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매문의 및 도서상담은 031-944-3966(매장)으로 문의해주세요.
매장전집은 전화 혹은 매장방문만 구입 가능합니다.
지은이 : 박태원
작품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문장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정신을 보여 준 작가다. 서울 출생으로 1930년 신생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했으나 도중에 중퇴했다. 그 일본 유학 시절 현대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나, 이후 단편 <적멸(寂滅)>(1930), <수염>(1930), <꿈>(1930)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면서부터 예술파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정립하기 시작했다.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하였고, 북한 쪽 종군기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1960년에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에 착수한다.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실명과 전신불수가 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갑오농민전쟁≫ 1, 2부를 출간했고, 1986년 7월 10일 사망 이후에 박태원의 구술을 정리한 ≪갑오농민전쟁≫ 3부가 출간되었다.
지은이 : 심훈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리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어렸을 때 ‘삼준(三俊)’, ‘삼보(三保)’로도 불렸으며, 필명으로 ‘금강샘’, ‘백랑생(白浪生)’, ‘해풍(海風)’ 등을 썼고, 1926년 이후부터 아호로 ‘훈(熏)’을 썼다.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2년 뒤인 1917년 3월에는 왕족의 누이동생 이해영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일본인 수학 선생에게 항의하며, 그 항의의 표시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수학 과목이 낙제되어 유급을 당한다.1919년 3월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심훈은 남대문 앞에서 가담하며, 3월 5일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7월 형 집행을 마치고 풀려나지만 퇴학을 당한다. 심훈은 당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1920년 심훈은 흑석동 본가와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독서에 매진하며,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1921년 그는 중국 항저우의 즈장대학(之江大學) 문학원에 입학해 극문학 관련 공부를 하다가 1923년 국내에 들어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등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송영, 이적효, 이호, 박세영, 김홍파 등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문화 단체인 ‘염군사’ 멤버로 동참하며, 1925년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도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무산 계급의 해방 문학보다는 전방위적인 해방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926년 2월 심훈은 동아일보 학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후 ‘철필구락부’에 가입하며, ‘철필구락부 사건(급료 인상 투쟁 사건)’으로 해직된다. 그해 11월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부터 “심훈(沈熏)”이란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1927년 2월에는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일(渡日)하며 일본의 닛카스(日活) 회사에 입사하지만 얼마 있지 않고 5월 귀국해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한다. 그러나 일본 황태자를 전하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 되어 퇴사를 당한다. 그리고 7월에는 나운규를 감독으로 <탈춤>을 영화화하며, 10월에는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원제 <어둠에서 어둠까지>)를 완성해 상영하기도 한다.1928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신문 기자직을 이어 가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생계를 외상으로 허덕인다. 이 해 11월 ≪새벗≫에 소년 영화 소설 <기남(奇男)의 모험(冒險)>을 게재한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오월비상(五月飛霜)>을 게재하며, <원단잡음(元旦雜吟)>, <거리의 봄>, <어린이날>, <야구(野球)> 등의 시도 여러 편 게재한다. 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나 10월 29일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정옥(安貞玉)과 약혼하며, 12월 24일에는 결혼을 한다.1931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에 <불사조>를 연재하나 12월에 또다시 검열로 중단된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양친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살게 되며, 그해 4월 아들 ‘재건’이 태어난다. 이해 9월 경성세광사에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이 미뤄진다.1933년 7월 심훈은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영원한 미소≫를 연재하며, 8월에는 기자 생활을 못 잊어 서울로 상경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당진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는 1934년 3월 이혼한 부인 이(李)씨를 모델로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여기서 생긴 원고료로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그 집에서 ≪상록수≫를 완성한다.1935년 2월 심훈의 장편소설 ≪영원한 미소≫가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며, 8월에는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공모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심훈은 그때 받은 상금 500원 중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며, 이 후원으로 상록학원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연재하기 시작한다.1936년 8월 10일 심훈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접하고는 신문 호외의 뒷면에 시 <절필-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를 써서 ≪중앙≫ 문예지 편집실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상록수≫ 출판 문제를 의논하고 ≪심훈 시가집≫ 교정을 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17일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949년 7월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그의 시가집이 중형(仲兄) 심설송(沈雪松)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으로 발간된다.
지은이 : 염상섭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1920년 2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진학문(秦學文)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1920년 7월 동인지 『폐허』를 창간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1922년 최남선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의 기자로 활약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삼대』는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가족 간에 벌어지는 세대갈등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임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1945년 8.15광복 후 귀국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으로 활동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한때 해군 정훈국에 근무1954년 한국전쟁 중의 서울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장편 『취우』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원 창설과 함께 종신회원으로 추대1955년 서라벌예대 초대학장 역임1956년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1957년 예술원공로상 수상1962년 삼일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수상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
지은이 : 이광수
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가장 중요한 작가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그는 『무정』, 『재생』, 『흙』, 『유정』,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본격 장편소설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소설의 ‘제1형식’을 창출하였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조선문단』, 『동광』 등의 한글 잡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필 활동을 펼침으로써 현대 ‘한국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나아가 그는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단종애사』, 『이순신』, 『세조대왕』, 『원효대사』, 『사랑의 동명왕』 등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는 시대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화함으로써 민족적 위기의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기억을 소설의 장에 옮겨 민족적 ‘자아’를 보존하고자 했다.요컨대,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성립을 증명한 『무정』의 작가요, 도산 안창호의 유정 세계의 꿈을 이어받은 사상가요,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한 민족운동가요, 민족적 ‘저항’과 ‘대일협력’의 간극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처절한 생애를 살아간, 험난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지은이 : 이인직
호는 국초(菊初). 1862년 경기도 음죽군 거문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1930년 미야코 신문 견습생으로 근무하며 일본어 소설 '과부의 꿈'을 발표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성 소속 한국어 통역으로 발탁되어 종군했다.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발간을 주도하고, 만세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1906년 만세보에 '혈의 누', '귀의 성'을 연재했다. 이듬해 재정난에 빠진 만세보를 인수하여 대한신문으로 개제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8년 원각사에서 '은세계'를 창극 형식을 공연하였으며, <귀의 성>을 중앙서관에서, <치악산>을 유일서관에서 발간하였다.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이완용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을 내왕하였다. 1911년 경학원의 사성(司成)으로 임명되고 경학원잡지의 편찬과 발행을 맡았다. 1913년 '혈의 누'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을 매일신보에 연재하다 중단했다. 1916년 55세에 생을 마쳐, 천리교 예식으로 화장되었다.
지은이 : 채만식
소설가·극작가·친일반민족행위자.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출생하여 임피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을 중퇴했다.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개벽사 등의 기자로 재직했으며, 1936년 이후로는 창작에 전념했다. 1945년 낙향하여 1950년 이리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24년 단편「새길로」(『조선문단』)로 등단 후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단편 소설과 희곡·평론·수필 등을 썼다.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탁류濁流」(1937)·「천하태평춘」(1938)· 「금(金)의 정열」(1939) 등과 단편「레디메이드 인생」(1934)·「치숙」(1938)·「패배자의 무덤」(1939)·「맹순사」(1946)·「미스터 방(方)」(1946) 등이 대표작이다. 1942년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 영령 방문 행사와 1943∼1944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관하는 예술 부문 관계자 연성회, 보도특별정신대 등 친일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지은이 : 황순원
황순원(黃順元, 1915~2000)은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먼저 시인으로 등단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7년경으로 1940년 첫 단편집 『늪』을 출간했다. 그 후 『목넘이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학』(1956), 『잃어버린 사람들』(1958), 『너와 나만의 시간』(1964), 『탈』(1976) 등의 단편집과 『별과 같이 살다』(1950), 『카인의 후예』(1954), 『인간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4), 『움직이는 성』(1973), 『신들의 주사위』(1982)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인의 전통적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특히 한 편의 시 같은 단편 「소나기」는 그 서정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만들어졌다.
지은이 :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1920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1923년 동덕여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하였다. 1931년 단편 소설 「파금」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에 장편 소설 『어머니와 딸』도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인간 문제』, 「지하촌」, 「원고료 이백 원」, 「소금」, 「어둠」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지은이 : 이기영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천안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몰락해 가는 빈궁한 가정환경,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한 침울한 아동기를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탐독하며 보냈다. 1906년 아버지 이민창과 안기선 등이 세운 천안 사립영진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08년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기영의 작품 속에서 조혼의 폐습을 비판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내용이 빈번한 이유가 되었다.소학교 졸업 후에 한동안 방랑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1918년 귀향하여 논산 영화여학교에 근무했다. 3·1운동을 계기로 현대 문학예술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고학하였고, 유학생 모임에서 포석 조명희를 만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1924년 ≪개벽≫ 현상 모집에 단편 <옵바의 비밀편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 기자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최서해, 이상화, 송영, 한설야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을 창건했다. 그 무렵 신여성 홍을순과 새 가정을 꾸렸으며, 이후 계속 함께했다.본격적인 문학 활동과 카프 가맹이 거의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이기영의 작품은 창작 방법과 세계관에 있어서 계급주의를 표방하였다. <농부 정도룡>, <조희 ?는 사람들>, <홍수> 등의 단편소설과 이후 발표되는 중·장편 소설들을 통해 관념 편향적인 계급주의 지도 이론을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기영은 명실공히 카프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이기영은 카프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내던 중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때 구상한 중편소설 <서화>(1933)로 호평을 받았으며, ≪고향≫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고향≫은 충남 천안의 원터마을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라 붕괴되고 재편되는 농촌의 모습을 고도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내 한국 근대소설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1934년 카프 제2차 검거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소시민 지식인의 과대망상증을 통해 당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는 장편 풍자소설 ≪인간수업≫을 발표했고, 10월에는 ≪고향≫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국인식간담회에 참석하거나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창씨개명과 일어 집필, 강연 요구를 거부하다가 1944년, 강원도 내금강으로 소개(疏開)하여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해방을 맞이해 상경한 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을 주도했으며, 1946년 2월에 월북했다. 노년기까지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장편소설 ≪땅≫(1948∼1949), ≪두만강≫(1954∼1961) 등을 집필했다. 1984년에 사망하여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삼대
천변풍경
태평천하
상록수
무정
고향
카인의 후예
인간 문제
민촌
혈의 누
메밀꽃 필 무렵
탁류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인터넷서점 (www.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