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줄기차게 시의 본질을 찾고 있는 정홍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국화는 뜨겁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207로 출간되었다. 정홍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이자 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시 속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들의 말씀을 전하는 데 치중한다. 풀의 말씀, 돌의 말씀, 갯벌의 말씀, 사람의 말씀이 그의 시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리얼리스트이자 진정한 생태주의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정홍순의 이런 시적 성과는 오직 정홍순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을 땅에 새겨진 삶의 무늬라는 의미에서 ‘지문(地紋)’이라 부른다. 글에도 생의 무늬가 새겨진다. 글에 새겨진 삶의 무늬, 그것이 문체이다. 글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다양한 정동(affect)들, 수치, 분노, 후회, 절망, 환희의 흔적들이 각인되어 있다. 세계관에 따라 글에 새겨진 무늬들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문체는 곧 세계관이다. 정홍순의 문체는 마치 서슬 푸른 조선 낫 같다. 그것은 망설임이 없고, 단호하며, 진실을 호령하는 장군의 언어처럼 선이 굵다. 그는 역사의 큰 좌표들을 사방으로 펼쳐놓고 그 큰 틀 안에서 툭툭 튀는 삶의 다양한 무늬들을 잡아낸다. 그의 시들은 많은 디테일을 응축하고 생략하지만, 현실의 총체적 재현이라는 리얼리즘의 시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언어-손가락은 역사의 큰 흐름을 가리키고, 그의 가슴은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정념을 담아낸다.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산 한 자락 헐어
흙들이기 나간 아배는
땅내 맡고 나온 곰처럼 걷고 있다
…(중략)…
문수골 땅굴에서 흐느끼고 있는
빨치산의 눈물이
고드름 끝으로 떨어지는 날이면
서걱서걱 얼음 뜬 섬진강
해설피 건너오는 형님아
소리 내 불러보지도 못했다
바람이 떴다
삽날도 부러질 땅이 녹고 있다
황토 한 삽 떠서 재 너머 다랑논에
한 짐 한 짐 놓는다
형님아
옛집 잊어버리지 말고
아무 때든 잘 밟고 찾아오기나 해라
― 「객토」 부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산 한 자락 헐어” 객토를 하는 “아배”의 모습은 “땅내 맡고 나온 곰처럼” 우직하다. 화자는 이 아련한 봄날의 풍경에서 1948년 10월의 여순민중항쟁을 떠올린다. “문수골 땅굴에서” 흐느끼던 빨치산들에게 승리의 봄은 결코 오지 않았다. 고드름 녹는 초봄에 “서걱서걱 얼음 뜬 섬진강/해설피 건너오는 형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디테일이 생략된 이 시에서 그는 눈물 속에 죽어간, 역사 속의 빨치산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객토”하듯 역사에 새로운 봄의 힘을 불어넣으려던 “형님”들은 “삽날도 부러질 땅”이 녹는 봄에 화자의 상상 속에서 다시 살아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시인은 “황토 한 삽 떠서 재 너머 다랑논에” 내려놓고 “옛집 잊어버리지 말고” 잘 찾아오라며 역사 속의 “형님”을 호명한다. 이 작품은 긴 겨울이 가고 봄을 맞이하며 객토를 하는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과 역사의 겨울을 뚫고 자기 몸을 던져 역사의 봄을 부르던 빨치산의 서사를 겹쳐놓는다. 시인은 이렇게 ‘지금, 이곳’의 크로노토프에서 ‘지금, 이곳’을 있게 한 역사의 거대한 좌표들을 소환해낸다.
세경할미 자청비가 밀어 올린 농지
인적 드문 담길 헤치고 들어와
삼십 리 땅속 바람 앞에
나는 섰다
흑-흑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온다
오소리 작전으로 몰살당한 스물아홉
어음리 사람들
뼈 오를 꽃
살 오를 꽃
허파 될 꽃
말 말할 꽃 모두 모아
때죽나무 회초리로 살짝 깨우련만
깨작깨작 나도 영혼 없이 슬픈 것이다
― 「빌레못굴 바람」 부분
“자청비”는 제주도의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농사의 여신이다. 시인의 각주에 따르면 빌레못굴은 천연기념물 342호의 용암동굴로서 11,749m의 세계 최장 동굴이다. 시인은 자청비 신화를 끌어들여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도의 풍경을 먼저 그린 후에, 이 “삼십 리 땅속”에서 벌어졌던 학살 사건을 불러온다. 《뉴제주일보》의 보도(2016년 4월 1일자)에 따르면 제주 4·3 항쟁의 유적지는 무려 596곳에 달한다. 빌레못굴도 이 중의 하나이다. 제주도가 섬이라는 점을 참작하면 사실상 제주도 전역이 4·3 항쟁의 배경인 셈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제주의 땅에 새겨진 뼈아픈 역사의 무늬를 읽어낸다. 앞에 인용한 시와 마찬가지로 학살과 공포를 잊어버린 ‘지금, 여기’의 크로노토프에서 시인은 왜 자꾸 폭력적 역사-서사를 끄집어내는 것일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시인의 서정이 역사적 혹은 정치적 상상력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볼 때 모든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다. 시 속의 “나”가 이 극악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영혼 없이 슬픈” 이유는 그 모든 개인이 역사의 통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역사적 맥락은 넓은 외곽에서 개인들의 삶을 조건 짓는다. 개인은 보편-역사와 특수-개체가 만나는 접점에서 탄생한다. 이렇게 주체를 개인/사회라는 양날의 교차로 읽어내는 시각이야말로 리얼리즘 미학의 전범(典範)이 아니고 무엇인가.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게고둥이 집을 끌고 가다
다른 게에게 내주면
생의 순례는 아름다운 것이라서
가끔은 다투기도 하였다
빈껍데기일망정
생을 부추길 수 있는 날
내가 살아
난처해하는 것은
너의 생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 「공생」 전문
난 항상 구름에 모가지 길게 빼고 서서
멀리 산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허리 구부리고 가까이 보아도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저 돼지들은 언제 조각조각 해체되는지
합격도장 받은 껍데기
반 근에 반 근도 얻을 수 있는지
입술의 재난에 우리는 덮어집니다
한때는 내 탓이오
딱따구리처럼 용서 살렸는데
뻐꾸기 울어 적시는 산(山)에
새 신탁이 내렸습니까
하나님 뜻이라니요
원망 돌리며 합리주의 팔아먹는 역사는
운명의 도살장으로 내모는 민주의의는
절망하게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아이티 선지자의 소명 언제였습니까
변신로봇 같은 망할 놈의 입술
언제 봉헌했습니까
발바닥에 붙어 하는 말
뒤통수에 붙어 하는 말
똥구멍에 끼어 하는 말
하나님 뜻이라니요
귀신 다 풀어
자잘한 나부랭이들은 걷어치우고
허방 모가지
오랏줄 걸 만한 놈 없습니까
악어 낚을 수 있겠느냐고요
우리는 용서하는 욥이 아닐는지요
허면 피의 밭에 뉘 주둥아리 묻어야겠습니까
― 「하나님 뜻이라니요」 전문
쌀 씻어 전기밥솥에 부어놓고
사흘 밤낮 지둘러도
밥 냄새는커녕
차라리 죽을래
입원한 어머니 기다리다
부아가 끓어 넘쳤다
귀퉁이 한쪽 날아간 사발
아랫목 처박힌 밥상 적막하다
― 「밥」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정홍순
충남 태안 남면에서 태어나 201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 『물소리를 밟다』 『갈대는 바다를 품고 산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 『향단이 생각』이 있다.
목차
제1부
공생•13/하나님 뜻이라니요•14/밤송이와 메뚜기•16/침향•18/낫치기•20/신록의 뼈•21/당신의 소지•22/석구가 그런다•24/정월 대보름날•26/손수건•28/도화돔•29/비둘기호•30/오존경보•32/가을을 배웅하며•34/어느 은행나무의 죽음•36/국화•38
제2부
밥•41/너울 동생•42/시집살이•44/마 선장•46/비상•48/길달리기새•49/몽돌에 새기다•50/계통문•52/떡살•54/동면하는 돌•56/길•57/방울 찬 감나무•58/개짐•60/어떤 약속•62/세레나데•64
제3부
계족산 바라밀다•67/객토•68/칠불사 아자방•70/각시녀•72/애기섬•74/짐대골에서•76/고택•77/녹턴•78/손모의 추억•80/금메•82/눈먼 새를 위한 아다지오•83/젖샘막걸리•84/천자암 쌍향수•86/배알도•88
제4부
미친 사랑•91/앞치마는 살아 있다•92/토성을 지나며•94/서산 어리굴젓•96/제주 삼나무•99/빌레못굴 바람•100/야오동 피는 섬달천•102/일주문에 서서•104/내가 다 시원하다•105/사비포교•106/남해기행•108/애기똥풀•110/자벌레•112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