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정훈 문학평론가가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사이펀)을 펴냈다. 정훈 평론가는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동아대, 동의대, 부산대, 한국해양대 등에서 문학과 교양을 강의해왔다. 이번 평론집은 2020년경부터 각종 매체에 발표해온 문화이슈와 비평, 시집해설 등이다.
모두 6부로 구성된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은 1부는 글쓰기와 문학의 상관관계를 숙고한 글로 자신의 글에 대한 반성과 문학과 삶이 지평의 풍경을 담는다. 2부는 역사적 관점에서 통일문학은 유효한지를 되묻는 한편 해방기부터의 경남과 부산의 시의 제반 모습들과 항쟁 기록들의 문학적 사유 등 자신이 살아가는 부산과 지역문학의 방향과 모색을 점검한다.
3부는 우리 시대의 논고적 대상이 되는 강상기, 김지하(작고), 송유미(작고), 조용미, 허만하, 김정수, 나금숙 등 현장문학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4부 또한 김명관, 김순아, 김형칠, 김흥규, 손택수, 이도미, 이린, 이우돈, 정미숙, 정영임, 최로잘리 시인 등의 작품세계를 두드리며 현재의 한국시단을 점검한다. 5부는 시인들의 시 해설에 집중 나서 권상진, 김종태, 문지아, 배동욱, 신정민, 양재건, 이문영, 이소암, 이종섶, 최보기, 최영철, 한경훈의 시들을 훑어보고 있다. 그리고 6부에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추억을 지닌 작고한 이상개, 박태문, 고현철, 신영길 시인 등을 작품을 통해 저자의 인연에 남은 그리움들을 추억한다.
출판사 리뷰
최근 왕성한 비평활동을 하고 있는 정훈 문학평론가가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사이펀)을 펴냈다. 정훈 평론가는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동아대, 동의대, 부산대, 한국해양대 등에서 문학과 교양을 강의해왔다. 이번 평론집은 2020년경부터 각종 매체에 발표해온 문화이슈와 비평, 시집해설 등이다. 모두 6부로 구성된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은 1부는 글쓰기와 문학의 상관관계를 숙고한 글로 자신의 글에 대한 반성과 문학과 삶이 지평의 풍경을 담는다. 2부는 역사적 관점에서 통일문학은 유효한지를 되묻는 한편 해방기부터의 경남과 부산의 시의 제반 모습들과 항쟁 기록들의 문학적 사유 등 자신이 살아가는 부산과 지역문학의 방향과 모색을 점검한다. 3부는 우리 시대의 논고적 대상이 되는 강상기, 김지하(작고), 송유미(작고), 조용미, 허만하, 김정수, 나금숙 등 현장문학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4부 또한 김명관, 김순아, 김형칠, 김흥규, 손택수, 이도미, 이린, 이우돈, 정미숙, 정영임, 최로잘리 시인 등의 작품세계를 두드리며 현재의 한국시단을 점검한다. 5부는 시인들의 시 해설에 집중 나서 권상진, 김종태, 문지아, 배동욱, 신정민, 양재건, 이문영, 이소암, 이종섶, 최보기, 최영철, 한경훈의 시들을 훑어보고 있다. 그리고 6부에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추억을 지닌 작고한 이상개, 박태문, 고현철, 신영길 시인 등을 작품을 통해 저자의 인연에 남은 그리움들을 추억한다.
정훈 평론가의 글은 비평문보다는 에세이적 부드러움이 강점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의 비평집 제목도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이다. 제목만 봐서는 비평집인지, 에세이집인지 구별이 안간다. 그만큼 정훈 비평가는 비평적 현실을 앞에 두고 있지만 시를 쓰는 시인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책 머리에
지난 2020년에 펴낸 두 번째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에 수록된 글들을 출간 뒤 찬찬히 다시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역시나 미진했으며 아쉬움이 컸다. 비평의 방향이나 빛깔이 불분명한 채로 출간을 재촉했던 조급함이 조심성 없이 밥을 먹다 옷에 흘린 음식 찌끼처럼 묻어 있었다. 지우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고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것은 아마 내 빈약한 비평의식의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연구와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작품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손길의 촉수가 너무 앞섰다는 자책감도 뒤따른다. 연구가 작품이 간직한 특이성과 의미를 찾아내어 그에 마땅한 문학적 자리에 앉히는 일이라면, 비평은 이와 무관하게 작품의 다각적이고도 심층적인 세계를 비평가의 심미안으로 조명하는 일에 가깝다. 그런데 이전까지 내가 쓴 평론은 연구나 비평이 갖추고 있는 덕목에 충실했다기보다는, 작품이 보여주는 ‘첫인상’에 매몰된 나머지 작품에 내재한 무수한 목소리라든지 문학적 평가에 미흡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그런 자의식이 어쩌면 내 비평의 속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작품을 두른 휘장을 조금씩 벗겨내면서 보게 되는 언어의 행렬은 시인의 생각과 가치관이 상상력과 결합하는 데서 만들어지거나 빚어지는 말의 조형造形으로서 뚜렷이 다가온다. 숲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산의 모습과 비교될 수 있을 작품의 외형은 갖가지 해석과 평가를 낳는 비평의 일차적인 동인動因이다. 형식이 비평의 시각에 포착되면서부터는 의미와 메시지 및 주제 등의 내용이 별도의 분석 공간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품(시)은 형식이 곧 작품의 속내와 연원이 드리우는 그늘과 직결된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진실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듯이, 작품 또한 형식이 건네는 어조와 언어의 역동적인 흐름 및 맥락을 통해 문학적 진실의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평은 작품 창작 연도와 관계 없이 작품의 생명을 이어줌과 동시에 또 다른 작품의 미학과 창조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작품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번 평론집은 총 6부로 구성되었다. 두 번째 평론집 이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현장 비평을 수행하면서 느낀 점은, 시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남과 동시에 소재 또한 다양해졌지만, 한편으로 창작의 매너리즘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인의 양적 증가가 우리 시의 질적 증대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과도 이어진다. 물론 ‘좋은 시’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좋은 시’란 시를 바라보는 오랜 고정관념이 만들어 낸 허상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단순하게 좋은 시의 양산이 아니라 ‘새로운 시’의 발견이요, 이를 위한 세계 인식의 틀을 비트는 것이야말로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문학인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이 예술과 창조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예술’이나 ‘창조’의 이름으로 허망한 지적 허영의 놀음판에 언어를 끌어들이는 작가들 또한 부지기수란 사실에 잠시 생각을 멈추곤 한다. 우리는 문학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지 ‘기본’을 되뇌지만, 그러한 기본의 뿌리에는 역시 목적과 방법, 그리고 정신이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세 꼭짓점처럼 맞물려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부는 글쓰기와 문학이 맺는 관계를 나름대로 궁리하고 숙고하면서 글이 글쓰는 이의 생각 및 마음이나 삶과 연동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글’이 단순하게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이나 매개 차원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하는 ‘증표’의 일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글쓰기와 창작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 평소 느낀 부분을 기회가 닿는 대로 발표하거나 지면에 수록된 글 중에서 뽑았다. 작가라면 으레 자신의 글이 나아가는 방향과 표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1부에 수록된 글들은 대개 나 자신이 글에 관한 자기반성과 함께 문학과 삶, 그리고 문학이 그려 보이는 지평의 풍경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2부는 창작이 창작 본연의 실천과 함께 사회와 역사적 의미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학은 당대 시·공간의 흐름과 엮일 수밖에 없다. 공간적으로는 작품이 창작되는 자리, 곧 공간과 장소의 자장은 ‘지역문학’이라는 카테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한국의 현실을 놓고 보면 ‘통일문학’의 의미망을 설정할 수 있다. 통시적으로 부산과 경남의 시문학이 흘러온 줄기와 아울러 부마항쟁을 소재로 한 문학을 새롭게 곱씹는 글들을 2부에 실었다. 한편 이번 평론집 발간 시점에서 몇 년 전의 상황이긴 하지만 부산 시의 현황을 살펴본 글은 지금도 유효하기에 함께 수록하였다. 문학이 작가 개인의 작업을 뛰어넘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만들게 되는 공시적·통시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3부부터 마지막 6부까지는 현장 비평의 글들을 모아서 구성하였다. 시집에 관한 서평이 주다. 대상은 1950년대 등단한 시인부터 최근 2020년 이후 등단한 신진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로 보나 시 세계로 보나 스펙트럼이 넓다. 이들 다양한 성향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우리 시가 흘러온 풍경과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아울러 평론가에 관한 비평도 두어 편 다루었다. 비평가론과 회고(에세이)라 할 수 있는 글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에세이 형식은 시나 소설과 같은 ‘주류 장르’와는 다른 질감을 지닌다. 냉철함과 분석적 사고보다는 세계와 글쓴이가 내밀한 정감으로 흐르는 ‘온기의 세계’ 속을 거니는 느낌이 강하다. 추체험의 시간이 현재의 필자의 마음에 건네는 온도를 의식하면서 써 내려가면 어느덧 다루는 대상과 세계가 완연宛然해지면서 내 의식의 촉수와 묘한 공명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런 감각이 두 번째 평론집 이후 내 글쓰기를 추동했던 배경이 되었다. 평론집의 부제를 ‘비평의 신열(身熱), 공존하는 감각의 온도’라 정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끔 작품을 읽고 평론을 쓸 때면 집중도가 높거나 낮아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면 나는 무수한 글자들 속을 거닐면서 때로는 상상으로, 때로는 작품 형식의 결을 매만지면 묻어나는 말의 촉감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를 몸살의 일종으로 봐도 될까.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도 가능한지 스스로 묻곤 한다. 그러면 늘 긍정의 대답을 내린다. 작품이 품은 감각과 내 글쓰기의 감각이 어우러져 생긴 미묘한 온기가 불씨처럼 피어오를 때가 있다. 불씨가 점점 밝아지거나 사그라들거나 상관없이, 그 빛이 발하는 환한 온도에 기대 끝날 줄 모르는 펜의 움직임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곤 한다. 이 세상에는 글 쓰는 나와, 내가 짚어내는 글자의 형식과 촉감만이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바람 냄새 가득 안고 마침내 집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상기한다. 상상인지 꿈인지 혹은 스산한 마음이 불러일으킨 이미지인지는 모르지만, 그 두 사람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평상마루에 턱 걸터앉아 바야흐로 빛나기 시작하는 하늘의 모래알들이 파르르 떠는 광경을 올려다보는 풍경을 그린다. 문학과 비평이 만나는 자리가 마치 그렇지 않을까.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십여 년의 원도심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감천동으로 이사를 했다. 아직 옛 골목의 온정이 남아있는 이 동네에서 나는 새롭게 숨을 내쉬어야 한다. 계획은 무성하지만, 실행은 언제나 한 발 짝씩 뒤늦거나 무산되는 삶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글쓰기가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우는 지렛대였음을 잊지 못한다. 밤이면 흰빛의 굴뚝 8개가 깜깜한 감천항 밤하늘을 비집고 들어서려는 의지처럼 붙박여 있는 풍경을 주택 2층 난간에서 가끔 볼 때가 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연가스발전소다. 때때로 끊이지 않는 충전의 힘으로 글을 쓰고 싶다.
어쭙잖은 글들을 책으로 엮어주신 도서출판 <작가마을> 대표 배재경 시인께 고마움을 전한다. 오랜 세월 험난하고 열악한 지역출판의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이다. ㈜상지건축 허동윤 회장님의 배려도 잊을 수 없다. 문화예술에 관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빠듯한 회사 경영에도 지역문화와 예술의 발전과 증진을 위해 응원과 격려를 보내시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을 이 자리를 빌려 남긴다.
2026년 깊은 봄날 감천항을 바라보며
정훈
문학 너머의 문학을 꿈꾸며
1.
돌이켜 보면 ‘문학’이라는 이름을 걸치며 행한 ‘담론’에서 지금까지 모든 ‘문학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거나 찬성했던 명제는 없었던 것 같다. 이 말은 ‘문학’의 지향이나 목적보다는, 현실에 놓여 있는 문학의 단면을 살피며 그 빛깔이 주는 어떤 징후나 조짐을 끄집어내려는 이야기 자체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이런 정황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문학’은 늘 생성하고 변형되면서 산출되는 개개 텍스트의 바탕을 딛고 선 개념으로, 시대와 사회의 변모와 함께 그 경계와 외연을 신축성 있게 어루만져 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문학이 당대 사회의 흐름에 비추어 어떤 각도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문학의 존립 양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논의하면서 공통적으로 현실과 작품의 내밀한 관계 양상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상징적 충돌에 늘 주목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그리고 문학은 언제나 현실과 인간의 이야기에 밀착하고,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해왔으며 앞으로도 줄곧 떨어지지 않고 인간과 밀접한 문화로 남을 것만 같다. 문학이 인간이 만든 다른 문화와 갈라지는 점은 ‘비판성’에 있다. 문학 행위의 담당 주체인 작가 스스로도 창작을 통해 비판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인간의 탐욕과 자기부정 등과 같은 온갖 모순들이 텍스트에서 형상화되고,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로써 인간 사회의 풍경을 그린다. 문학은 결국 인간 문제에 대한 미적 탐구인 셈이다.
최근 ‘포스트 휴먼’이란 말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진단하는 분위기를 보게 된다. 포스트 휴먼은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내재한 말이다.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을 중심으로 생명의 회로를 탐색한 주체의 윤리학이라면, 탈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수많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해석하는 겸손의 윤리학” 전철, 「휴머니즘의 빛과 그림자-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사상적 실험」, 강금실 외, 『인간 너머의 인간』(사월의책, 2021), 123쪽.
이라는 논자의 말에 수긍한다면, 포스트 휴먼이 지향하는 지점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의 목소리를 흘려보내지 않아야 하고, 이러한 자기 낮춤의 태도에서 세계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양상으로 나아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이끌어낸다. 가장 ‘인간적인’ 문화라 할 수 있는 문학이, 이러한 포스트 휴먼 시대를 맞아 어떤 변모의 방향으로 갈피를 잡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사실 몇 마디 말로써 명쾌하게 진단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사실임을 인정한다. 진화의 최종점이자, 가장 고도의 지능과 기술적 도구를 활용해 유래가 없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주체가 된 인간이 지금보다 더욱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거듭난 현재 시점에서 지양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을 때 문학은 어떤 좌표로써 설정하고 가다듬어야 하는가. 단순히 변모된 사회의 소재들을 작품에 담는다고 해서 이 새로운 시대의 환경을 반영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을 바꾸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문학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2.
지금 우리가 ‘문학’이라고 하는 예술 장르가 분화되어 개념이 굳어진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소설 장르가 생겨났으며, 그보다 더욱 오래전부터 시가 양식이 널리 쓰였다. 언어의 실용적인 기능을 비틀고 어그러뜨리면서 ‘창조’한 말의 새롭고도 혁신적인 전달 양식이 된 문학작품은 결국 인간존재의 다양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전달하는 데 쓰인 요긴한 매체이자 기록물로 남았다. 창작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작품은 인간의 온갖 속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작가와 독자를 비롯한 모든 문학 구성원은 문학의 비판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학은 어쩌면 ‘휴머니즘’이라는 거대하고 오래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주의는 인간중심주의로 손쉽게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다른 존재 사이에 경계가 만들어진다. 사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비문명, 이성과 감성 등과 같은 이분법적 논의는 실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법 자체가 이미 사후 개념화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캐묻는 과정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점은,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간주의가 만들어 낸 폐해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파괴와 폭력적인 존재 상태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다시 말해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 융합의 시대, 그리고 메타버스(metaverse)나 AI로 흔히 지칭하는, 가상현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사회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온라인 공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단기간에 걸친 이러한 삶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기술 발전이 가져다 주는 신세계의 체험과 함께, 이 세계가 군무처럼 펼치는 주체-대상 사이의 경계 허묾과 차원 이동에 따른 시공간의 공존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제반 기술을 비롯한 인공지능의 놀랄만한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회를 이루며 좀 더 편리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앞당기기 위해 힘써왔던 누천년 시간의 흐름에서 본다면 불과 몇십 년도 안 된 사이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이같은 변모와 문학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문학은 인간과 세계가 주고받는 대화다. 문학은 세계를 반영하면서 때로는 고발과 폭로로 이루어져 왔으며, 더러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이 되거나 이용되어 오히려 인간의 정신에 편향적인, 혹은 편견을 심어주는 첨병 노릇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문학’은 다른 정신문화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약한 고리’로서 사람들에게 약과 동시에 독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포스트 휴먼’이나 ‘포스트 휴머니즘’은 지난날 인간중심의 근대적 기획을 모조리 갈아엎으려 등장한 새로운 시대정신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학 또한 시대에 발맞춰 쇄신해야 한다는 원칙에 순응해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자유를 강제하는 원리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작가 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도 널리 쓰이는 말이다. 작가 정신은 문학을 살찌우고, 문학을 통해 인류의 거대한 숙원 - 자유와 해방과 같은 - 을 꿈꾸며 현실을 조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텍스트의 잠재된 콘텐츠이다.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창작으로 형상화된 세계를 창조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게 기억과 체험이다. 이 기억과 체험은 당대의 시대상과 물질적인 토대, 그리고 사회 분위기나 정치적 흐름과 밀접하다. 보통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특히 작가는 당대를 살아가면서 받아들이는 감각적 수용성受容性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 않고, 기억에 저장해 둔다. 창작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 작가는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작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어쩌면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변화에 따르는 풍속의 변모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한국문학에서 10년 단위로 문학적 마디를 끊거나 징검다리 삼아 흐름을 진단하곤 한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대두된 젠더, 소수자,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타자에 대한 관심은 최근 들어 더욱 첨예한 양상으로 작품에 형상화되곤 한다. 타자를 향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어느 정도 풍요로운 물질적, 제도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여유가 생겨서인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사회적 약자는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들 타자의 목소리는 인터넷과 첨단기술의 발달로, 그동안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었던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다양한 매체를 매개 삼아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전세계적인 인터넷 관계망은 개인의 내밀한 취향뿐만 아니라 일국적인 거대 서사까지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했다. 온라인전산망을 통해 24시간 교류하며 감응하는 세계의 발화들은 이제 한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만이 누리거나 공유할 수 있었던, 고급 정보와 지식이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공평하게 ‘인계’된 것이다.
문학은 이런 상황에서 ‘위기’는커녕 어쩌면 창의적이고 새로운 지점에 다다랐다는 인식을 주게 한다. 삶의 방식과 태도의 변모는 그 물적 토대인 생산력과 기술의 변모에 힘입고 영향을 받는다. 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고 교류하면서 정착되듯, 사회 메커니즘 또한 시간과 공간의 축적과 스밈에 영향을 받지만 때때로 순식간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기도 한다. 여기에서 기존의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는 흔들리게 된다. 우리는 휴먼이나 인간애와 같은 말들이 자명한 듯 영원한 정신적 상수(常數)처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주의’라 했을 때의 마음 밑바닥에 고여 있는 어떤 ‘통념’에 대한 고찰과 반성을 포스트 휴먼 혹은 포스트 휴머니즘은 요구한다. 한편으로, ‘문화혁명’으로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최근 시대적 흐름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시공간적 좌표가 무엇인지 따지게 만든다. 체제와 이념에 따른 국제질서나 한 나라의 정치질서는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작가를 포함한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반발과 협력, 혹은 급진적인 변혁을 통해 균열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 공고해지는 과정을 겪는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체계나 제도 및 사상들은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도 자체 면역 유지를 위한 에너지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존의 틀이나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 자기 변신을 꾀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기성의 질서와 패러다임으로서는 지탱할 수 없는 역사의 지점에 와 있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마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한계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허기와 기갈을 느끼며 서로가 서로에게, 공동체가 공동체에 허기를 달래 줄 그 무엇을 요구한다.
3.
인간성이 무너진 시대와 사회에서 인간이 처해야만 했던 다양한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했던 문학의 임무는 지금도 유효하다. 문학에 임무가 있다면, 그 첫 번째는 우리 인간에 대한 반성으로 돌려야 한다. 인간에 대한 반성은 결국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귀결된다. 인간주의(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절대적인 존재로 위치시켜 나머지에 속한 존재를 인간보다 하위에 자리매김하는 이데올로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주의는 인간의 재발견이며, 인간이 지닌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싹텄다. 다만 이러한 사상을 근거로 한 사회적 실천에서 배태된 수많은 배제와 억압의 논리로 손쉽게 호출당할 따름이다. 문학은 인간 역사에서 벌어지는 주객 행위,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 나와 너, 우리와 너희들, 이것과 저것 등이 벌이는 양상에서 무엇이 값지고 올바른지, 또한 무엇이 세계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지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여기서 휴먼, 즉 ‘인간다움’이란 선험적이거나 고정된 절대적인 명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다움’은 늘 새롭게 구성되며, 또한 늘 자기반성과 자기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인간 윤리의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미 주어진 존재로서 우리 앞에 놓인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생성하면서 확충하는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존재로 바라보아야 하는 실체다.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과 폭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과 자기 모멸을 통한 새로운 존재 정립을 위해 섣불리 태도를 전환하는 모습은 지금 시점에서 낯설게 다가옴을 부정하기 힘들다.
문학은 늘 새롭고 창조적인 세계를 갈구한다. 따라서 문학의 두 번째 임무는 이 세계가 완전하고 진화의 끝 지점에 다다랐다는 믿음을 저버리는 데서 자리한다. 그것은 문학이야말로 현실을 비틀고 깎으면서 행복한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는 언제나 처참하고 비통하게만 보인다. 문학이 창조하는 세계는 이러한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되 형상화 과정에서 우리가 되찾거나 새롭게 앞당겨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상기하게끔 추동하는 세계로 펼쳐진다. 이 세계는 완전하거나 아름다움의 극치가 펼쳐지는 세계가 아니다. 문학은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결코 유토피아를 문학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작가는 창작을 통해서, 낮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수많은 ‘나머지들’과 구멍들과 틈새들을 호출하며 대화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환한 낮의 세계에서는 빛에 가려 보이지 않거나 숨어 있던 음성들이다. 낮은 음성들에 귀를 기울이는 문학은, 우리가 겸허하게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비친다.
현실은 역동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되묻는다. 지금과 같은 세계는 여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 어리둥절한 채로 이 세계와 마주한다. 중심에 있었던 것처럼 자부심을 지녔던 시간에 비친 그늘들, 이는 인간이 장악했고 완전히 알게 되었다는 자만이 만들어 낸 허상들이었음을 지금에 와서야 인간은 알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기술 발전과 인공지능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관계와 영역에 진입해서 시작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풍요로운 사회는 항상 외부와 경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지 인간존재에 대한 회의가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바야흐로 ‘인간’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이 시점에서 문학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문학 개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문학의 존립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학’의 기능과 의미는 이름을 달리한 다른 그 무엇이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스트 휴먼 시대의 문학은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하는가.
4.
‘신인류’니 ‘신인간‘이나 하는 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사상가들은, 특히 종교철학자들은 ’영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현대 인류가 보완해야 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해 왔다. 기계적이고 원소론적인 세계 이해가 가져다준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이나 ’~을 너머‘와 같은 수식어들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문학을 넘어 새로운 문학을 꿈꾸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문한다. 문학 너머의 문학은 과연 가당키나 할까. 아니 상상만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말일까. 지금까지 문학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나 윤리를 귀띔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문학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행복한 선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문학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과 사회 및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학을 만나면서 완전한 세계와 불완전한 세계가 무엇을 기준으로 완전하고 불완전한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을 만나면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물음인 죽음, 사랑, 행복, 고통 등을 고차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현실이 끌어들이는 중력이 이미 실존적인 인간 하나 하나에게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이해보다도 더욱 구체적인 감각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현실은 그만큼 무시하지 못할 세계다. 이러한 세계 한복판에서 우리는 뒤엉켜 살고 있다. 문학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주었던 모든 종류의 위안과 행복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지는, 예전에 종이를 쥐었던 손가락이 지금은 무엇을 쥐거나 잡고 있는지 생각하면 금방 해답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변화된 현실 인식만으로는 문학의 위상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에 문학이 풀어야 할 숙제가 놓인다. 문학은, 그러니까 시나 소설과 같은 ’전통‘ 양식의 문학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시인과 작가들은 알아차려야 한다. 설 자리를 잃은 문학이지만,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을 생각해 본다. 아직도 문학이 쓸모가 있어서 사람들이 쏠리는 건 결코 아니다. 문학이 전문영역에서 여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 그리고 문학이 특정한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사회 밑바닥에까지 내려와서 너도나도 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문학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은 문학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에 씌우는 월계관에 지나지 않는다.
붓을 쥔 손힘을 빼야 하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힘은 빼되 손놀림은 더욱 커져야 하는 때다. 포스트 휴먼 시대의 문학은 ‘문학’이라는 이름만으로 세계를 점령했던 작가 마음을 짓밟고 우뚝 선 자리에서 마침내 시작한다. 공허한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제 작가나 시인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알게 모르게 증발했고, 증발한 자리에 ‘말하거나 쓰는’ 존재로서 인간만이 들어설 것이다. 이러한 ‘인간’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지적 존재로서의 작가의 외투를 벗어버린 존재다. 땅바닥에 납짝 엎드려 모든 존재를 우러러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문학 너머의 문학은 이 세계를 마치 처음 본 것인 양 설레며, 당황하고, 불안에 떠는 여린 인간이 세계를 향해 내뱉는 모든 옹알이의 ‘낙서’ 모양을 띠지 않을까. 그렇다면 동물이거나 로봇이거나 너이거나 나이거나 돌멩이거나 상관없이 천진난만한 아이 눈과 몸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자아내는 소리들-세계의 호흡이라고 하자.-을 마시면서 내뱉는 기록, 이 절대로 떼어놓거나 지우지 못할 흔적들이 아우성치는 문학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문학’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1)
작가 소개
지은이 : 정훈
문학평론가. 1971년 마산 석전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에서 태어나 창원(현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과 의령(유곡면·궁유면)을 거쳐 중2 때부터 줄곧 부산에서 살고 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김지하 미학 연구」로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연구 및 비평 활동을 시작하면서 차차 외연을 넓혀 신학과 동학에도 몰두하고 있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약시와 투시, 그 황홀한 눈의 운명-기형도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과 시집 『새들 반점』을 펴냈다. 이밖에 『이은상 시선』(편저)을 비롯하여 『지역이라는 아포리아』, 『2000년대 한국문학의 징후들』,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 『차이의 해석과 문화적 시선』, 『1930년대 문학의 재조명과 문학의 경계 넘기』 등의 공저를 펴냈다. 동아대, 동의대, 부산교육대, 부산대, 부산외대, 영산대, 한국해양대 등의 대학에서 문학과 교양을 가르쳤다. 현재는 계간 《사이펀》 및 인문무크지 《아크》 편집위원과 계간 《작가와사회》 편집주간, 요산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삶·생각·말·글의 진실과 자유를 찾아서
글자의 운명, 문학이 남기는 흔적-지속하는 문학이 묻는 것
문학 너머의 문학을 꿈꾸며
희생의 끝-문학은 어떻게 ‘혐오’를 불러내는가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
제2부
통일문학은 가능한가, 혹은 자유로운 창작 의지는 역사마저 뛰어 넘는가
해방기 경남·부산지역 시의 양상
항쟁·증언·기록으로서 부마항쟁과 문학 -경남문학사를 중심으로
‘지역문학’의 방향과 모색을 위하여 -(사)한국작가회의 부산지회(부산작가회의)가 나아갈 길
부산 시의 오늘 -시의 새로운 지형학을 위하여
제3부
정직한 생명공동체를 꿈꾸며 길을 걷는 자의 노래 -강상기의 시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에 손을 내밀면 빗금 치는 언어들 -김정수의 시
하얀 그늘 품에 노닐다 말다 잠시 물끄러미 지나가다 -김지하의 시
환란患亂하는 글자들의 운명 -나금숙의 시
그리움에 젖은 슬픔의 거름을 본다 -송유미의 시
당신은 나를 슬어서 그늘에 안장한다 -조용미의 시
생각이 지나가는 자리에 선 흰빛의 눈(目) -허만하의 시
제4부
시인의 마음과 눈에 어린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 -김명관의 시
망연茫然, 네 그림자에 묻은 얼굴 -김순아의 시
시의 강물이 별빛 되어 우주를 수놓을 때까지 -김형칠의 시
흙 내음 천지 속 언어의 산그늘에 파묻혀 -김흥규의 시
말이 시나브로 드러눕는다 -손택수의 시
경계에서 피워올리는 꽃, 혹은 존재를 위한 만가輓歌 -이도미의 시
무중력 시학의 무늬와 빛깔 -이린의 시
단장斷腸, 생生을 아리게 하는 피울음의 언어에 대하여 -이우돈의 시
푸른 생명의 날갯짓을 위한 노래 -정미숙의 시
불안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시 쓰기의 자의식 -정영임의 시
아수라와 지복至福 사이를 매만지는 말들 -최로잘리아의 시
제5부
청록의 모서리에 걸터앉으면 불어 보는 휘, 파랑波浪에 관한 보고서 -권상진의 시
푸른 오감(五感)으로 틔우는 삶의 문장들 -김종태의 시
통점을 눅이면서 당신 쪽으로 산란하는 빛의 서사 -문지아의 시
실존의 눈으로 포착한 삶과 존재의 아이러니 -배동욱의 시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어디로 갔을까 -신정민의 시
존재의 그늘에 새기는 그리움의 언어 -양재건의 시
웅크린 실존, 비상하려는 영혼 -이문영의 시
흰 허공을 가르며 사라지는 꽃의 춤 -이소암의 시
디스토피아의 사막에서 길어 올리는 칸타타 -이종섶의 시
직설直說하는 시의 길을 위하여 -최보기의 시
시, 귀를 쫑긋 세워 찍어내는 무늬에 대하여 -최영철의 시
슬픈 미토스(mythos) -한경훈의 시
제6부
‘곽리자고’의 육성, 그 저공低空으로 연주하는 비평의 숨결에 대하여-남송우 지역문화론 단상
머물고 흘러가는 것들에 관한 보고서 -강영환의 시
바람 따라 물 따라 흘러가신 이에게 -문학평론가 고현철 교수를 생각하며
사람의 길, 시인의 길 -뱍태문의 시
시간, 점, 침묵, 글, 먼 하늘가에 멈춘 남자의 시선 -송제松櫅 이상개 시인 3주기에 즈음하여
시의 멱, 그 곡진한 언어의 등선에 피는 시혼 -이상개의 시 1
참 잘 익은 노을 빛 언어 -이상개의 시 2
쓰기, 새로운 국면의 자기 정립을 위한 날숨을 위하여
청동 손가락으로 써진 시詩 -신용길 시인을 그리며
허무와 고독의 한복판에서 그리는 휴머니스트의 글씨 -김영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