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집 <5분의 추억>에는 지루한 일상에 아주 작은 틈새를 내는 웃음의 도끼가 숨겨져 있다. 그 웃음은 보일 듯 말 듯 배시시 웃는 것이지만 무겁고 답답한 현실 상황에다 기어이 구멍을 내고 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시는 일상의 소소함까지 묘사하고 진술하면서 슬픔과 비애를 거의 멜로드라마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은 슬픔과 절망을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신선한 유머를 시의 뇌관으로 장착시켜 그런 현실을 살짝 뒤집고 종래는 비판의 핵심에까지 밀어붙인다. 이는 현실을 넘어서는 시인의 삶에 대한 보다 크고 따뜻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 리뷰
〔해설〕
우수, 혹은 시간의 발견술
이광호
윤병무의 시적 화자는 어떤 창백한 우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수라는 말에 포함된 슬픔과 근심은 대개 특정한 경험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이것은 그가 지금 욕망의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열정을 식게 하고 추억의 이름으로 그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홀로 시간의 침식을 응시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흔적의 현재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윤병무의 화자는 이렇게 몰두와 초연의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는 그의 우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우수란 차라리 부재와 현존의 시간이 겹쳐진 곳에서 현존하는 부재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것, 그리하여 그곳에 “그 시간”이 있다고 처연하게 기억하는 자리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수는 기억의 현상학의 일부이다.
나는 몰랐다
그때의 기타 소리가 십일 년이 지나서
꽃 한 잎을 떨어뜨리며
현기증처럼 흔들리는 봄바람 같은
共鳴으로 다가올 줄이야
세상의 바깥엔 빛이 있었고
그 중심의 자리엔 갑작스런 정전 같은
귓전의 쇳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응시는 나를 뚫고
푸른곰팡이가 핀 벽지 위에
나의 안면을 판박이하였다
나는 판박이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었다
다 자라난 손톱 사이로 파고들어
때 낀 그날은 오래도록 빠지지 않았다
추억이란 마모되면
수만 년이 지난 어느 날의 또 다른 이름,
어느 어두운 방의 방사선이 들여다보는 찰나의 化石
그때에도 누군가 쓸쓸한 웃음을 지을까?
어쩌랴 그날은 지나갔다
이름을 갖지 못한 行星이 먼 훗날,
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지구가 궤도를 이탈해 그 時間의 이름을 찾아가든지
―「찰나의 化石」 전문
이 시의 첫 연은 “십일 년”을 건너온 “기타 소리”의 “공명(共鳴)”을 말한다. 화자가 “몰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공명이 시간을 넘어오는 과정의 의외성을 반영한다. 이 경우 기억이란 발견의 의미를 갖는다. 이 시에서 그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청각적인 요소들이다. 첫 연의 “기타 소리”는 두번째 연의 “쇳소리”와 “노래”로 전화되지만, 화자는 다시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기억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기억한다”와 “기억하지 못한다”의 의미론적 거리는 사실 그렇게 멀지 않다. 이미 “기억”에 관해 말하고 있는 이상, 기억에 대한 부정은 일종의 기억에 관한 재인식이다.
그런데 이 시는 중반 이후 의외의 시적 전개를 보여준다. ‘나’의 청각적 감각에 대한 시 앞부분의 묘사들은 갑자기 ‘나’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돌발적인 관점의 역전이 일어난다. 새로운 주체의 ‘나’에 대한 응시는 ‘나’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는 ‘나’의 ‘듣는다’와 “한 사람”의 ‘본다’ 사이에서 기억의 재인식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판박이”된 얼굴을 “손톱으로 긁”는 행위는 “한 사람의 응시”에 대한 ‘나’의 저항이며 수용이다. 혹은 타자에 의해 대상화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마지막 연은 그 시간의 우주적 차원에 대한 묘사이다. “수만 년”이라는 긴 시간의 단위와 “찰나”라는 시간 단위, 그리고 “이름을 갖지 못한 행성(行星)이 먼 훗날,/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의 아득한 미래 사이에서, “추억”은 단지 과거에 붙들려 있지 않고 우주적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지막 행의 “그 시간”은 일반적인 의미의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앞의 “추억”과 “그날”에 상응하는 어떤 본질적인 시간이다. 그렇다면
작가 소개
저자 : 윤병무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다. 1995년 가을『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5분의 추억』이 있다.
목차
▨ 시인의 말
序詩
流星 | 막차 뒤에 남은 사람 | 귀갓길 | 질주 | 그믐밤 | 한밤의 전화 | 5분의 추억 | 너무 이른 겨울 | 아침 | 순환선 지하철에서 | 출장 중 1 | 낮술 | 좌변기의 물을 내리면 |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 | 바보 같은 사랑의 밤 1 | 이번 정차할 곳은 | 처음과 사이 | 햐쿠타케 혜성에게 | 낙타의 잠 | 어떤 인연 1 | 風요일의 오후 | 섭씨 36.5도의 날 | 鳥葬
錄 | HOLIDAY | 바보 같은 사랑의 밤 3 | 밤에 듣는 소식 | 消燈한 여름밤 | 찰나의 化石 | 약속 | 건조주의보 | 바보 같은 사랑의 밤 5 | 마지막 첫눈 | 틈 | 음악 감상 | 어떤 인연 2 | 바보 같은 사랑의 밤 4 | 개미의 시 읽기 | 超新星 | 측면도
말년 | 봄 나들이 | 投石 | 서울로 돌아가는 길 | 출장 중 2 | '藝술架'에서 | 마지막 손님 | 잃어버린 명함 | K1 | 바보 같은 사랑의 밤 2 | 수화기를 내려놓고 | 하루의 타이머 | 추신
▨ 해설·우수, 혹은 시간의 발견술·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