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국내 최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한 책으로, 전통건축 전문가 홍병화가 집필했다. 이 책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불교건축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알기 쉽게 정리하고 사진자료와 삽화를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는 조선 후기 불교건축의 성격과 의미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지 10여년 만에 조선시대 불교건축사 전체를 다루는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에 참여하고,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건축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등 전통사찰과 관련된 다양한 조사에 참여하고, 전통건축 관련 현업에 종사해 온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불교건축사를,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억불숭유의 사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시대야말로 불교가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였고, 이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불교건축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출판사 리뷰
국내 최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한 책!
전통건축 전문가가 쓴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출간!
지금까지 불교건축사를 한 호흡으로 정리한 책이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다. 일부 유명한 사찰만을 한정하여 다루거나, 불교건축에 대해 개괄하거나,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시기의 불교건축에 대해 다루는 책은 몇 권 있지만,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처럼 한 시대의 불교건축사를 통으로 다룬 책은 처음이다.
우리나라의 건축사는 불교건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불교건축사가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건축사가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의 출간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저자는 조선 후기 불교건축의 성격과 의미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지 10여년 만에 조선시대 불교건축사 전체를 다루는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에 참여하고,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건축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등 전통사찰과 관련된 다양한 조사에 참여하고, 전통건축 관련 현업에 종사해 온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불교건축사를,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일반적으로 ‘억불숭유의 사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시대야말로 불교가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였고, 이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불교건축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진정한 종교로 거듭난 불교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조선시대’와 ‘불교건축’은 잘 연결되지 않는 주제처럼 보인다. 고려시대까지 국가의 지원을 받고 승승장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는 척결의 대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려 말,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대형 사찰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부를 축적하기 바빴던 불교와 그런 불교로부터 비롯되었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조선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이들에겐 시급한 목표였고, ‘억불’은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그래서 조선사회를 ‘억불숭유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불교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받았다는 것은 불교가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을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전 국가권력이 부여했던 사찰에 대한 특혜를 거둔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동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방적 지원과 비호 속에서 성장한 것을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고 본다면, 비로소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진정한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단순히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받았다고 이해하면, 그 시대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정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는 불교가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하향평준화가 되었다고도 하고, 철저하게 표리부동한 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등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살아남으면서 불교는 진정한 종교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기존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저자의 이런 평가가 불교건축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귀족 종교에서 백성과 함께 호흡하는 종교로 거듭난 불교
민중의 주체적 역량을 담고 있는 조선시대 불교건축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히 조선시대 불교 건물의 역사가 아니다. 저자는 조선시대 불교건축사는 이 땅에서 민중이라는 주체가 어떻게 역량을 키우고 결집해 왔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라고 본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는 그냥 건물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건축이 탄생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을 헤쳐 나온 주체들의 역량이 결집되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건축을 통해 불교가 500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다.
―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두 번의 큰 전쟁, 일상적인 비하와 배고픔에 직면하였던 불교가 때로는 스스로, 때로는 백성들과 함께 호흡해 가면서 복전(福田)으로서의 사찰, 즉 삶이 녹아 있는 불교건축을 남긴 것에 의의를 둔다. 상대적으로 서원 등과 같은 유교건축이 당시의 상류층의 문화를 보여준다면, 불교건축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민중들의 조직적 · 의식적 활동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사찰에 대중들이 모이고, 모이면 그 대중이 결국에는 각성을 하고, 그렇게 각성을 하고 나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게 되는 과정이 불교건축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시대의 모든 불교건축이 대중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모든 조선시대 불교건축이 민중들의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런 건축은 불교건축에서는 오히려 드문 편이죠. 사찰에서도 크고 좋은 건축은 당시 왕실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니, 조선시대에 있는 고려시대적인 건축인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경향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일 거예요. 즉, 세상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을 찾는다면 아마 상당수는 불교건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유교건축과 대비한다면 말이죠.
이런 게 바로 역사잖아요. 지나보니 결과적으로 민중들이 그런 건축을 원했던 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 같은 연구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 인터뷰 중에서
저자는 조선시대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의 시대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이 아마 불교건축이었을 거라고 본다. 불교가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이 불교건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읽고, 기존의 해석과 다르더라도 불교건축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낸다.
저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각되는 존재는 민중들이었고, 그런 주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불교건축이 요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불교건축은 번듯하고 화려한 외형보다는 부처님의 법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화려한 상류사회의 일부였던 불교건축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대중 속으로 들어가 백성과 함께 호흡하면서 불교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억불숭유의 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새로운 불교건축사다.
성리학 사회인 조선은 자신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리학만을 강조하며 형해화되어 갔다. 대신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지배를 당한 불교는 아직도 자신의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성리학은 이제 더 이상 종교가 아니고 단지 학문의 대상일 뿐이지만, 불교는 적어도 아직은 종교이다. 이 차이는 바로 지금까지 그 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사에서는 비교적 유사한 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는 일면 승리의 역사인 것이다.
―머리말 중에서
[저자 인터뷰]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 저자 홍병화 선생님 인터뷰
질문 1. 선생님의 경력을 보면, 전통사찰 발굴 조사 등에 많이 참여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 전통사찰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요, 이 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력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공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제 출입국 기록을 보면, 금강산을 들어갔던 횟수가 80회가 넘더라고요. 금강산은 북한이라 외국에 나가는 것처럼 출입국 기록을 남기거든요.
또 ‘전국 사지조사 사업’과 ‘전통사찰 전수조사 사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 조사입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라 단순히 개별유적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 시기별 · 지역별 양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연구자에게는 전통건축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요. 전국 단위 조사에 참여하면 보통 약 3~4년 정도씩 걸리는데요, 그동안 연구자로서 많은 공부가 됩니다.
이외에도 몇몇의 발굴조사와 사찰문화재일제조사도 참여했는데, 이러한 사업들은 인접 학문 분야와의 소통에 대한 기회가 마련되어 하나같이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질문 2. 다른 시대도 아닌 조선시대 불교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 우선 박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가진 시기가 바로 조선시대입니다. 그리고 서문에서도 밝혔듯, 조선시대야말로 불교가 권력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낸 첫 번째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남아 있는 사찰건축이 대부분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기도 하구요. 이렇듯 조선시대에 대한 관심이 여러모로 많았던 거지요.
질문 3.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 사회에서 불교건축이 갖는 의미는?
* 조선시대 불교건축이라고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권력의 관심에서 멀어진 건축이 바로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 더욱 애착이 가요. 귀족적인 고려시대 건축과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조선시대 불교건축은 정말 무지렁이 백성들의 이해와 요구에 능동적으로 순응해 간 건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조계종의 종지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잖아요. 하화중생의 건축이 바로 조선시대 불교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불교건축은 계획적인 활동의 산물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모든 조선시대 불교건축이 민중들의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런 건축은 불교건축에서는 오히려 드문 편이죠. 사찰에서도 크고 좋은 건축은 당시 왕실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니, 조선시대에 있는 고려시대적인 건축인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불교건축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경향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결과일 거예요. 즉, 세상의 중심이 상류층에서 중·하류층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반영된 건축을 찾는다면 아마 상당수는 불교건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유교건축과 대비한다면 말이죠.
이런 게 바로 역사잖아요. 지나보니 결과적으로 민중들이 그런 건축을 원했던 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 같은 연구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 4. 우리나라에서 불교건축사가 한 번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이유는?
*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불교건축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감소도 큰 이유일 것이고, 초기 한국 건축역사의 연구가 비교적 불교건축에 집중되어 지금은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 그리고 동시에 불교건축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면서 불교건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있을 겁니다.
즉, 민가와 같은 주거건축에 대한 연구의 증가, 근대건축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 등이 불교건축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좀 주관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불교 스스로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 불교의 모습과 오버랩해서 성찰해 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꼽아보자면 주인이 있는 건축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일 수 있어요.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조계종’이라는 주인(또는 맏형)이 불교에는 있는 셈이죠. 국가나 지자체를 상대로 전문적이며, 조직적인 대응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경계를 받게 된 것으로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궁능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궁능에 들이는 예산을 보면 참견하는 사람이 없는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불교문화재에게는 예산을 지원하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자꾸 만들어지니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겠지요.
질문 5. 자료가 별로 없는데,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 시간의 누적은 현재의 모습을 만들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최후의 모습이지요. 즉, 여러 레이어가 겹쳐져 있지만, 그 레이어를 차근차근 벗겨본다는 것은 여간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조선전기는 자료의 부족에 시달리고, 조선후기는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죠. 하지만 역사의 서술은 분량에 있어서도 균형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조선전기를 서술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전기는 다른 분야의 연구나 기록에 중심을 두었고요, 조선후기는 남아 있는 건축에 방점을 찍은 묘한 차이를 잘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6.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가 갖는 의의에 대해.
* 불교건축사에 대한 첫 개설서라는 의미겠지요. 최근 정병삼 선생님의 《한국불교사》를 읽고 있는데, 불교건축사도 언젠가는 그렇게 전 시대에 걸쳐 한 번에 쭉 써내려가는 글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불교건축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이 많이 나와서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리학은 신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전의 훈고학적 유학과는 달리 우주의 순리와 인간의 심성이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사유체계로서, 종교보다는 학문에 더 가깝다.
고려가 성리학을 수용하던 시기는 불교계에서도 화두를 잡고 참선하는 간화선이 유행하였는데, 사람의 마음을 공부의 대상으로 한다는 면에서 성리학과 간화선은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였는데, 불교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종교적 비판이라기보다는 불교계가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면서 저지른 적폐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츰 불교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져 불교계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와 외적에 맞서 백성의 신뢰를 얻은 신흥무인 세력은 조선의 개국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연합을 하였지만 성리학자인 신진사대부와 불교 신자인 무인 세력은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종교적 차이가 결과적으로 전혀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아니었던 것을 보면 결국 조선의 억불은 명분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같이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쓰는 등 불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는 성리학자도 있었지만, 당시 상당수의 성리학자는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으며, 그 폐해를 경계하는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억불숭유 정책이란 이전 왕조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친불교적인 정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건국 직후 불교를 탄압했다기보다는 불교를 우대했던 이전 왕조의 정책을 하나씩 철회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처럼 공공의 영역에서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하던 정책을 철회하는 것은 바로 불교의 생존환경을 악화시킨 것이며, 결과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편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이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는 것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예제에 따라 국가 체계가 확립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국과 동시에 습관처럼 지속되어 오던 불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나라가 치러야 하는 기본적 의례의 종류 및 그 절차를 정한 『국조오례의』가 편찬되면서 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불교에 영향 받은 여러 의례들을 유교식으로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로도 불교에 대한 왕실의 실질적인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유력 가문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경우 실록을 통해 그 기록이 전해져 불교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지만, 사대부들은 왕실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부족해 그 현황이 상세하지 않을 뿐이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사대부들도 문중 차원에서 특정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상의 제사는 물론 글 읽고 휴식하는 공간으로 사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조선 초는 물론 후기까지 끊임없이 발견된다.
왕조를 개창하고 안정되기까지의 과정은 변화가 불가피한 과도기이다. 특히 조선과 같이 명시적으로 불교에 대한 반대를 전면에 내세운 왕조에서 불교건축의 경우는 과도기를 넘어 위기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홍병화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 졸업. 연세대학교대학원 건축공학과 박사 졸업. 전국 전통사찰 전수조사 책임연구원 ·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건축전문위원 · 조계종 포교원 전문포교사 교수 역임. 한국의 사찰문화재 · 인각사, 태안사 등 조사 참여(2000~2003).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건축 및 조사 실무 담당(2004~2007). 한국의 사찰문화재 발굴조사 · 제주목관아지 발굴조사 등 참여(2008~2009). 전국 사지조사 참여(2010~2013). 현재 건축사협회 실무교육 강사, 서울시 은평구 한옥위원, 건축 관련 현업에 종사 중.
목차
추천사 / 윤대길(서울시 전통사찰위원) ― 4
머리말 ― 8
15세기 불교건축
- 명분으로서의 억불과 전통으로서의 불교
외유내불, 명분과 습관 ― 18
불교와 유교의 연합, 외유내불의 불씨 ― 20
효와 능침사 ― 24
15세기의 배치 계획 : 능침사의 부상
고려 말 남중국 간화선풍의 유행과 회암사 ― 28
조선 초 왕실원찰의 보편성 ― 35
태조의 흥천사 창건과 고려의 유습 ― 36
진관사의 수륙사 ― 38
조선 초 왕실원찰의 두 종류 ― 39
조선 초 왕실원찰의 대표성 ― 44
안마당에 면한 요사의 성격 ― 49
15세기의 구조적 건축형식 : 새로운 시대의 공포, 익공
건축형식을 구분하는 방법 ― 52
공포의 독자성과 가구법의 통일성 ― 56
공포의 다양함은 활발한 생명력이 원천 ― 62
16세기 불교건축
- 성리학의 완고함과 불교건축의 잠재력
사림의 등장과 기신재의 퇴조 ― 69
산릉제사의 두 가지 성격과 기신제의 정착 ―71
과거의 지위는 잃었지만 생활 속에서는 건재한 불교 ― 72
문정왕후와 보우, 그리고 불교 ― 74
수륙재의 성행과 불교에 대한 새로운 경험 ― 75
조선을 전후기로 구분하는 역사적 사건,
임진년 왜구들의 침략 ― 77
16세기의 배치 계획 :사라진 시기, 미지의 공간
청평사와 기신재 ― 78
사대부들의 원찰, 분암 ― 82
수륙재의 유행과 중심사역 ― 88
문루의 초기 형식 ― 90
16세기의 구조적 건축형식 : 부족함 속에 감춰 놓은 완성된 건축
익공과 다포의 각축, 주심포의 퇴장 ― 94
동아시아 건축에서 최고의 발명품, 익공 ― 102
공포형식과 가구법의 상관성 ― 104
17세기 불교건축
- 후원 세력의 교체와 사회의 보수화
새로운 전기를 맞은 불교계 ― 108
재조지은의 강조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 ― 110
17세기의 배치 계획 : 능침사의 복구와 수륙재의 대유행
재현되는 능침사의 건축 계획 ― 113
기록으로 본 17세기의 대형 사찰 ― 120
기록으로 본 17세기 산중소찰 ― 123
현존하는 17세기 산중소찰 ― 128
대형 불전의 유행 ― 131
천왕문의 성행 ― 133
명부전, 나한전의 유행 ― 139
정문의 일반화 ― 141
17세기의 구조적 형식 : 새로움의 수용과 전통의 고수
불교건축과 관영건축의 공포 차이 ― 146
18세기 불교건축
- 문중불교의 강화와 대중불교의 심화
각종 역의 전가와 원당의 유치 ― 153
백성의 경제적 성장과 후원자의 증가 ― 157
법통의식의 강화와 향촌사회의 하위 파트너 ― 158
동원되는 승려, 충신이 된 승려 ― 160
화엄 공부와 불교계의 결속 ― 163
18세기의 배치 계획 : 중창의 시대
임란 이후의 첫 중창 ― 167
문루의 대형화 ― 169
문루와 합쳐지는 정문 ― 173
요사의 대형화 ― 176
요사의 종류 ― 180
새로운 대중공간의 등장 ― 183
안마당에 면하는 또 다른 법당들 ― 186
18세기의 건축형식 : 화려함의 극치, 날개를 닮은 공포
익공의 전성시대 ― 187
19세기 불교건축
- 사회적 혼란과 불교의 선택
극심한 혼란과 불교의 신앙적 역할 ― 193
활발한 보사활동과 사찰계 ― 195
하삼도에서 서울·경기 지방으로 ― 199
19세기의 배치 계획 : 사람들이 모이면 힘이 쌓인다
불교건축의 빛나는 성과, 대형요사(대방) ― 201
산문체계의 위축과 신중도의 유행 ― 208
수행보다는 신앙의 가람 ― 211
대중의 새로운 선택과 불교건축 ― 217
19세기의 건축형식 : 마감과 시작
의장보다는 공간의 건축 ― 219
찾아보기 ―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