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갈된 감정과 기억을 살려내는 바람 같은 시. 유희주 시인의 시집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가 푸른사상 시선 226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시적 여정은 몸의 체험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를 거쳐 사회와 문명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온다. 태양이 저무는 서쪽에서 불어온 화을바람 같은 시들의 호흡과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삶의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출판사 리뷰
시인 노트나의 시는 몸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추의 진자 운동처럼 한쪽으로 밀려난 삶은,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문학을 향한 정신적 지평을 넓혀주었다. 서정적인 언어를 찾아 이미지 함축에 집중하여 독자에게 다가서는 방법보다는 몸이 경험한 이야기를 시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이런 접근은 시가 내 안에 갇히거나 서정성이 상실될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하지만 이미 몸에 밴 이 길을 지속하여 걷기로 한다.
적막함과 고요함 사이에서도 자라나기를 포기하지 않는 식물처럼 늘 햇빛이 드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내면의 움직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더 이상 말랑한 시어에 감동이 되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다 말라버린 단어를 살도 붙이지 않고 쓰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지만, 누가 아무 맛도 안 나는 시를 읽겠는가. 절필을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마음을 촉촉하게 해주는 단어와 냉담하고 뻣뻣하게 사실을 직시하는 단어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경계인이 된 나는 적막하게 마른 뼈에 잘 빨아 말린 옷을 입혀 밖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이 시집은 4부로 나누어 내면의 변화를 느리고 직설적인 어투로 말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4편의 시가 분화되어 51편의 시로 구체화한 듯하다. 현재 내 안에 흐르고 있는 열정과 냉정함을 섞어놓은 보라색 라벤더 향이 있는 시편들을 1부에 앉히고, 그 뒤로 현재가 있기까지 지나왔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근원적 이유에서부터 사회적 이유로 나아가며 배치했다.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서 시가 담겨 있는 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면 시를 좀 더 밀도 있게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몸, 관계, 기억, 사회를 통과한 시선은 다시 창작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추의 진자 운동처럼 한쪽 끝까지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힘, 그 반복 속에서 감각을 정제시키고 언어를 세공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표현 방법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가장 작은 감각에서 출발한 사유는 점차 외연을 넓혀 별과 빛, 그리고 근원에 관한 질문으로 나아가며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문장을 곳곳에 접목했다. 시집의 제목인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마른 우물은 고갈된 기억과 감정, 혹은 비어 있는 내면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의 공간이기도 하다. 몸에 남은 감각, 관계가 지나간 자리,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리고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까지 멈추지 않는 흐름을 기록한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끝과 소멸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움직임이며, 사라진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로를 암시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바람은 비어 있는 곳에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흔들고 움직이게 하여 허무한 들판 위에서 생을 활기차게 끌고 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
눈물 구덩이에 먼지가 날립니다
나의 애인은 찢어진 비닐봉지처럼 날아다니다
늑골 어디쯤 걸려 낡아가고 있습니다
하얀 뼛조각에 새겨진 어린 속살의 목소리
절박하고 애절하게 경계를 넘어 도망치던
푸른 머리카락들의 기억과
싱싱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물길을 따라 흐르던 청량함
남은 기억의 힘으로 현재의 소멸을 견디는 중입니다
바위 뒤에 숨어 지극한 표정으로 피어나는 꽃을 발견하면
바람에 펄렁이는 얼굴 따위는 잊어버립시다
살아간다는 건 꾸덕꾸덕 굳은살을 심장까지 채워야 하는 일
깊은숨을 몰아 짖어대는 개처럼 한번 컹 짖어버리고
금계화를 경건하게 내려다봅니다
남은 생은 귀를 베는 문장을 찾습니다
간혹 화을바람이 불 때
별을 향해 전화를 걸면 긴 치마를 입고 있던 내가
뱃속에서 맑은 종소리를 울리며 걸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완성으로 가는 그림
캔버스에 일곱 겹의 유화 물감을 발랐다
화분 속에 갇힌 달이 난초의 뿌리를 밝히는 초현실주의
일곱 겹을 칠하는 동안 형체를 지우고 의미도 지웠다
침묵만 보랏빛으로 남았다
캔버스 위에 햇빛이 드리워지니
밑으로 가라앉았던 색들이 불려 나온다
예상치 못한 풍경이 겹겹이 층을 만들며 펼쳐진다
살아온 날 위로 다른 색을 덮어씌울 수 있다면
울음을 담아놓은 봉지 같아 자주 새거나 구겨졌던 날들은
잘 빨아 말린 흰 운동화를 신고
손에 들린 붉은 금붕어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언덕을 오르는 아이가 될 수도 있다
결핍은 늪지대와 같아 몸통을 먹어버리지만
빛의 프리즘이 넓어지듯
내면의 층층에 쌓인 기억을 딛고
그림은 완성에 이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유희주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학과 미술을 정규로 배울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글과 그림을 놓지 않았다. 60세가 되던 2024년, 매사추세츠대학교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에서 비주얼 아트를 전공하며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2000년 『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 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소란이 환하다』,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이 있다. 비영리 단체를 설립해 한국도서관, 한국학교, 한국문학 번역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시인과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제1부
구멍 /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 / 초록을 잡고 / 눈을 씻는다 / 기억의 풍장 / 꿈꾸는 의자 / 얌전한 우리들의 서사 / 어디에서 위로의 울림을 찾을까 / 어쩌면 귀도 필요 없을지 몰라 / 완성으로 가는 그림 / 넓적한 시간에 앉아 / 죽는 연습 / 별이 담긴 격자무늬 시간
제2부
청록색 깃발 / 나가는 문 / 어머니 수발 / 굽은 허리, 복사꽃 / 사라진 집의 힘 / 충분히 남아 있는 서랍 속의 씨앗들 / 추억을 다듬다 / 어여쁘신 손님 / 우리들의 전성시대 / 콰빈 저수지에서 / 무궁한 힘 / 보라를 좀 나누어 주련
제3부
종아리 / 평범의 경지 / 박주가리 / 기차는 달린다 / 지루한 사회적 동물에게 / 물속의 시계 / 머리카락의 목소리 / 바람 주머니 / 보자기 / 개 / 흩어진 사람들 / 가시 / 관계의 해석 / 광화문
제4부
생명 연습 / 1분의 희망 / 받침 ㅆ의 희망 / 리셋, 신비한 비밀을 위해 / 산양의 걸음 / 나비가 될 수도 있잖아요 / 저 멀리 혼자 있던 아웃라이어 / 딸깍, 라이터를 켜는 / 식탁에 앉은 시리와 / 나혜석, 이제는 알 수 없는 소식들 / 여자들의 사회학 / 주파수 91.5
시인 노트 사라지는 연습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