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걷는사람 시인선의 44권. 손진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손진은 시인은 그간 축어적 표현으로 사물 혹은 시인의 본질을 열어 놓는 존재론적 세계를 거쳐,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에 집중하고 깊은 사유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시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세계를 더욱 확장시켜 인간, 자연,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여 이룬 하나의 신화적 세계다.
출판사 리뷰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놀랍고도 극적인 징후로 읽어 내는 시선
- 인간, 자연, 사물의 관계를 잇는 현대의 신화적 세계
손진은 시인의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가 걷는사람 시인선의 44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손진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며 지난 『고요 이야기』(문학의전당, 2011) 이후 십 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시집이다. 손진은 시인은 그간 축어적 표현으로 사물 혹은 시인의 본질을 열어 놓는 존재론적 세계를 거쳐,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에 집중하고 깊은 사유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시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세계를 더욱 확장시켜 인간, 자연, 사물을 하나로 연결하여 이룬 하나의 신화적 세계다.
“그의 시선이 닿으면 보잘것없는 것들은 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한다. 그의 상상력은 별 볼 일 없는 사물이나 흔해 빠진 장면을 마법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놀라운 광경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김기택 시인)
수년째 성업 중인 식당에서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매일같이 삶의 비참을 견뎌 내며 “허기를 충전”(「허기 충전」)하는 기층민의 비애를 노래하고, 추석날 아침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소년이 한순간 트럭에 치이는 불행에 직면하여서는 “옥색의 공기”들이 “가슴에서 둥근 손”을 꺼내어 “어린 영혼”을 받는다고 표현하며 찰나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 줌으로써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현실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쩔쩔 매는 인간(「물의 설법」)을 다룰 때나 “몸의 왕국 점령하고” 쇠락해 간 병(「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을 다룰 때도 인간과 자연, 사물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고향 신작로에서 닭을 물어 죽인 누렁이에게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고 중년 사내가 핀잔을 주는 상황을 보면서, “가책받은 얼굴로 고개 숙이던 착한 개의 표정”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듯 마음”이 저리고,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엇일까?”(「개의 표정」)라고 자문하기에 이른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익살스럽기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손진은 시인은 개의 표정에서 원초적 순수함을 읽어 낸다. 그로 인해 냉랭한 현대 사회를 살아온 자신의 시간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상황들이 내부의 맑은 정서로 치환되어 나오는 시적 진술은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을 계속 시도한다. 흔한 풍경에 새로운 의미를 절묘하게 겹쳐 놓는 능청스러움으로 한순간 독자의 마음을 훔쳐 버리는(「소매치기」) 그의 시작은 “공기인 듯/물줄기인 듯”(「시」) 자연스럽다. 연 이파리 위에서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응시하면서 “바다의 중심으로 뛰어”(「물방울 속으로」)들어 순환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포착하는가 하면, 「저 꿀벌의 생」이라는 작품에서는 시골 우체부의 삶을 꿀벌의 생애에 비유(“빨간 모자 눌러쓴 저 꿀벌이 이쁜 눈매를 꽁지에다 매달고/골목으로 날아간다”)하며 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시인의 이런 태도는 “백지의 첩첩계곡” 속에서도 “팔랑체로 넘실거리는 글줄”(「만년필」)을 피워 올려 사물의 본질을 견지하는 것이 시인의 업(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그만의 깊은 사유와 특유의 상상력으로 발견한 모든 사소한 순간들이 의미를 가지고 광채를 발휘한다.
이런 시인의 신화적 사고는 해설을 쓴 이숭원 평론가가 언급하는 것처럼 “외부의 사물은 인간과 무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며 결국 그것이 “인간인 나와 관계를 맺는 유정한 존재가 되어 내 생활 영역에 들어와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내 의식에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그려 낸 인간 삶의 비극적인 단면, 자연의 이치와 아름다움, 사물의 본질 등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무참한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구원하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이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경외(敬畏)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근신(謹愼)의 마음이라는 것. 시집을 펼친 독자들은 시인이 직조해 낸 다채로운 신화적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 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은 빛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허기 충전」 전문
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개의 표정」 전문
일기예보가 어긋났나,
피서 온 가족은 숫제 물의 지배 아래 들었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제 성질 못 이긴 창이 덜컹거린다
쿵쿵 우둥퉁 쳐들어오는 물기둥은
햇살에 수런대는 나뭇잎의 기척이며
지저귀는 새소릴 작살내고
배음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아예 감옥으로 처넣는다
손을 넣어 만질 수도
벌컥 삼킬 수도 없는
저 돌멩이가 다 된 물은 무엇 때문에
혁명처럼,
쿠데타처럼 깡패처럼
세상을 온통 찢을 듯한 훈계로
도회의 더위와 피로 피해 찾아든 식솔들에게
막무가내 가르치려 드는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도도 떠는 몰골로 들으라고만 하는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습한 이불 끌어 덮어도
꿈속 몸을 불리는 불길한 새끼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밤
딱딱한 공기를 더 딱딱하게
음울한 것을 더 음울하게
우리 간까지 슬슬 보는 손아귀에 가슴을 잡힌
세찬 급류의 며칠
돌로 핀 험상궂은 물의 말씀, 그와 맞닥뜨리기 전엔
생이 그리 놀라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알지 못했다
─「물의 설법」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손진은
경북 안강에서 태어나 경북대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1995년 매일신문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고요 이야기』, 시론서 『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한국 현대시의 정신과 무늬』『현대시의 지평과 맥락』『시창작의 이론과 실제』(공저) 등이 있다. 시와경계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목차
1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허기 충전
격자의 창틀 아래서
깎인 것에 대하여
점박이꽃
개의 표정
자운영 꽃밭
딱따구리 소리는 날 멈춰 세우고
물의 설법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추석날 아침
빗방울에 대하여
덜어 낸다는 말
2부 물들고 터지고 빛나는
소매치기
만년필
적멸을 위하여
못,에 대하여
우루무치의 낙타
예감
시간 도둑
왕의 말씀
네 채의 집
말라 가는 벤자민 화분 곁에서
나무들의 묵시록
벚이라고 하고 벗이라고도 하는
사월의 혼례
3부 투명한 심장들이 안쓰러워
꽃 피는 소리
물방울 속으로
시
나와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느티나무 화초장
어떤 산수화
이슬
빠지는 발톱의 말
저 꿀벌의 생
살쾡이와 다람쥐
외로운 개화
우연이라는 말
거미집
4부 내 몸에도 흐르는 살별들
오늘 내게 제일 힘든 일은
우화등선
수박
거룩한 허기
물벽
거미
숲의 제왕
정낭 개구리한테 불알 물린 이야기
경계
메추라기
팔공산 사내 이야기
단풍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해설
공감 왕국의 대령숙수
-이숭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