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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 백정기
백 남 이 다큐시집
각 | 부모님 | 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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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백범 김구,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약산 김원봉…. 우리 항일독립운동의 청사에 길이 남을 이름들. 결코 잊어서도 안 되지만 잊을 수도 없는 이름들일 것이다.
최근 영화 암살, 밀정 등을 통해, 항일투쟁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하지만 여전히 역사의 뒤안에서 잊혀져 가는 뭇 열사, 의사 의열투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처럼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역시 마찬가지다. 그만큼 구파 백정기 의사는 우리에게 낯선 존재일 정도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학교에서 먼저 배웠던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의거로서 역사적 의의가 큰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윤봉길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그날의 거사는 윤봉길만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파 역시 홍구공원의 천장절 행사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으나, 공원을 출입할 수 있는 입장권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구파는 그 시각에 홍구공원에 당도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만약 이날 구파 역시 입장권을 제때에 전달 받을 수만 있었다면, 홍구공원의 폭탄 의거는 더욱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바늘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날 홍구공원의 거사를 준비한 세력은 바로 백범 김구의 ‘임정’과 이회영 백정기 등이 결성한 ‘남화한청연’이 그것이다. 두 세력 다 홍구공원의 천장절 행사를 노리고 있었으나, 남화한청연의 거사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고, 그 결과 김구와 윤봉길은 역사에 남는 사건을 성공시켰으나, 무위로 끝난 남화한청연과 백정기의 거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구파는 이 거사를 포함해 의열투쟁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또한 아나키스트로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나, 그가 성공시킨 의거는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역사에도 남지 못했던 것이다. 무정부주의항일투쟁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 활동, 중국인 일본인 무정주의자들과 연대한 항일구국연맹 활동, 그 산하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주도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였지만, 결국은 일제가 깔아놓은 밀정의 마수에 걸려들고 만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진주 일본군사령부와 유길명(有吉明;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가 중국정부 요인의 매수공작을 위해 중국 요리점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베푸는 기회에 기습공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이 거사를 위해 선발된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은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유자명의 인도를 받아 상해 프랑스 조계로 들어가 거사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육삼정 연회는 실은 일제가 밀정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해 벌인 함정이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구파 백정기 의사는 1935년 5월 22일 나가사키 감옥에서 안타깝게도 옥사하고 만다. 최근 ‘밀정’이라는 TV프로그램이 일부 알려진 항일운동의 흑역사인 밀정을 2차례에 걸쳐 방영하면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의 거사는 바로 이 밀정이 일제와 결탁해 벌인 계획된 함정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봉환되어 독립운동가 3의사로 효창공원에 묻혀 있다. 백범 기구의 지시에 의한 일이었다. 반년 전 귀국해 그가 급하게 서두른 대사 중의 하나 의열투사들의 유해봉환이었다. 직접 부산까지 내려가서 3의사의 유골을 봉안하여 서울로 오는 기차에서 김구는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보낸 것이 바로 나다. 조국을 위하여 신명을 바치고 지하에 잠드신 선열이 어찌 3의사 뿐이랴만, 대담무쌍 왜국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을 던져 조선 민족의 분열의 독립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아마 이 세분이 으뜸이리라”고 말했다. 실제로 구파는 김구의 지시로 거사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구파의 거사를 직간접적으로 도왔고 구파의 의기를 높이 샀기에 유해봉환과정에서 구파를 함께 모신 것이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3의사로 효창공원에 묻힌 구파 백정기. 평생을 아나키스트로서 항일 의열항쟁의 선봉에서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런 구파이지만, 그의 일대기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그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나마 산재해 있어 이를 제대로 엮어 그의 일대기를 복원한 책이나 자료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장대한 항일투쟁의 인생사도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비운의 항일운동가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백남이는 구파와는 한 집안사람이다. 백 시인에게 구파는 5촌 당숙이 되니 매우 가까운 후손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시를 쓰면서 세상을 주유하다 현재는 제주도에 살고 있다. 백 시인의 말대로 지난한 표류를 잠식시켜 준 제주에 안착한 채 글을 쓰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늘 마음의 빚이면서 해묵은 과제가 있었으니, 바로 구파를 올곧게 드러낼 글을 묶는 일이었다. 그녀는 국토의 남단 제주섬에서 100년 전의 시간을 넘나들면서 오래전부터 수집해 온 자료 더미들과 함께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세웠을 것이다.

이 시집은 그러한 백시인의 마음의 빚, 즉 후손의 의무, 잊혀지고 묻혀진 의결투사를 발굴하는 사명감, 그리고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면서 죽음의 공포도 끌어안고 죽음의 불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던 한 사내의 옹골찬 삶을 제대로 그려내는 일이리라 백시인의 문학혼은 이러한 마음의 빚의 불쏘시개가 되어 이제 구파 백정기라는 이름으로. 백시인은 “감히 이 치졸한 헌사를 백정기 열사님의 영전에 바친다.”는 아주 겸양의 언사로 내어놓지만, 이 시집은 백 시인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은 백시인의 표현처럼 “도서관 한쪽에 오랫동안 앉아 계신 당숙 어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심정”에 값하는 오랜 수고로움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백남이 다큐시집이라는 별칭을 달고 있는 이 시집은 한 많은 일제강점기 불의에 굴하지 않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순수성과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삶을 불살랐던 구파의 삶을 그나마 온전히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주 제한적인 자료들과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구파 시대의 어르신들마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구파의 생애를 올곧게 복원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백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리라.

역사교과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수많은 실패한 거사와 강점의 시대가 길어질수록 깊어지는 밀정의 늪에서 오직 조국해방의 꿈을 쫓으며 풍찬노숙했던 망국의 의열청년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이 시집은 모든 이름이 드러나지 못한 수십 수백의 또 다른 구파들에게 바치는 시집이기도 하다.

구파를 알고 있는 독자들에겐 구파의 삶을 온전히 그려낸 시를 읽는 재미를, 구파를 몰랐던 독자들에겐 아나키스트로서 항일항쟁의 선봉에서 살았던 또 다른 독립투사를 만난다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독자 제현의 일독을 권한다.

『구파 백정기』의 출판에 맞추어
의열 투쟁의 뜻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 준 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


19세기 말 이후 우리는 일제 침략에 따른 국권 상실, 분단과 동족 상잔, 독재 등의 여러 굴곡을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수립했고 세계가 놀랄 정도의 산업화를 이루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분단 체제의 질곡을 이겨내 평화 공존과 민족 통합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독립 운동의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 운동가 한 분 한 분이 우리에게는 모두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더 각별히 기억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백정기 의사도 그런 분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번에 제주도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백남이 시인이 오촌 당숙이기도 한 백정기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구파 백정기』를 낸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나는 1970년대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에 대해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박목월의 <나그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등을 외우는 게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서 처음 신동엽의 <금강>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백남이 시인의 『구파 백정기』는 거의 반세기 전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아울러 백정기 의사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의열 투쟁에 나섰던 여러 선열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안중근, 김상옥, 이봉창, 윤봉길 같은 독립 운동가의 이름에는 늘 의사(義士)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사전에는 의사가 ‘의협심이 있고 절의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벌인 의사의 뜻은 거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 의열 투쟁이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독립 운동가를 우리는 특별히 의사라고 부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 1면에는 ‘칠가살(七加殺)’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독립을 위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부류의 사람을 정리한 것입니다. 일곱 부류에는 적괴(敵魁) 곧 적의 우두머리, 매국적, 창귀(倀鬼) 곧 고등 경찰이나 밀정, 친일 부호, 총독부 관리, 불량배, 모반자가 망라되었습니다. 이 범주에 속한 사람이면 모두 죽여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의열 투쟁입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의열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였습니다. 그러나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는 쓰인 적이 없습니다. 당대에 널리 쓰인 용어는 1920년대 초에 고안된 ‘작탄 투쟁’이나 ‘암살 파괴 운동’이었습니다.
1969년에 구성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독립운동사』의 제7권으로 『의열투쟁사』를 펴내면서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출현했습니다. ‘의열’이란 뜻을 이루기 위해 생사를 가리지 않는 정신이 낳은 행동의 장렬함과 그 행동에 깃든 의로움의 가치를 함께 존숭하여 기리는 뜻이 담긴 용어입니다.
3·1운동 직후에 작탄 투쟁의 선도대가 되기를 자임하며 탄생한 한 단체가 쓴 ‘의열단’이라는 이름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함”이라는 ‘공약’의 문구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명법이야말로 의열 투쟁의 본래 의미를 정확히 통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 의열투쟁의 양상과 그 역사적 의의를 간명하게 예고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의열 투쟁이 의혈 투쟁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의열 투쟁에 격렬한 ‘피의 항쟁’과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투쟁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부착되어 온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이미지는 의열 투쟁을 테러리즘으로 오판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의열 투쟁에 대해 일제는 언제나 폭력성을 부각시키고는 했습니다. 암살 파괴 운동에 수반되는 폭력 수단과 그것이 가져올 인명 살상, 시설물 파괴의 결과만을 부각시켜, 처음부터 부정적 현상으로 낙인찍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의열 투쟁이 모두 ‘과격’이나 ‘흉포’로만 보였겠지만 독립운동 진영에서 운용된 의열 투쟁 방략은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성취라는 분명한 지향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의열단의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의의 실현, 더 구체적으로는 역사 정의 및 국제공법상의 정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암살 파괴 운동을 수행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나타난 의열 투쟁의 적합성과 독창성이 인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 운동가들은 집중력 높은 일회 거사로 군사 작전 이상의 효과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폭력성의 강도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폭력성이라는 측면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듯 ‘흉포 행위’로 매도하고 ‘테러리즘’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의열 투쟁과 테러는 형태상으로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성격과 목표에서는 크게 다릅니다. 테러가 권력 유지나 탈취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자행하는 무차별적 폭력 행위를 가리킨다면, 의열 투쟁은 인류 보편의 양심과 정의감이라는 윤리적 가치에 입각해 구체적 표적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제한적 폭력 행위였습니다. 이런 차이를 외면하고 의열 투쟁과 테러를 무조건 동일시하는 것은 제국주의·식민주의·침략주의·인종차별주의와 같은 더 큰 폭력과 원천적 불의를 정당화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실은 그런 불의를 응징해 역사 정의를 복원하기 위한 싸움으로 의열 투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요컨대 의열 투쟁은 형태상으로는 테러리즘의 일종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테러리즘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열 투쟁의 성패를 하나하나 따진다면 성공보다 실패로 끝난 경우가 더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최종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성공한 거사였지만 파괴력이 미약했거나 그 효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실패한 거사였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심리적 효과는 매우 컸습니다. 자기희생을 감수한 의열 투쟁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의 반일 정서를 고양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항일 의지를 고취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도 그만큼 가혹했습니다.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 운동가들은 성패 여부와 관계없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보기로 안중근, 이재명, 박상진, 강우규,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송학선, 나석주,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남자현 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부는 체포되기 전에 미리 목숨을 끊었고 일부는 체포된 뒤 사형 선고를 받거나 무기징역 등의 장기형에 처해진 뒤 옥중 순국했습니다. 우리가 의사라고 부르는 독립 운동가들 가운데 살아서 해방의 날을 맞은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열 투쟁은 안중근 의거에 대한 쑨원(孫文) 등의 극찬이나 윤봉길 의거에 대한 장제스(蔣介石)의 극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른 나라의 정치 지도자나 민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어려움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국국민당 정부가 지원하게 된 계기가 윤봉길 의거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으로써 역사 정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열정을 보여준 의열 투쟁의 발자취는 제국주의 지배로 인한 민족사의 크나큰 굴절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났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백남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제주도에 살고 있다.첫 시집 『사랑은 없다, 기다리기로 하자』에서 바로, 지금이 사랑할 때임을 깨닫기까지, 제주는 지난한 표류를 잠식시켜주었고 19년 만에 시집을 엮게 해준 어머니의 품이다.제주 입도 7년 차 육지것으로 살면서 세상없이 아름다운 제주가 난개발로 훼손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자연 환경 그대로의 보존이 현세의 독립운동임을 인식한다.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민족문학연구회 회원이며(사)평화의길 제주지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email: coise-63@hanmail.net

  목차

1부 유랑의 끝 그리고 시작

국민장·15
3의사 장례식·16
3의사와 김구·18
한 송이 꽃을 기다리며·21
옥중편지·22
휴암 백인걸과 고경명·24
운명의 회오리·27
문무文武·29
종손·31
갈선마을·33
영주정사·35
망국제·38
일경을 두드겨 패다·41
창흥의숙昌興儀塾·43
심문자료·45
극비·47
육혈포와 박승규·50
관동대지진·53
유랑의 끝 그리고 시작·55
비학재 부부 이별·58
서울 다옥정 54번지·61

2부 북경으로 망명

북경의 봄 ·67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70
모아호동 사건 ·72
다물단·74
정의공보 正義公報·76
북경을 떠나다·78

3부 상해 풍경

철공장·81
상해 5·30운동·83
김창수 암살 미수·89
도보 1,200㎞ 광주에서 상해로·91
시야를 만나다·95
명분·97
스승 우당 이회영과 동거생활 1926. 5.~11.·100
상해전차공사·104
아이스크림 가게의 점원들·105
김두봉네 아이들 ·108
탈환奪還 ·110
와병·113
입원과 소녀·116
회관의 북만행·120

4부 꿈을 아서 1930~1931

신현상·129
북경에 모인 사람들1·131
북경에 모인 사람들2·134
정실은호·136
해림1·141
해림2·145
해림3·148
고령자 진송소학교·151
희곡·154
시야와 영원한 이별·160
꿈은 사라지고·163
적·167

5부 마지막 결전장 상해 1931~1932

다시 상해로·175
남화한인청년연맹·178
항일구국연맹·183
상해사변·187
홍구공원 윤봉길과 백정기·190
장개석 암살 제의·198
당고협정·201
우당 이회영의 순국·204
가문 속의 밀정·208
응징·212

6부 마지막 불꽃

흑색공포단 BTP(Black Terrorist Party)·219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224
유길명 공사 암살계획·226
저승에서 만나세!·229
불꽃, 마지막 의거 6·3정 사건·231
죄명 「검거의 건」·235
추억단상·239
최후의 대화·240
옥사·242
흑색신문·244
<우관문존>에서·246
심용철의 구파 회상기·249
독립운동가의 아내여, 어머니!·251
유품의 유품·254
한 장의 편지·256
무명회·260
밀정·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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