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김만수 시인의 시선집 『나의 수많은 근처들』이 시인동네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꾸준하게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해 온 김만수의 이번 시선집은 그동안 출간했던 10권의 시집에서 골라 엮은 것이다. 민중의 애환과 약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김만수의 삶과 그의 시력(詩歷)을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김만수 시인은 등단한 지 36년 된 한국 시단의 중견 시인이다. 지금까지 첫 시집 『소리내기』를 비롯해 모두 10권의 시집을 냈다. 대략 3년 반에 한 권의 시집을 낸 것으로 보아 창작에 매우 열성적인 시인이라 짐작할 수 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결코 적지 않은 시집을 낸 것은 그의 문학정신의 충일성뿐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에도 치열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표시이다. 시집을 낼 때마다 매번 한국 시단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준이 떨어지는 시집을 자기 염결성 없이 마구 낸 것은 더욱 아니다. 나도 그간에 시인이 낸 10권의 시집을 시인의 호의로 다 읽은 바 있지만 아름답고 수준 높은 시집을 꾸준히 내온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성실성에 경의를 표한다. 소위 중앙문단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쉬지 않고 시업(詩業)의 밭을 일구어 가는 이런 자세야말로 지역 문학 발전의 중요한 주춧돌이며 중앙일변도의 문화 현실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문화분권의 중요한 전거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선집에서 보여주는 시의 형식적 특성은 대부분 시편이 20행을 넘지 않는 전통적인 단아함이다. 언어의 절제와 축약을 통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을 통제하면서 아름다운 서정성으로 독자들의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 요즘 우리 시단의 일부에서 보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함이나 참기 힘든 장광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런 시적 태도 역시 ‘시는 곧 도(道)와 같다’는 도학자들의 수행 정신과 같은 점도 김만수 시인이 교육자와 개신교회 장로 직분의 종교인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전체적으로 서정시가 이 시선집의 중심이다. 알다시피 서정시란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시적 대상물에 투사시켜 비유를 통한 형상화, 상징 등으로 독자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시적 방법이다.
이슬처럼 머물다
먼 강물 소리에 묻어가는
그대를 따라갑니다
사랑은
아슬한 굽이마다 내걸린
희미한 등롱이었지요
그대 사랑하는 저녁을
여기
마디마디 새겨 보냅니다
청댓잎 새순으로
다시 피어오르시어
푸른 마디마다 매단
눈물방울들
보십시오
― 「목간(木簡)」 전문
산역(山驛)
눈보라 속
자욱한 눈바람 밀며 오는
엔진 소리 들리면
오래 서 있던 숲정이 갈피마다
창을 내리고
등불 하나씩 내겁니다
누군가 전설이 새겨진
하얀 꽃잎을 건네며
사부자기
순은(純銀)의 단추를 여미는 밤
가지 끝마다
기차는 와 닿아
세상을 향해
환한
개찰구 엽니다
― 「목련 기차」 전문
인용한 시 「목간(木簡)」과 「목련 기차」는 두 편 다 투명하고 맑은 서정성으로 빛난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나무에 새긴 편지를 말한다. “사랑은/아슬한 굽이마다 내걸린/희미한 등롱이었지요”라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생의 아슬한 굽이에 걸려 외롭거나 슬플 때 사랑은 희미한 등롱처럼 빛나면서 그를 위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목간에다가 “그대 사랑하는 저녁을/여기/마디마디 새겨 보냅니다”라고 말할 때, 사랑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행복으로 이끄는 등(燈)이 된다. 그래서 사랑이여 청댓잎으로 다시 피어나 슬픔과 서러움의 눈물을 봐 달라는 기원의 시가 된다. 그 사랑의 기도를 목간에다 새기고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목간은 어찌 보면 먼 강물 소리에 묻어 따라가는 시적 화자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목련 기차」는 목련이 피는 장면을 기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유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산역은 상상만으로도 시적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와 풍요롭다.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와 순은의 등불을 다는 목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쩌면 우리 인생이 그런 것인지 모른다. 힘듦과 곤경의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와 마침내 목련꽃 같은 환한 꽃 하나 피우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지난한 진면목이자 목표인지도 모른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목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눈보라 속을 달리는 기차와 같은 우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 김용락(시인)
아무것도 아닌 것들
여기저기 내몰리며 바람구멍 숭숭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가을이 간다
여름 내내 취우(驟雨) 맞으며
아무것에 대해 떠올리다
응그린 얼굴로 주저앉은
바보여뀌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가득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편안해지는 즈음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조금씩 너그러워지거나
무관심해지고 있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들이
늦은 비에 젖고 있다
한때는 제법 아무것인 척했지만
그때마다 버려져 서성이는 저녁이
쇄골에 고여 드는 희한한 소문들이
반짝 보였을 뿐
그대로 편안하고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 있다
―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전문
이 층 교무실 창가에서 보았다
하늘이 자꾸 내려앉고
왜 저리 은사시 잎들이
소리 없이 지는지
시월 그믐날 이감(移監) 간다는 소식 전해준
네 어머니 편에
사식비 얼마 보낸다
송구골대 너머 먼 아치골
희끗희끗 파꽃이 지면
우리는 다시
겨울날 준비를 하며
눈물보다 단단한 칼날을 품는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서야 할 땅
너와 내가 발목 묶어
불알 덜렁이며 달린 운동장에는
먼 길
낮달이 혼자 간다
― 「편지」 전문
오광장 횡단보도 건너다
초록 불 휘발되어 가는 아스팔트 가생이 뛰어가다가
솜 타는 집 둘째 경호를 봤다
언제 날 잡아
밥 한 그릇 하잔다
이렇듯 반갑고 서러우면
한 공기 밥 마주 보며 먹자고 하는구나
밥 한 그릇 못 챙겨 먹던 그늘이
아직도 사람 사이에 흉터처럼 걸쳐 있구나
맞다, 따순 이밥 한 그릇의 감동
숱하게 곯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잊지 못할 인사가 되었구나
그래
마주 앉아 밥 한 그릇 비우는 일들로
이렇듯 해는 지고 다시 오는 것이구나
그러느라고 저리 머리 벗겨지고
끝없이 바쁘구나
― 「밥 한 그릇」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만수
1955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리내기』 『햇빛은 굴절되어도 따뜻하다』 『오래 휘어진 기억』 『종이눈썹』 『산내통신』 『메아리 학교』 『바닷가 부족들』 『풀의 사원』 『목련 기차』 『아픈 나무에서 아픈 나무들 본다』가 있으며, 장편서사시 「송정리의 봄」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포항문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해양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목차
제1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목간(木簡)•15/미소•16/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18/마지막 미션•20/월성(月城)•22/고라니•24/사소함에 대하여•25/왕의 길•26/4월 경주•28/국도(國道)•30/다시 크리스털•32/첫 그릇•34/망천리(望泉里)•35/덕조 아재•36/기린•38/시선•40/달개비꽃•42/무인(拇印)•43/주소•44/가을 시향채•46/목련 기차•48
제2부 다시 삼포(森浦)
산내통신•51/광장에서•52/편지•54/소포•56/소리내기 3•57/왕릉다방•58/에이란 쿠르디•60/마지막 풍경 1•62/다시 삼포(森浦)•63/후산압도•64/청령포 1•66/고등어•67/풍경•68/아무도 햇살 바다를 향해 문을 열지 않는다•70/여남 바다•72/봄 청계리•74/준서네 기차•75/노길이•76/그들•78/길•80
제3부 밥 한 그릇
동해국민학교•83/빼갈•84/술밥•85/용화사•86/빈집•87/운문재•88/서울역•90/잠자는 방 이슴•91/강가에서•92/오전리•94/여남 바다 1•96/사진•97/제노사이드•98/뻐꾸기•100/저장강박증후군•101/병동에서•102/하송리 거미•104/일월동•106/일원동 1•107/밥 한 그릇•108
제4부 나의 수많은 근처들
사과나무 모텔•111/소리내기 2•112/후에•113/체크무늬•114/추령(楸嶺)•116/목은(牧隱) 편지•117/논리적 밥상•118/대흥동•120/도살•121/섬•122/이불•124/오줌•126/시인 K•127/하모니카•128/사월(沙月)•130/순음청력실에서•132/목련꽃 목댕기•133/문•134/새벽 행음(行淫)•136/여수•138/근처•140
제5부 늦은 나무를 심었다
쉰•143/청송(靑松)•144/백화(白花)에게•145/얼음 소녀•146/욤 키푸르•148/솔의 눈•150/겨울 죽천리•152/문(門)•153/나무 전봇대•154/통일선봉대•156/불꽃•157/나무의 집•158/풀의 사원•160/깃발횟집•161/소리내기 4•162/심정(心淨) 도예•164/슈퍼문•166/그해 가을 1•167/정물 혹은 자화상•168/소리내기 7•170/몸에게 1•172
해설 김용락(시인)•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