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에델바이스
초여름의 열기 속에 들판엔 잘 익은 밀과 보리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번기 가정실습을 앞두고 교정은 수학여행 준비로 술렁대기 시작했다. 강의실 곳곳에선 행선지를 정하네, 일정을 짜네, 하며 연일 소란스러웠다. 과 특성에 따라 행선지도 다양했다. 준영은 설악산으로 캠핑을 가고 인애네 과는 합천 해인사로 답사를 간단다. 진숙이 속한 미술과는 보은 속리산 법주사로 스케치 여행을 가기로 정해졌다. 모처럼의 기회에 고향집을 다녀오기로 인애와 미리 약속을 한 진숙은 들떠 있는 급우들 뒷전에서 구경만 했다.
6교시 수업을 들으려 강의실을 옮겨가던 진숙은 중앙현관 출입문에서 준영을 만났다.
“부탁이 있어요. 파카 좀 빌려줘요.”
“파카 있잖아요?”
있는 파카를 왜 빌려달라는지 알 수가 없어 진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준영이 해명을 했다.
“내가 입을 게 아니고 우리 조 여학생 하나가 파카가 없어서 빌려오겠다고 했어요.”
“아∼ 그럼 이따 하굣길에 가져가요.”
수업이 끝난 준영과 진숙은 팝송 ‘올 포 더 러브 오버 어 걸’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운동장을 빠져나와 나란히 학교 담장 길을 따라 걸었다.
“미술과는 속리산 법주사 가기로 했다면서요?”
“예-그렇지만 나는 못 가요. 가정실습 동안 집에나 다녀오려고요. 차멀미가 심해서 개학하고 여태 고향집엘 한 번도 못 갔거든요.”
준영이 그럴 만도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숙은 준영과 함께할 행운의 여학생들이 궁금했다.
“누구누구 같은 조예요?”
준영이 손가락을 꼽으며 나열하는 멤버 속에 캠핑을 같이 간 동현과 순옥이 들어있었다. 진숙은 준영과 함께 숙식하며 여행하게 될 여학생들이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샘이 났다. 집 앞 근처에 다다라 진숙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 자취집 저기예요. 파카 가져올게요.”
진숙은 준영을 골목길에 세워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자취집은 골목을 얼마쯤 걸어들어와 다시 작은 골목으로 꺾어 사오 미터는 더 가야 있다. 집이 골목 끝 막다른 곳에 있어 골목에서도 열어 놓은 대문으로 집안이 일부 들여다보였다. 진숙은 준영의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우물을 돌아 대문에서 정통으로 보이는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진숙은 트렁크에서 파카를 꺼내 주머니부터 살폈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손을 집어넣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진숙은 기다리는 준영에게 파카를 건네며 공식적인 인사를 했다.
“추억 많이 만들고 재미있게 놀다 와요.”
준영도 정겨운 미소를 보내며 같은 의미로 인사를 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진숙과 인애는 과 친구들을 배웅하러 학교로 갔다. 여러 과가 한꺼번에 떠나고 있어 운동장은 여행복 차림의 학생들로 부산했다. 진숙은 미술과 버스를 찾으며 인애가 눈치채지 않게 체육과 버스도 찾았다. 금방 근처 버스 출입문 앞에서 물건을 싣고 있는 준영이 눈에 들어왔다. 눈인사를 건넨 진숙이 나영과 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준영은 선뜻 버스에 오르질 않고 계속 운동장을 왔다 갔다 했다. 준비가 다 되었는지 두세 명 남아있던 학생들마저 하나둘 모습을 감추자 준영이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며 진숙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숙도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친구들을 보내고 인애와 진숙도 곧 귀향길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기도 전에 역한 휘발유 냄새가 비위를 뒤틀더니 포장되지 않은 도로는 더 이상 넘어올 게 없을 만큼 극심한 구토를 일으켰다. 어지러움이 극에 달해 내장까지 뒤집어지려 할 때쯤 버스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시간도 안 되는 길이 천릿길처럼 느껴졌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푸근했다. 진숙은 한동안 못 본 동창들도 만나고 친척집을 찾아가 문안인사도 드렸다. 그러다 보니 금쪽같은 휴가가 어느덧 절반이 지나 있었다.
“서진숙 씨, 엽서요.”
식구들은 모두 출타하고 없고, 진숙이 혼자 남아 느긋이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밖에서 우편배달부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으로 우편물을 보낼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뛰어나가 엽서를 받아 들었다. 주소를 확인하던 진숙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엽서는 뜻밖에도 설악산에서 준영이 보낸 것이었다.
‘나한테 이런 것을 보내다니!!……’
준영으로부터 처음으로 받아보는 서신이 황당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가 궁금했다. 진숙은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엽서를 읽어 내려갔다. 글에는 안부인사와 함께 여행일정과 소감이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내용은 간단했지만 서신을 보낸 자체만으로도 그는 이미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진숙은 글을 다시 찬찬히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캠핑을 다녀온 후 준영과 우연히 시간을 함께하며 같은 정서를 느끼긴 했었다. 그러나 느낌은 느낌일 뿐 그저 그러려니 했다. 줄곧 와닿는 느낌은 특별했어도 뜻있는 대학생활을 위한 과정일 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은 품지 않았었다. 서찰을 보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다가 막상 마음을 전해 받고 보니 감동에 앞서 갈등부터 일었다. 교대 남학생하고는 절대로 교제할 생각 말라던 어머니의 당부가 머리에 날아와 박혔다.
진숙은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말단 공무원을 남편으로 둔 주부로서 궁핍한 삶의 한스러움과 유달리 곧고 철저한 아버지의 별스런 성격 탓이라는 것을. 교대 남학생은 후일 언젠가는 국민학교 교사가 된다. 국민학교 교사는 곧 일반인들이 지칭하는 진숙의 아버지 호칭이다. 또한 아버지 친구나 동료들의 호칭이기도 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융통성 없는 말단 공무원’은 어머니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버지를 향해 들먹이는 상투어다. 어머니의 지론에 의하면 쪼들리는 살림살이는 아버지 직업이 공무원이기 때문이고, 잔소리로 집안 분위기가 간간이 가라앉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심하고 정확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직업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딸자식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경제적인 것은 그렇다 쳐도 성격은 직업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지만 유전적이거나 혈액형에 따라 타고난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타국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닮았을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미래의 준영의 직업은 어머니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싫어하는 공무원이다. 그것도 아버지와 같은 교사라는 직업이다. 같은 직업이라도 사람에 따라 개성도 다르고 가치관도 제각각이어서 싸잡아 떠넘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남다른 성격을 몸소 경험한 진숙은 잘 따르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되면 준영이 간접적으로 손을 내민 거나 마찬가지다. 과연 그의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에 휩싸였다. 준영이 보내준 엽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기쁨으로 넘쳤지만, 머리에 박혀 있는 어머니의 당부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진숙은 지난 가을 어느 날 친구들과 모여 앉아 주고받던 말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른한 햇살이 창호지를 통해 방으로 비껴드는 토요일 오후. 이웃에 사는 친구 집에 몇몇 학우들이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는 연애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니?”
물오른 나무처럼 생기발랄한 영순이 뜬금없이 좌중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다. 잠시 생각하던 인애가 반문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 나는 말이야 연애와 결혼은 동일시해야 한다고 봐. 그래서 연애를 하면 그 사람과 결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
영순은 겉보기와 달리 의외로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도 같아 연애하다가 어떻게 헤어질 수 있니. 연애를 하면 결혼도 해야지. 그래서 난 결혼할 상대가 아니면 애초에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인애가 영순의 말에 동조하며 자기의 뜻을 내비쳤다. 집주인 상희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은 달라. 연앨 했다고 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연애와 결혼은 분리해야 해.”
상희의 말에 경자가 영순과 인애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나는 연애와 결혼은 동일시해야 한다고 봐. 인애 말처럼 연애를 하면 결혼도 해야 하니까 연애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 같아.”
듣고만 있던 진숙이 경자의 말에 반론을 폈다.
“연애하다가 뜻이 맞으면 결혼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싶은데 어떻게 억지로 결혼을 하니? 난 연애와 결혼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청춘에 접어든 나이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봄 직한 이야기이다.
진숙은 남은 휴가 동안 갈등을 거듭하며 답을 찾아 헤맸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개학 전날 진숙은 버스에 올랐다. 차가 달리는 내내 준영을 만나면 어떻게 처신할지에 대한 생각들로 어느덧 멀미를 잊고 있었다.
자취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하굣길에 준영이 빌려 간 파카를 돌려주려고 진숙의 집 앞까지 따라왔다. 엽서 한 장이 졸지에 둘 사이를 틀 속에 가두어 서로를 대하는 표정이 어색했다. 준영이 파카를 내밀었다. 단정히 접혀 있는 파카 위에 뜻밖에도 여행선물이 얹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엉겁결에 받아 든 진숙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성으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선물이었다. 진숙이 쑥스러운 표정을 짓자 준영이 얼른 설명으로 덮었다.
“그게 에델바이스 꽃이래요. 설악산에서만 자생하는 꽃이라나 봐요.”
진숙이 선물을 살펴보니 설악산이 그려진 면 손수건 위에 작은 액자가 올려져 있고, 액자 속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이 잘 건조되어 검은색 바탕 위에 조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에델바이스 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너무 예쁘다!”
진숙이 감탄을 하다 고개를 드니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던 준영과 눈길이 마주쳤다. 쑥스러워진 진숙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요?”
말을 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파카 주머니에 편지봉투가 하나 들어 있던데요.”
준영이 장난처럼 말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주머니를 분명히 뒤져 봤었는데…….”
진숙이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갸웃하자 준영이 믿음이 가지 않는 얼굴로 우겼다. 모자가 달려 있는 파카는 색깔만 다를 뿐 겉과 속이 따로 없는 양면 옷이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면 옷 속이 온통 뚫려 있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귀퉁이 어딘가에 봉투가 하나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난처럼 웃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거짓말인 게 분명했지만 진숙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뿐 구태여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준영은 주소를 알아내려고 분명 어떤 의도적인 행동을 했으리라. 빙글거리던 준영이 짐짓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지시하듯 말했다.
“그것- 갖다 놓고 나와요.”
진숙은 움직임을 멈추고 준영을 응시했다.
‘이렇게 되면 정식으로 교제하는 거잖아?…… 어머니가 한 말은 어떻게 하지? 인애와 나영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 소신은?…… 하지만 학창시절을 뜻있고 보람 있게 보내자고 하지 않았어? 교제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잠시 생각하던 진숙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다려요.”
준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밤공기는 더없이 푸근했다. 수많은 별들이 축하인사를 하는 강둑을 준영과 진숙은 나란히 걸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 시간에 쫓긴 진숙이 바쁜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그곳에 막 도착하고 있는 준영과 맞닥뜨렸다. 뜻밖이었다. 진숙은 걸음을 멈칫하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준영에게 다가갔다. 아침마다 이 시간에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가 오늘에야 만난 게 신기했다.
“매일 이 길로 등교하세요?”
“예.”
“그런데 왜 여태 한 번도 못 봤지?”
진숙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집이 같은 방향인데도 등교 시간에 그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준영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맞춰 나온 건지? 우연히 만나게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든 반갑고 기분 좋은 아침이 아닐 수 없었다. 준영과 진숙은 어깨를 나란히 학교로 향했다.
수업시작은 아침 9시다. 집에서 강의실까지는 십 분이면 딱 맞는 거리다. 준영은 진숙이 언제나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시간에 맞춰 나온 것이다. 하루의 시작인 등교부터 진숙은 새로운 변화를 실감했다.
“오늘 수업 뭐 있어요?”
준영이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진숙이 일정을 나열하자 준영도 자신의 일정을 말해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혼자이던 일상이 하루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교문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른 간격을 벌려 섰다. 그리곤 각자의 강의실을 향해 총총히 걸어갔다. 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낮의 교정엔 방송부에서 흘려보낸 팝송이 애조 띤 음색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진숙은 현관을 나서며 나영이 눈치채지 않게 운동장을 살폈다. 농구코트에서 뛰어다니는 준영을 발견하고 모르는 척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진숙과 나영이 교문 근처쯤 왔을 때 뒤에서 준영이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시침을 떼고 담장을 따라 걷던 진숙은 갈림길에서 나영과 작별 인사를 했다. 뒤이어 준영도 친구들과 헤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준영이 성큼성큼 다가와 진숙 옆에 섰다.
“오후수업 끝나면 뭐 할 거예요?”
“친구와 향교로 스케치 가기로 했어요.”
“다 그리거든 나 좀 빌려줘요. 베끼게.”
준영은 미술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지 진숙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르간 레슨도 골치 아프지만 싫은 건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그럴게요.”
준영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진숙은 순순히 응해주었다.
그림 그리는 실력은 미래의 교사들에게 필수 요소다. 소질이 있건 없건 교사의 자질을 갖추려면 노력을 해서라도 실력을 쌓아야 했다. 그 점을 고려해 회화과 교수는 일주일에 한 장씩 고정적으로 그리기 과제를 내주었다. 그 과제는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걱정 없지만 재능이 부족한 학생들은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과제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보아하니 준영도 같은 부류에 속한 듯했다.
유월하고도 중순에 접어든 날씨는 불어오는 바람이 고맙고 나무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영과 진숙이 은행나무 그늘에 이젤을 세우고 선원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하면서 진숙은 아까부터 자꾸 나영을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그런 줄 모르고 나영은 향교를 화폭에 담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을 할 듯 말 듯 하던 진숙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려는데 나영이 한발 앞서 말을 꺼냈다.
“너 체육과 이준영 알아?”
“-응.”
“어떻게 알아?”
나영이 의외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전교생이 팔백 명이나 되니 같은 학년이라도 모르는 학생이 많았다.
“어- 저-번에 캠핑 같이 갔었어.”
나영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캠핑을 같이 갔으면 잘 알겠네. 그 남학생, 네가 보기에 어떻디?”
“뭐- 인상도 괜-찮고…… 착한- 것 같더라.”
진숙은 직감적으로 와 닿는 무엇이 있어 대충 얼버무렸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 일 학년 때부터 그 남학생을 좋아하고 있었어.…… 교대생 중에 내가 유일하게 마음이 끌린 남학생이야.”
“그-래!”
어이가 없었다. 진숙은 길 잃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나영을 바라봤다. 준영과의 교제를 정식으로 말해주고 앞으로 같이 못 다니는 일이 있더라도 이해하라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 나영이 그동안 준영에게 마음이 꽂혀 다른 남학생들이 안중에 없었다는 것을 비로소 일게 된 진숙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생각하니 하굣길에 나영의 태도가 가끔 수상쩍었던 게 기억났다. 본인은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뒤 따라오는 준영을 의식하고 대화에 박자를 놓쳤다는 것을.
동네를 벗어난 준영과 진숙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나란히 앉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향긋한 풀냄새가 묻어났다. 발아래 보이는 창문들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와 초여름 밤을 장식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벌어지는 사연 많은 불빛들이 오늘따라 더욱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세상을 누구와 함께 바라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 걸 진숙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림 그리고 왔어요?”
준영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진숙이 고개를 끄덕이자 생각만 해도 지겨운지 쩝 소리를 냈다.
“그림 때문에 고민이에요. 간신히 그려 내고 나면 금방 또 돌아오고……. 다음부턴 내 것까지 그려줘요.”
준영은 아예 과제를 진숙에게 떠넘겼다. 그려주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미래의 교사 자질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아 진숙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 실력이 늘지 않잖아요.”
“상관없어요.”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다. 체육은 누구보다 잘하지 않는가? 그가 힘들어하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알았어요. 다음부턴 내 것 그릴 때 한 장 더 그릴게요.”
고민거리를 덜어낸 준영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군인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선형의 이 얼굴에 모자 쓰면 딱인데.”
준영이 한 손을 브이로 만들어 턱 가까이 대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쉬운 듯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탁 쳤다. 입학하고 일 년 반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는 아직도 육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자가 잘 어울릴 것 같고 군인이 성격에도 맞을 것 같네요. 하지만 기왕 교대에 온 거 현실에 적응해야지 어쩌겠어요.”
진숙은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준영이 여태 쥐고 있던 미련을 내려놓는 듯 얼굴이 편안해졌다.
“나무 조각 다 했어요?”
준영이 물었다. 진숙이 아직이라고 하자 그는 대신 해주겠다고 했다. 사실 진숙은 손힘이 약한지 칼이 무딘지 도무지 조각도가 나무에 먹혀들지 않아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다.
다음다음 날 아침 진숙으로부터 두 장의 그림을 건네받은 준영은 표정은 비슷하고 성별이 다른 얼굴조각상 두 개를 내밀었다.
‘교제를 하니 이런 좋은 점도 있구나!’
진숙은 작품을 감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구실에 갖다 낼게요.”
준영이 진숙에게서 조각상을 받아 들며 말했다. 진숙은 이제 연구실 가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늘따라 나영이 전혀 웃지도 않고 통 말을 하지 않았다. 내내 눈치만 보던 진숙이 하굣길에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픈 거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아프긴.…… 아무 일도 없어.”
시치미 뗐지만 진숙은 못 믿겠다며 채근했다. 나영이 마지못해 실토했다.
“실은- 좋아하는 그 남학생에게 용기를 내어 만나자고 편지를 줬는데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어.”
“그-래…… 기분이 상할-만도 하겠다.”
진숙은 나영의 뜻밖의 말에 흠칫 놀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진숙의 성격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녀의 용기가 대단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진숙이 준영에게 물었다.
“요 며칠 사이 누구한테서 편지 받은 거 없어요?”
“아∼ 그저께 나영 씨가 편지를 주더라고요. 오후 네 시에 다방에서 만나자는 걸 무시했어요. 내 스타일도 아닌데 귀찮게 구네요.”
“실은 얼마 전 향교로 그림 그리러 갔을 때 오래전부터 준영 씨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털어놓더라고요.…… 우리 사이를 알면 실망이 클 텐데 어쩌지요?”
작가 소개
지은이 : 문원주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교육대학을 졸업했다. 2021년 『문학바탕』 12월호에 수필 「쑥부쟁이」, 「어떤 날」, 「제삿날의 추억」 세 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어 2025년 『문학바탕』 12월호에 장편소설 「에델바이스」가 당선되었다.
목차
기억의 그림자 6
덧없는 일상의 충격과 우연 10
에델바이스 40
풀꽃 반지 54
새집에 달아놓은 헌 문 59
아름다운 날들 67
상처 77
졸업 82
긴 겨울 106
이별 둘 111
바람이 쓸고 간 자리 124
질긴 인연 143
재회 159
건널 수 없는 강 187
저무는 인연 193
이별 셋 207
결혼 217
추억여행 236
작가의 말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