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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내리지 마세요
무늬 | 부모님 |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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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정세용 시집. 정세용 시인에게 인간은,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누는 존재여야 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결단해야 할 갈림길에서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시인은 주장한다. 이 시집에는 많은 이들이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에서 고투를 벌이고 있다.

  출판사 리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진단하는 시편들

정세용 시인에게 인간은,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누는 존재여야 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결단해야 할 갈림길에서/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인간이어야 한다)고 시인은 주장한다. 이 시집에는 많은 이들이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에서 고투를 벌이고 있다.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살다가 “깨끗하게” 간(영철이) 후배, “어둔 데서는 정안자(正眼者)보다/ 더 잘 볼 수 있다”며 “한 손에는 아내 속옷 한 벌/ 한 손에는 하얀 지팡이”를 짚고 “또박또박 어둠을 가르며”(박희철) 걸어가는 맹인 안마사, 아빠 따라 절벽을 기어오르다 다쳐 등에 상처를 새긴 다섯 살 아이(필리핀), 방송계의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 PD(가을, 이한빛 PD에게)가 있다.
시인은 사랑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인간을 비인간의 처지로 전락시키려는 사회를 비판한다. “갑이 주저앉힌 을은/ 갑을 부정하고 뿌리를 뽑아야”(을) 한다고 외치고, 미투(MeToo) 운동처럼 성차별구조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에 “사상과 생명과 여성을 기억하는 다툼이/ 이제서야 문을 연다”(노출과 관음)며 동조의 지지를 보낸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피동의 시대”에 “실천해야 할 의무”가 “빚”으로 남아 있어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면 “결행할 수밖에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내 뜨거운 불꽃이/ 너에게 한 점 자유를 줄 수 있다면”(가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시편들

출근해서 직장 생활을 만들고
퇴근 후 술자리를 만들고
바람 같은 이야기 끝에
한숨을 다스려 위안을 만든다

철커덩, 새벽 두 시 철대문 여는 소리를 만들고
아내 눈가에 그늘을 만들고
창가에 스며드는 별빛을 만든다
(시 소망에서)

이 시에는 곱고 차분하고 쓸쓸한 노래가 들린다. 생의 관조와 더불어 은근한 소망 또한 배어난다. ‘철커덩’, 철대문 여는 소리가 직접적인 청각 효과를 만들어서 구체적 실감도 살아난다. 직장인으로만 머무르고 있는 비애가 느껴지고, 이와는 다르게 잊을 수 없는 얼굴로 기억되고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작은 희망, 소박한 꿈이 깃들어 있다.

직선은
바빠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속도를 제공한다
가끔
팔방향 교차로에서 길을 잃게 하지만
평면과 직선이 화음하는 드림 비트에
까닥까닥 헤드뱅잉 끼워놓고
와인 한 잔 바르면
발바닥에 고인 물도 굳은살이 된다

직선들이 무수한 진동으로
투명하던 빛을 햇빛으로 물들인다
샤프란 향 아득히 버무린 사각침대에
두 개의 선이 합쳐지며 각의 평온에 흡수된다

사각의 태양이 하루 일을 마치고
발갛게 익어내려 지평선에 잘리면
아홉 개의 동전으로 남은 달이
짜그락거리며 제 몫을 한다
(시 직선 그리고 달에서)

하지만, 시 직선 그리고 달은 자동차-퇴근길-음주, 나아가 과로-룸살롱-금융자본-윤락행위 등으로 의미가 번진다. 소망의 무대가 이제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져 가는 도시의 어느 달동네 골목길 외등 아래라면, 이 시 직선 그리고 달의 무대는 깊은 밤 서울 강남의 어느 대로변 같다.
그렇듯 소망은 직장인의 소박한 꿈이, 직선 그리고 달은 직장인의 가혹한 현실을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꿈을 노래하는 소망과, 현실의 단면을 그린 직선 그리고 달. 서로 다른 정서를 담고 있는 이 두 편의 시들 모두 정세용 시인의 것이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을 때 시인은 소망을 썼을 것이며, 냉정한 묵시가 요구되던 순간에 직선 그리고 달을 썼을 것이다. 가혹한 현실의 압박을 견디면서 시인은, 현실의 폭력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시’를 잃지 않을 힘을 길렀던 것이다.

물과 사랑의 시편들

그렇듯, 자신을 포함해서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가 더 이상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고, 죽은 노동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세용 시인의 오래된 꿈이자 눈앞의 현실이다. 시인 자신을 포함해서 ‘꿈꾸는 사람’은 이 시집 햇살을 내리지 마세요의 곳곳에서 ‘물방울’, ‘이슬’, ‘빗방울’ 등으로 표현된다.

먼저 살다간 어른이 단단하게
다녀놓은 길에 내리는
이슬비에 젖어보는 것
그 길을 걸어 수많은 발자국을 따라가다
하나의 발자국에 뿌리박고
이슬비에 온몸이 젖어가는 것
(반성을 생각하다에서)

시인에게 ‘물’은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며, 보존되고 이어가야 할 과거의 유산으로도 읽힌다. 시인은 비에 흠뻑 젖어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나를 내려놓는다. 마침내 ‘나’는 어디든 섞여 들어갈 수 있는 액체 상태가 된다. 시인은 ‘물’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한다. 물은 부드럽고 흐르며 온도에 적응하여 자신을 기체, 액체, 고체로 잘 변모시키고, 다른 개체에 잘 녹아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 인간들도 서로 섞이고 보듬으며 함께 흘러가는 삶 그리고 종착역에서 서로 잘 가라고, 잘 살았다고 미소 지으며 인사 나누는. 그렇게 물과 같이 되길 바라는 것. 정세용 시인은 이 땅의 모든 경계를 넘어 서로 스며드는, 너ㆍ나 없는 사랑의 시간, 물의 삶을 희원한다. 한마디로, 정세용은 한없는 사랑의 시인이다.

시인

한 사람 울타리 밖에서 불안하게 쳐다보다
문을 슬쩍 밀쳐본다 문이 닫힌다
빗장이 걸린다
사랑을 슬퍼하지 마라 먼저 떠난 애인이
유언을 남기었건만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조심스럽게 자물쇠가 어금니를 깨문다
가벼운 손짓과 간혹 흥겨운 어깨
바람이 분다

녹에 쩌든 갈지자의 구멍이
갈지자의 사연을 읽는다
하늘이 낳아놓은 모음과 자음이
어미와 자식으로 어울리면
냄새나고 배고픈 사람 하나 주섬주섬
나뭇가지에 흑탄을 먹여
고대인이 긁어낸 생채기
잔기침에 밑줄 치며 필사한다

햇살을 내리지 마세요

햇살을 내리지 마세요
사막을 짊어진 어깨에 햇살을 내리지 마세요
그대의 잔인한 미소가 어깨에 닿는 순간
삼천 년을 묵혀온 바위가 모래가 되더군요
그물처럼 감싸오는 맑은 향기에
프로메테우스의 무릎에
칼날 고드름이 열립니다

사랑을 주지 마세요
천 개의 얼굴을 하고
단 삼 초만, 그저 찰나에
머물다 가지 마세요
삼천 년을 지켜갈 나의 사랑이
그대 사랑 앞에서는
뒷그림자로 어른거리기만 하니까요

선사

어린 벗이 마른 젖 대신
시체 새끼손가락 두둑 꺾어
엄마가 입에 넣어주던
한 끼 식사가 생각난다 했었어요
마른하늘에
내가 탄 배가 뒤집어지고
집게발을 드세운 외계병정들이
하얗게 부풀어 오른
내 허벅지살을 뜯어먹는데
엄마 아빠는 무거운 등을 보여요
어깨 부러지는 뼈
두둑 끼워 맞추며
청록 땅 너머로 망각의 눈물을 감춥니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고
미국, 유럽도 아닌데
왜 나는 부풀어 갈라지는
살갗을 가져야 하나요
뻘물에 일렁이는 파도 너머로
아침 해가 떠요
발가스름한 석양도 보여요
엄마 여기가 어디에요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세용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남.등단하지 못하고 나이만 든 채,띄엄띄엄 살아온 세월을 보듬고,시구에 살을 붙이려 애쓰며 살고 있다.몸집이 불어야 비로소 뺄 수 있을 터.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새ㆍ새> 동인으로 있음.

  목차

여는 시 | 시인

1부 |
그대ㆍ거울ㆍ길ㆍ나비ㆍ동행ㆍ햇살을 내리지 마세요ㆍ첫눈 내리는 날ㆍ돌려줘ㆍ
종점ㆍ입술ㆍ로단테ㆍ반성을 생각하다ㆍ봄맞이ㆍ세월ㆍ주사

2부 |
살수의 노래ㆍ인간이어야 한다ㆍ선사ㆍ걱정 인형ㆍ망국ㆍ분노ㆍ을ㆍ노출과 관음ㆍ
이민자들ㆍ신문ㆍ단상ㆍ불을 끄다ㆍ새알이 딱딱한 이유ㆍ직선 그리고 달

3부 |
어느 여선생 이야기ㆍ연애편지ㆍ실업자ㆍ딸ㆍ여름과 겨울ㆍ무건리ㆍ앵무봉ㆍ
공릉천 갈대밭ㆍ성철이에게ㆍ영철이ㆍ회상기ㆍ이력서ㆍ주름살ㆍ아마추어ㆍ가을ㆍ
이한빛 PD에게

4부 |
빨간 장갑ㆍ노동의 새벽은 없다ㆍ박희철ㆍ밥그릇ㆍ배관ㆍ생산ㆍ소망ㆍ너의 장미ㆍ
친구야ㆍ김 목수ㆍ눈물세ㆍ만 원ㆍ필리핀ㆍ안개ㆍ모닝콜

맺는 시 | 혁명

발문 | ‘잃어버린 시’의 회귀 (소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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