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손자 ‘서로’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 사흘 동안 농사일, 쉬기로 했다 / 산밭에 괭이질을 하다 / 지렁이 한 마리라도 찍으면 마음이 짠하니까 / 삼 주 동안 좋아하던 술도 끊기로 했다 /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 석 달 동안 채식을 하기로 했다 / 손자 서로가 살아갈 세상이 / 조금 더 맑아질 테니까”
이 이상 더 무슨 말로 오늘, 여기, 지금, 우리의 미래와 현실을 말한단 말인가.
김용택 시인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시를 쓰는 시인이리라.
눈이 잘 안 보이는 며느리를 얻으며 쓴 시 16편은 가슴에 저몄다. 최고의 산문시였다.
단숨에 다 읽고 곁에 두었다.
최성현 농부 작가
작은 산골 마을에서 마음에 절로 찾아드는 시를 붙잡은 나날의 기록마창공단 노동자에서 합천군 황매산 자락 조그만 시골 마을 농부로, 시를 찾아나선 삶에서 시가 찾아드는 삶으로 서정홍은 성큼 들어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의 시간은 늘 새롭다.
남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 자리한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산골 마을에서 땅에 발붙이고 농사짓는 나날은 마음에 쉴 새 없이 찾아드는 시를 가만히 글로 붙잡는 하루하루다.
손등이며 이마에 주름골이 패는 동안 그 주름 골골이 땀 흘리며 긴 세월 살아온 이웃들이 ‘땀쑥땀쑥’ 나눈 귀한 말들을, 이들과 함께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더없이 충만한 하루하루를 시로 쓴다. 첫 손주를 맞이한 기쁨으로 벅찬 나날 속에서 때로 농업의 오늘과 세상의 위기를 근심하는 순간들도, 혼인 37주년, 긴 시간 함께 걸어온 이제 ‘사람’으로 마주 선 아내 이야기도 빠짐없이 시 속에 담긴다.
그의 시를 통해 우리는 자연의 크나큰 은혜로움을, 농사짓는 하루하루의 기쁨을, 시골 마을 어르신들이 몸으로 다져 온 지혜를, 아직은 이어지고 있는 마을 공동체의 넉넉함을, 장애인을 새 식구로 맞이해 깨우치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바삐 걷느라 우리가 잊고 지내던, 혹은 미처 보지 못하던 많은 것들이 서정홍의 시들 사이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쉬운 말로 삶의 한복판을 드러내는 서정홍 시의 힘그가 대중을 향해 쓴 첫 글은 푸릇한 시절, 다니던 공장 화장실 벽에 써 내려간 낙서였다. 쇳일 하던 노동자들 반찬은 두세 가지 내면서, 책상머리 앉아 일하는 간부들 반찬은 여남은 가지, 다 먹기도 힘들 지경으로 내다니, 화가 났다.
“힘들게 일하고 이 밥 묵고 우찌 일하겠노.
편안하게 앉아서 일하는 사람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잘 묵어야 일을 하지.”
혹시 누군가 내가 쓴 글씨를 알아 볼까 겁이 나 왼손으로 쓴 짧은 글이었지만, 금세 메아리가 돌아왔다. “내가 딱 하고 싶었던 말이다.”“속이 다 시원하다.” “욕도 좀 써라.” “잡히 갈라 조심해라.” 같은 동료들의 ‘댓글’이 그의 낙서 아래로 주렁주렁 달렸다. 혼자가 아니구나, 용기가 솟았다. 모두가 출근길에 볼 수 있도록 공장 정문에 더 크게 썼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세상을 향해 가슴속 깊이 들어찬 슬픔과 분노, 외로움을 토해 낸 첫 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밥 때면 으레 두 줄로 나눠 서던 줄이 하나가 되었다. 한 공장, 한 식당에서 함께 밥 먹으며 일하던 이들의 밥상을 가르던 차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글의 ‘힘’을 그는 그렇게 깨달아 갔다.
이후로 그는 노동자 시인으로 살면서 “가방끈이 짧아가 내사 어려운 글 같은 거는 몬 읽는다 아이요.” 하던 동료들이 함께 읽고 웃고 울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힘썼다. 조그만 산골 마을로 들어가 농사지으며 사는 지금은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마을 할머니들이 듣고 이해 못 할 시는 쓰지 않는다.
삶터가 바뀌면서 사는 모양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그는 언제나, 발 딛고 선 곳에 깊이 뿌리내린 시들을 써 왔다. 내가 아니면, 서정홍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 흉내 내지 않고, 포장하지 않는 시. 누구나 아는 낱말들로 평범한 이들의 조촐한 일상을,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크고 작은 즐거움을, 속속들이 따뜻하게 시 속에 담아 낸다. 그의 시는 그 힘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가만히 뒤흔든다.
산골 마을에서 이웃과 함께, 농사지으며 자연과 함께《그대로 둔다》 속에서는 서서히 비어 가는 조그만 산골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오롯이 들린다. 서정홍 시인은 20년 가까이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동안 그 속에서 마주한 자연과 삶의 이치, ‘가슴에 찾아온 시’를 담담히 적었다. “살아 있는 사람 수보다 / 뒷산에 무덤 수가 더 많은 /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꿰뚫고 있는 삶의 지혜, 몸에 배인 자연의 순리라는 것은 얼마나 서로를 환하게 감싸 안는가.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이웃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옮긴 시는 그이들의 삶이 곧 시이고 노래라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시골에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도 웃음이 나고, 서로를 북돋아 기운을 내고, 도리를 지키려 애쓴다. “서산에 쥐꼬리만큼 남은 저녁노을이” 환한 배려를 남기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를 보살핀다. 예순이 넘어서도 시인은 그런 와중에 아주 가끔씩, 작은 새순이 돋듯 새로운 삶이 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예순 즈음에 길어 올린 깨달음을 덤덤히 담아낸 시집〈예순〉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할 나이 /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할 나이 / 뱉은 말만큼 들어야 할 나이 /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할 나이
고요한 숲으로 돌아와 / 미움도 원망도 욕심까지도 / 하나둘 그냥 내려놓고 /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할 나이
나를 찾아 위로할 나이
58년 개띠, 이제 환갑을 넘긴 시인은 《그대로 둔다》에서 지나온 삶을 찬찬히 돌아보고, 남은 삶을 어슴푸레 헤아린다. 나이 듦을 제 나이에 걸맞게 받아들이는 이가 드문 때에, 시인은 고요히 앉아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또렷한 눈으로 바라본다.
〈더없는 시간〉
책을 읽다가 자주 덮는다 / 무얼 깨달았나 싶어서
길을 걷다가 자주 뒤돌아본다 / 걸어온 길이 그리워서
잠을 자다가 자주 깬다 / 살날이 얼마나 남았나 싶어서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에” 앉아 “봄비 맞으며 연둣빛 새순이 자라고 / 여름 가뭄이 지나가고/ 가뭄에도 들꽃이 피고 지고 / 가을이 훌쩍 지나”간 뒤 이만하게 맞이한 겨울을 감사히 헤아리듯, 돌아본 삶은 못내 ‘더없는 시간’이었다. 농부 시인이 이순 즈음에 길어 올린 시들은 햇살 좋은 가을, 잘 여문 곡식처럼 실팍하고 단단하다.
오늘도 서정홍은 “어제와 같은 길이지만 / 어제와 다르고 // 어제와 다른 길이지만 / 어제와 같은 길을” 걸어간다. “시시하거나 / 특별하거나 / 아무렇지도 않게.”
붙잡고 욕심 내기보다, 어느새 내려놓고 비우는 시간 속으로 들어선 시인의 덤덤한 시들이 또 새로운 길을 낸다.
눈이 불편한 며느리를 맞이하며 쓴 시 16편이 주는 감동
어느 날, 아들이 며느리 될 사람을 데리고 왔다. 시인과 시인의 아내 눈에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며느리 될 사람이 앞을 거의 못 보는 사람이라는 것만 보였다. 식구들의 삶은 요동쳤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시인은 순순히 고백했다.
4부의 시 16편은 마치 한 편의 연작시처럼 눈이 불편한 며느리를 맞이하며 출렁이는 마음의 풍경과 첫 손주를 본 뒤 열린 새로운 세상을 숨김없이 펼쳐 보인다. 남다른 새식구를 맞으며 식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하는 것도, 장애인이 살아가는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동안 자신이 눈 뜬 장님으로 살았다는 것도, 낱낱이 시로 드러냈다. 흔들리고, 받아들이고, 채우고, 또 다시 함께 나아가는 과정을 놀랄 만큼 숨김없이 솔직하게 썼다.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볼 때, 비껴서지 않고 부딪칠 때, 배제하지 않고 함께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서정홍은 이 시들을 통해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말한다. 장애인과 서류상으로만 가족이 아니라 진짜 식구가 되어 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지만, 그래서 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
서로는 세 살입니다
아빠랑 공원에 놀러 가면 / 아빠 손을 놓고 마음대로 뛰어놉니다
엄마랑 공원에 놀러 가면 /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습니다
서로도 압니다 / 엄마가 눈이 불편하다는 것을
이제 서정홍 시인은 “아침마다 스마트폰을 켜면 짜잔!하고” 나타나는 손주 사진을 보는 즐거움이 어디에 비길 데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건네는 말’, 시집 ‘발문’을 대신하는 새로운 실험서정홍 시인은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이 글을 써야 한다고, 그래야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더욱 존중받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란 누구나 읽고,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대로 둔다》 뒤쪽에 ‘발문’ 대신 실린 ‘건네는 말’은 그런 믿음으로 시를 쓰는 이의 책을 〈상추쌈 시집〉 첫 권으로 내게 된 출판사의 응답이다. 시집에 붙인 이 산문은 시를 해설하거나, 가치를 가늠하거나, 시인의 뜻을 헤아리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무명씨’에 가까울 이가 첫 독자로서, 시를 읽고 자신이 시 읽은 이야기를 그저 적었다.
글을 쓴 옥수수(김주혜)는 이 시집을 읽고 ‘건네는 말’을 쓰고 있을 때 ‘자가 격리’ 중이었다. 지난 여름 섬진강 물이 넘쳐 구례 읍내가 온통 물바다가 되고 난 얼마 후, 젊은 옥수수가 이웃 할머니를 모시고 갔던 병원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있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그는 2주 동안 꼼짝없이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자가 격리 생활의 어려움을 아랑곳하기보다, 물에 잠긴 읍내 이웃들에게 일손을 보태지 못하는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 그나마 집 안에 있는 동안 이 시집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가만히 집 안에 앉아 시집을 읽은 이야기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옥수수의 ‘건네는 말’이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에게 서정홍의 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이 시집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더 깊이 만나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한다.
땅에 뿌리내린 삶을 노래하는 시들을 한자리에 모아 꾸리는〈상추쌈 시집〉상추쌈 출판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있다. 출판사를 꾸려 가는 두 사람이 2008년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농사를 짓고, 책을 낸다. 시골에서 살면서 좋은 것 하나는 마을 어른들 말씀을 자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늘 지나듯 하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귀하다.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툭 던지는 말씀에 빛나는 삶의 지혜가 있고 늘 유머와 환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와 같은 말씀이다 싶은 것들. 논밭에서 일하고, 마을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자연을 받아들이고 하는 모습들도 다르지 않다. 이런 것들에 닿아 있는 시집을 내자, 그런 생각으로 시집을 기획했다. 서정홍 시인의 시집은 〈상추쌈 시집〉의 첫 권으로 더없이 맞춤한 것이었다.
두 번째 권으로는 20대 여성 농부, 서와의 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청년이자 여성 농민으로서 20대 초반을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지나온 삶이 오롯이 담긴 그의 시들은 조붓한 어린잎을 끝내 밀어올린 봄싹처럼 당차고 풋풋하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도시의 또래들과 꼭 함께 읽고 싶은 시들이다.
세 번째 권은 나고 자란 도쿄를 떠나 비어 가는 야쿠 섬으로 삶터를 옮겨 섬사람으로 평생을 살다 간 야마오 산세이 선생의 시선집이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어제를 향해 걷다》, 《더 바랄 게 없는 삶》, 《여기에 사는 즐거움》 같은 산문집으로 크게 사랑받았지만, 그가 남긴 빼어난 시들이 시집으로 묶여 소개된 적은 없다.
이후로도 〈상추쌈 시집〉 시리즈는 몸으로 또 마음으로 땅과 맞닿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시들을 골라 한 권씩 더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