ 제2부

043 웅덩이
045 대반동 바다에서
047 밤낚시
049 쉿!
050 채송화
051 하현달
052 헛꽃
053 늪
054 가을 숲
056 길고양이
057 담쟁이
058 코스모스가 피었어요
060 섬바위
062 청호반새의 내집 마련
064 거미와 마른 꽃
066 보푸라기

____ 제3부

069 살얼음
070 가을愛
072 장담기
074 산책길에서
076 가을 2
077 3월
078 함박눈
080 가을
082 만추
083 장대비
084 푸른 잎새, 검은 가지
086 도솔비를 잡으며
088 봄, 텃밭에서
090 유월
092 여름밤
093 봄 마당에 서면

____ 제4부

097 소실점
098 텃밭
099 덖음
100 오후 4시요
102 실밥을 풀며
103 연필을 깎다
104 격포
105 눈 쓰는 아침
107 골목대장이 돌아왔다
108 텃밭을 끓이다
110 탈
111 공갈빵
112 담북장
114 중앙선
115 흙벽돌담
117 스카프

119 해설 | 둥근 것과 웃음으로서의 삶 | 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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