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68년 《여원》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송영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 시인동네 시인선 220으로 출간되었다. 송영희는 외부의 풍경과 내면을 겹쳐놓음으로써 삶의 깊은 의미를 투시적 상상력으로 길어낸다. 바깥의 풍경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물 너머 세계에 대한 투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이 시집은, 만물이 하나임을 인식하며 이것과 저것을 가르고 ‘나’와 ‘너’를 나누는 모든 구분을 해체한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송영희 시집 『당신은 여전히 당신』 역시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현상에 골몰한다. 이는 시인이 오랫동안 천착한 테마이기도 하다. 백인덕 시인이 송영희 시인의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의 해설에서 “이 시집을 공감하는 자세로 읽는다는 것은 슬픔에 기초한 언어들의 음영(陰影)과 자취, 나아가 명멸(明滅)을 아파하는 것”이라고 할 때의 저 ‘명멸’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 『당신은 여전히 당신』에서 이러한 테마를 ‘정지와 예감’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는 현존하는 현실을 정지시키고, 그리고 그 현실이 앞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인정하며 구축하는 방식이다.
장작을 태우며 연기와 한 몸이 된다
나 참 오래 젖어 있었구나
몸도 마음도 푹 젖어 그것도 모르고 제단 앞에
슬프면 엎드렸구나
이 저녁
몸을 태우는 일이 가장 엄숙한 의식이라 한다면
불길을 바라보는 일도 한 생을 마주하는 일이라 한다면
바짝 잘 마른 장작도 못되면서
밤마다 고백이라니
나무의 심장이었는지, 노래였는지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지는
오늘 내가 태워버린 이 나무의 기록들은
어떤 형상으로 몸을 뉘어 갔을지
아니면 서쪽 바람을 따라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갔는지
연기의 감정만 자욱한
언제나 나는 나이기 위해서 울었었지
갓 자른 나무일수록 축축해
오늘 저녁도 나는 젖은 연기를 토해놓을 것이다
― 「고백의 위험」 전문
장작을 태우는 일이 몸을 태우는 일로 바뀌어 있다. 태우는 주체에서 타는 객체로의 전이(轉移)다. 불길과 마주해 있던 시인은 자신을 장작과 동일시하거나(“이 저녁 몸을 태우는 일이 가장 엄숙한 의식이라 한다면”), 자신을 객관화하며(“불길을 바라보는 일도 한 생을 마주하는 일이라 한다면”) 제단 앞에 엎드려 절대자에게 간구하듯 자신의 생을 ‘고백’한다. 장작은 ‘갓 자른 나무’의 축축함을 간직하고 있고, 그 축축함은 “바짝 잘 마른 장작도 못되면서” 생이라는 제단 앞에 자신을 불사르는 시인이라는 존재로 전화(轉化)한다.
‘갓 자른 나무’가 가지는 의미는 중층적이다. 잘 마르지 않아서 연기만 피우는 장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갓’은 “몸을 태우는 일”에 해당하는 “엄숙한 의식”이 진지함을 동반한 일상적 실천임을 강조한다. 또한 ‘갓 자른 나무’는 “나 참 오래 젖어 있었구나”라는 구절과 의미가 중첩됨으로써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갓 자른 나무의 “축축”함에서 환기되는 건 제단에 바치는 제물에서 흘러나오는 피다. 또한 ‘젖어 있는 나무’란 생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삶의 비의를 암시한다. 이처럼 불길에 타오르는 장작이 시인의 현존을 빗댄 사물이라고 할 때, 그 사물의 현존이 잡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연기’로 드러남은 의미심장하다. 연기는 “어떤 형상으로 몸을 뉘어 갔을지/아니면 서쪽 바람을 따라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갔는지”를 짐작할 수 없는 무형의 형체인 역설적 존재이자, 분명 존재하지만 사라지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송영희 시에서의 연기는 현존하는 존재의 현실을 정시시킨 모습, 장차 그 현실이 가뭇없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예감케 하는 ‘위험한’ 사물이다.
― 신상조(문학평론가)
이 길은 책을 닮았어요 몇 발자국 걷다 보면 한 페이지가 지나가요 보리수 열매를 찾으려니 휘리릭 다음 문장들이 펼쳐져요 어떤 풀숲에서는 후두둑 빗소리에 갇혀 있었지요 우두커니 한 글자만 바라볼 때도 있었고 그런 날은 어릴 적 슬픈 생각을 많이 한 날이기도 해요
오늘은 무슨 기념일인 거 같아 두근두근 흘러가는 천변에서 날짜를 헤아렸어요 누추한 날들이 너무 많아서일까요 수치스러운 문장들은 왜 하필 이 길에서 또렷해질까요 독해가 어려웠던 날들, 믿어지지 않았던 행간들, 그러나 끝내 설명하지 않는 부호들…… 울먹이며 읽고 울먹이며 묻기도 했던 그 마음이 있어서인가요? 살수록 물음표가 더 좋아졌지요 날마다 다른 뜻이 있는 거 같아서
이번 생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이려니…… 혼자 밑줄 그으며 걸어가는 석양빛, 그러나 늘 꿈꾸고 사랑했던 시간들 내가 이토록 애독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래요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걸을게요
― 「조금 더 천천히 걷기」 전문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물 흘릴 때마다 그 눈물을 보관하는 유리병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눈물 병을 몇 개씩은 지니고 살았다는데, 그 눈물 병은 주인이 죽었을 때 무덤 속에 같이 넣어 (천사가 눈물 병을 소중히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 바치기 때문) 명복을 빌었다는데, 생전에 시편 백오십 편을 지은 다윗 왕도 이 눈물 병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 지극한 눈물 못지않은 시인들의 시집이 원조 그 눈물 병은 아닌지, 시집들을 들여다보면 행간 사이사이 눈물 자국들 푸르게 아리게 스며 있는데, 오늘 한 젊은 시인이, 걸식을 하더라도 시만 쓰고 살면 좋겠다고, 눈물 글썽이며 벚나무 아래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 「눈물 병(甁)」 전문
창문 앞 동산이 꽃을 피우느라 눈을 감았다 떴다 어지러운가 보다
좋은 시 몇 편 옮겨오는 나도 어질어질
눈가가 침침하다
아침부터 시 읽기에 잠기고 꽃 번짐에 잠기다
저 봄볕에 화르르 발가벗고 싶은 충동
몇 년째 코로나19 마스크를 하고
내뱉은 숨을 내가 다시 먹고 살아도
봄은 여전히 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라고 읽는
이 기묘한 날들의 후렴구
― 「당신은 여전히 당신」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송영희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여원》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고』 『마당에서 울다』 『그대 요나에게』 『불꽃 속의 바늘』 『나무들의 방언』 등이 있다. 《시문학》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목차
제1부
조금 더 천천히 걷기•13/해바라기•14/고백의 위험•16/초록 스카프는 어디로 갔을까•18/저녁에 새들은 왔던 곳으로 날아간다•20/하얀 새•21/손수건•22/모르포나비•24/그래도 아직 누구의 등이 남아 있는지•26/화양연화•28/눈물 병(甁)•29/나의 호접몽•30/뿌리에게•32/오늘의 경전•34
제2부
당신은 여전히 당신•37/빨강은 병이 아니야•38/오후 세 시•40/머나먼 안부•42/어떤 한 시간이•44/나중이라는 말•46/스무 살•47/모란 경전•48/마찰•50/내 몸이 지나가네•52/잡힌 것들이 어떻게 잎이 되어 나오니?•54/이제 슬픔을 데리고 어디로 갈까요•56/달맞이꽃•58
제3부
냉이는 언제 캐는가•61/이십 분•62/춘자네 집•64/꽃, 그 이상의 열매•66/하양을 펼치다•68/피부의 미학•70/백색화엄•72/비의 잔•73/후회하지 않아•74/구어도(九漁圖)•76/해벽•78/걷는 사람들•80/후생•82
제4부
그땐 그때구요•85/알 수 없는 먼 곳에서•86/어느 십이월의 페이지•88/네 잎의 화답•90/집(集)이 되는 방식•92/통(通)•93/문섬•94/능소화•96/다시 돌아간다면•98/사이•99/가을과 겨울 사이 첫날•100/종일 폭설•102
해설 신상조(문학평론가)•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