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76권. 조용환의 세번째 시집. 간밤을 견뎌낸 어느 냉장고 속 이야기다. 싱싱하고 어둠을 먹고 자라난 '풀밭'의 세계에는 현대인의 고독함, 쓸쓸한 자리의 상처, 나에게로의 방황, 오래된 기억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자라나 있다. 이번 시집은 정처 없는 것들에 대한 편지와도 같다. 시인은 이야기가 끝난 뒤 다시 혼자서 웅-웅 울며 밤을 견뎌야 할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다.
출판사 리뷰
밀도 높고 장중한 시의 세계
기억의 거리에서 쓴 52편의 방랑의 편지
간밤을 견뎌낸 어느 냉장고 속 이야기다. 싱싱하고 어둠을 먹고 자라난 ‘풀밭’의 세계에는 현대인의 고독함, 쓸쓸한 자리의 상처, 나에게로의 방황, 오래된 기억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자라나 있다. 조용환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이렇듯 정처 없는 것들에 대한 편지와도 같다. 시인은 이야기가 끝난 뒤 다시 혼자서 웅-웅 울며 밤을 견뎌야 할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다. 농도 짙은 표현과 밀도 있는 시편들은 조용환 시인에 대해 충분히 신뢰를 가질만하다. 어떤 시편은 난해하고 어떤 시편은 마음 가까이에 다가온다. 이 다채로움은 인간의 단면과 닮았다. 결국 삶에 이 모든 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로 향하는데, 조용환 시인이 냉장고 속에 가득 보관해온 신선한 이야기가 여기 한 권으로 묶였다.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네
오른손으로 쓰고 왼손으로 받았네
뜯지도 않고 불살랐던
불 꺼진 창문, 떠나온 그 주소에는
이제 누가 살고 있을까,
뜨내기들은
헐렁한 외투와 낡은 구두뿐이지만
허허벌판을 첩첩 살아가네
내 왼손이 오른손을 잡아
피가 흐르네
나는 오래된 여행이라네
-「내가 나에게」전문
조용환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나는 오래된 여행”이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첫 번째 시가 시집의 중심 주제를 암시한다고 할 때, 바로 이 “나는 오래된 여행”이라는 명제는 이 시집의 나머지 시편들을 관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여행에 대한 기록, 또는 “오른손으로 쓰고 왼손으로 받”는,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보낸 편지들이 이 시집의 시편들이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거나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일 터, 그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 간격이 편지의 이동 경로일 것이다.
이 현실은 가짜야,
바깥의 구두가 유리벽을 쾅쾅 차버린다
고정돼 있던 홀로그램이
주파수를 찾아 혼비백산,
저 목소리는 매번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소음마저 끊긴다
아스팔트에서는 누구나
불법체류자들이다
-「황야의 공중전화」후반부
위의 시에서 관찰되고 있는 어떤 이야말로 현대인으로서 살고 있는 시인의 모습 아니겠는가. 황야 같은 거리의 아스팔트에 ‘홀로그램?불법체류자’로서 존재하는 시인. 그는 유리벽 속에 있지만 “이 현실은 가짜”라고 생각하며 “바깥의 구두가 유리벽을 쾅쾅 차버”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이 가짜 현실의 바깥을 감지하고, 혼비백산하여 주파수를 찾으며 “매번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내는 홀로그램이다. 물론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시인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조용환 시인은 여전히 유리벽 바깥의 세계에서 유리벽을 차고 있는 구둣발 소리를 감지하고 있다. 그는 그 세계의 자취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인다.
작가 소개
저자 : 조용환
1998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뿌리 깊은 몸』 『숲으로 돌아가는 마네킹』이 있다.E-mail: cc4446@hanmail.net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내가 나에게 13 / 냉장고 속의 풀밭 14 / 촤프린 씨는 여기 살지 않는다 16 / 거울 속의 거울 18 / 피아노학원 근처 21 / 황야의 공중전화 24 / 기차의 얼굴 26 / 망명신청 28 / 어떤 농담 30 / 그대를 위한 홀로그램 32 / 마이크로 34 / 마네킹 몽정 36 / 우두커니 38 / 비올레타 파라를 기념하다 41 / 넌 희한한 짐승이 됐구나 44 / 강허달림 46 / 남쪽에 대한 농담 48
제2부
바퀴오디세이 53 / 21그램의 행려 54 / 채플린 씨에게 보내는 편지 56 / 황금물고기 58 / 나의 잠파노를 위하여 60 / 나의 젤소미나를 위하여 62 / 벽 속의 빛 64 / 하얗다, 라고 문득 중얼거려지는 때가 있다 66 /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나는 단정해지지 68 / 립스틱이 묻은 유리의 빛 70 / 길모퉁이 카페 72 / 옹기를 깨다 74 / 얼룩을 기록하다 76 / 쭈그렁 달 78 / 어느 행선지 80 / 모퉁이는 반짝거린다 82
제3부
백결의 아내가 콩 타작을 하는 저녁 85 / 초록 강에서 86 / 빗새를 찾아서 88 / 먼 불빛 90 / 신성(神性)의 꿈 92 / 그 겨울의 윗목 93 / 율포 무박(無泊) 94 / 뽕짝메들리 96 / 세뱃돈 대신 노래를 98 / 충장로, 천사에게 100 / 뜨거운 혀 102 / 황홀 103 / 오래된 길 104 / 해당화 선생님 106 / 비무장지대 108 / 담배연기 스캔들 110 / 2014년 4월 16일 113 / 엔딩크레디트 116 / 가로등 아래 118
해설 기억의 거리에서 쓰는 방랑의 편지 119
이성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