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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래
글상걸상 | 부모님 |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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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김이하 시집. 일상의 풍경이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같은 언어로 스며 있는 그의 외로운 시들, 나이든 이빨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고통으로 뭉쳐 있는 시들, 목숨에 대한 깊은 사랑이 넘실거려 가슴 시리게 하는 시들, 황폐한 세상 밖으로 내몰려 깊은 숲 어둠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의 심장 소리가 백지 위에 상처로 새겨져 있다. 지쳐 버린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달빛처럼 아련하게, 단칸방으로 숨어들어 아무도 보지 않는 먼산을 바라보는 한 줌 햇살처럼 눈부시게.

  출판사 리뷰

궁핍한 시인의 정치학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1


“돈이 없었다.”
최진영의 소설 「어느 날(feat, 돌멩이)」에서 가장 깊게 울리는 문장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그녀는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강원도로 1박 2일 가족 여행을 떠났다. 당일 점심값, 리조트 숙박비, 다음날 조식 이용권, 케이블카 탑승 티켓 등 여행 비용 대부분을 오빠네가 부담해 그녀는 저녁 식사를 내려고 했다. 부모님과 오빠네 부부와 두 조카와 함께 들어간 곳은 정선의 커다란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한우를 적당히 구워 먹은 뒤 된장찌개와 냉면을 주문해 먹었다. 맥주와 소주와 사이다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신용카드를 내고 몇 개월 할부로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은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일시불로 계산했다. 25만 3천 원이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방금 계산한 것을 취소하고 5개월 할부로 끊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취소가 쉽지 않았다. 식당 주인은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긁어 대며 “기계가 이상하네요, 취소 버튼이 먹질 않아요, 이게 왜 안 되지 이상하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고 줄줄 말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계산이 늦어지자 식당 밖에서 기다리던 엄마가 들어와 뭐가 잘 안 되느냐고 물었다. 오빠도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기 싫어 식당 주인에게 그만두라고 말한 뒤 카드를 돌려받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그녀는 얼마 전에도 비슷한 행동을 했다. 생일 선물로 운동화를 사 드리려고 엄마와 같이 간 나이키 매장에서 10만 원 조금 넘는 운동화 값을 3개월 할부로 요청한 것이다. 옆에 있던 엄마는 돈 10만 원이 없어 그걸 할부로 하느냐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고, 지속되는 곤궁에 질렸다.
그녀는 스무 살 이후 한 번에 5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서른 살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하건 하지 않건 그녀에게는 늘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까운 이들에게 부족한 사정을 보여주기도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싫었다. 최근에는 충치와 위통이 심해 고통을 느꼈지만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돈이 없었다.

2

근심이 깊으면 잇몸부터 붓는다
근심을 끊기 위해
더는 먹지 말자고
동맹파업을 하자는 건가

일이라고 조금씩 주던 그곳에서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
어디 대고 돈 가져올 곳이 없으니
이 가을 하늘도
제 빛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 접어 둔 ‘니체’며 ‘사기’며 ‘장자’ 따위
삶에 걸맞지 않게 두터운 책들은
어느 날부터 구석으로 내몰린 것인지

그뿐이랴, 시를 썼다고, 시집을 냈다고
소설책을 냈다고 보내온 책들도
오랫동안 한 줄을 쓰다듬지 못했다

그 미안하기만 한 책들을 팽개치고
나는 창문을 열고 종일 먼산을 보거나
기우뚱거리며 산책을 하다 돌아와
또다시 밤새 끙끙거린다

묵은 체증 같은 난국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온몸을 비틀며
끊어질 듯한 아랫배를 어르며
그래도 시 한 줄을 머릿속에 끼적이며

잇몸 사이에 걸린 음식 찌꺼기들처럼
이쑤시개로도 빼낼 수 없는
근심을 안고
끙끙거리다 잠든다
―「끙끙거리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일이라고 조금씩 주던 그곳에서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여서 “어디 대고 돈 가져올 곳이 없”다. “가을 하늘도/ 제 빛으로 보이지 않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근심이 깊”어 “잇몸부터 붓”고 있다.
“돈 가져올 곳이 없”는 생활이기에 “‘니체’며 ‘사기’며 ‘장자’ 따위/ 삶에 걸맞지 않게 두터운 책들은/ 어느 날부터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뿐이랴, 시를 썼다고, 시집을 냈다고/ 소설책을 냈다고 보내온 책들도/ 오랫동안 한 줄을 쓰다듬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미안하기만 한 책들을 팽개치고” “창문을 열고 종일 먼산을” 바라본다. “기우뚱거리며 산책을 하다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잇몸 사이에 걸린 음식 찌꺼기들처럼/ 이쑤시개로도 빼낼 수 없는/ 근심을 안고” “또다시 밤새 끙끙거”린다. 사람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속상하고 슬프다.

오늘도 전화를 하지 못했다
일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돈도 못 벌고
내 속이 거북해서
차마, 헛트림 나는 소리
전화기 저편으로 건넬 수 없어서
울음이 사무치는 삶
그걸 저 너머로 던질 수 없어서
어쩌면 말 끄트머리에
어머니 사랑해, 그 한마디 하려다
목이 멜 것 같아서, 그냥 쓰러질 것 같아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며
먼산에 떠다니는 구름만 뻐끔
내 안에 가두는 것이다
―「먼산을 보는 이유」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일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돈도 못 벌고/ 내 속이 거북해서/ 차마, 헛트림 나는 소리/ 전화기 저편으로 건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울음이 사무치는 삶/ 그걸 저 너머로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 끄트머리에/ 어머니 사랑해, 그 한마디 하려다/ 목이 멜 것 같아서, 그냥 쓰러질 것 같아서/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가 만 것이다. 그리고 “먼산에 떠다니는 구름만” 바라본 것이다.
어느덧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일은 힘들어지고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도타운 사랑을 베풀고 자식은 부모를 잘 섬긴다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의 덕목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체 의식이 지배하던 사회가 아니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모에 대한 사랑도 물질이 마련되지 않으면 힘들다. “어머니 사랑해”라는 효행은 관념적인 도덕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을 마련한 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돈”을 벌지 못한 화자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조건 문제이다.

한때 야무진 꿈도 없었을 것 같은
이 허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빚의 힘이다

감감하던 세월이
이젠 겅중겅중 나를 뛰어넘으며
더는 끌고 갈 힘도 없는 나를 잡아끄는 하루
차라리 그 그림자에게 비굴한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또 하루

그동안 먹고 싼 것들은 이미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는데
외상값은 카드 명세서에 빼놓지 않고 박혀 있다
아득한 돈의 숫자들

돈을 빼어다 쓸 일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가망도 없이
하염없이 구원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는 웃음거리나 찾다 누워 버렸는데

엊그제 산에서 본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나도 어느 결에 꽈당 무너지고 싶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 그 언덕에 서서
내가 봐도 선하게 남아 있을 마지막 그 모습

어느 날 다시 길을 간다면
몸 하나 누일 그런 곳이나 살펴봐야겠다
― 「빚으로 빚는 생(生)」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한때 야무진 꿈도 없었을 것 같은/ 이 허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은 빚의 힘이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더는 끌고 갈 힘도 없는 나를 잡아끄는 하루/ 차라리 그 그림자에게 비굴한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또 하루”가 “빚”에 의해 영위된다는 것이다.
화자는 “그동안 먹고 싼 것들은 이미/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는데/ 외상값은 카드 명세서에 빼놓지 않고 박혀 있”는 상황 앞에서 절망한다. “아득한 돈의 숫자들”에 막힌 것이다. 그리하여 “돈을 빼어다 쓸 일도 하지 못”한 화자는 “가망도 없이/ 하염없이 구원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웃음거리나 찾다 누워 버”리고 만다. “엊그제 산에서 본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나도 어느 결에 꽈당 무너지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궁핍한 사람들의 실체인 것이다.

3

「어느 날(feat, 돌멩이)」의 주인공인 그녀는 강원도 정선의 식당에서 일시불로 결제한 25만 3천 원을 5개월 할부로 바꾸려고 애를 쓰다가 김고순 상담원과 겨우 통화가 되었다. 본인 확인을 위해 주소와 주민 번호를 불러달라고 해 천천히 말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너무 조용해 핸드폰 액정을 보니 통화가 종료되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재발신 버튼을 눌렀지만 통화 대기자가 많다는 안내음이 들렸고 곧바로 대기 음악이 이어졌다.
그녀는 핸드폰의 인터넷 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전화를 걸었다. 서나운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물음에 주소와 주민 번호를 말하고 사흘 전 강원도 정선에서 결재한 상황을 전했다. 그런데 핸드폰 액정이 이상해 들여다보니 어느새 통화가 종료되어 있었다.
그녀는 비씨 카드 고객 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민영화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그녀가 주소와 주민 번호를 알리고 용건을 말하자 상담원은 이미 접수 처리된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취소 승인과 할부 내역이 핸드폰으로 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상담원은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도 종료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비씨 카드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배지우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그녀가 주소와 전화번호를 전하고 용건을 말하자 상담원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또 전화가 끊길까 봐 상담원이 결제 내역을 알아보는 동안 이러저러한 말들을 걸었다. 그런데 말을 주고받던 상담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객 센터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처음 통화했던 김고순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상담원은 그동안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며 당장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핸드폰으로 카드 사용 내역을 조회했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김고은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그녀가 주소와 주민 번호를 말하려고 하자 상담원은 다그치듯 말했다. “저희 쪽에서는 분명 처리를 했는데요. 아무리 처리를 해도 고객님 카드 승인 내역에 표시가 안 되는 건 전산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건 기계가 잘못된 거니까요. (중략) 고객님께서 결제하지 않은 것이 결제되었다고 나온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거지만 고객님이 분명히 일시불로 결제하신 것을 뒤늦게 할부로 바꿔 달라고 하시는 거면 어차피 나갈 돈은 똑같은데 그걸 굳이 이런 시국에 매일 전화를 하셔서 요청을 하시면서 고객님은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그러시는데요. (중략) 기록을 보니까 정말 매일 전화를 하셨는데 이게 과연 승인 변경을 요청하시려고 그러시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요. 아무튼 저는 더 이상 고객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의 돌덩이가 지구로 날아들고 있어 43일 뒤에는 대재앙을 겪게 될 상황인데도 소설의 주인공은 카드 결제일을 걱정한다. 25만 3천 원을 일시불로 남겨 둔다면 연체자가 될 것이고, 독촉 전화를 받을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생활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지구의 파괴보다도 연체가 더 걱정되어 어떻게든 일시불 결제를 할부로 바꾸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목숨 붙이고 살아가는 궁핍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식과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4

‘이게 나라냐!’
한 발을 내디디며 곱씹고
또 한 발 내디디며 묻고
그러다 보면 길은 어느새 광화문
대보름날 쥐불놀이도 그렇게 신나지는 않았다
촛불 그림자에 어른거리는 바람의 뒷모습
또 하나의 촛불이 지우고, 그 촛불 그림자
또 다른 촛불이 지우고 지우면서
서로 투명해져서 오롯이 바람만 남아
거대한 불꽃이 되어 버린 광장
깡통 속에서 식식 소리를 내던
대보름 불춤도 그렇게 달아오르진 않았다
모르쇠, 모르쇠 도리질치는 각다귀들의 세상
층층이 쌓인 악의 더께를 뚫고
새봄에는, 새로 맞은 그날에는
함빡 웃음으로 살아보자고
다지고 다진 삶의 각오 같은 자존(自存)
모여서 걸으며, 외치며, 다짐하며, 설레며, 기다리며
오지 않는 바람을 기름 삼아 태우던 그날
비가 흩뿌리고 갔고, 눈발이 흩날리다 갔다
맵짠 겨울바람도 어느새 건물 모퉁이로 사라지고
새봄이 왔다, 발자국 서성이던 자리엔 어느새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고
모처럼 푸른 하늘 벗삼아 살랑인다

그렇게 한 시대를 건너왔다
―「길은 어느새 광화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이게 나라냐!’/ 한 발을 내디디며 곱씹고/ 또 한 발 내디디며 묻”는다. “그러다 보면 길은 어느새 광화문”에 도착한다. 화자는 “대보름날 쥐불놀이도 그렇게 신나지는 않았다”며 자신의 발걸음을 즐거워한다. “촛불 그림자에 어른거리는 바람의 뒷모습/ 또 하나의 촛불이 지우고, 그 촛불 그림자/ 또 다른 촛불이 지우고 지우면서/ 서로 투명해져서 오롯이 바람만 남아/ 거대한 불꽃이 되어 버린 광장”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한다. “깡통 속에서 식식 소리를 내던/ 대보름 불춤도 그렇게 달아오르진 않았다”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화자는 “모르쇠, 모르쇠 도리질치는 각다귀들의 세상/ 층층이 쌓인 악의 더께를 뚫고/ 새봄에는, 새로 맞은 그날에는/ 함빡 웃음으로 살아보자고” 노래한다. “모여서 걸으며, 외치며, 다짐하며, 설레며, 기다리며/ 오지 않는 바람을 기름 삼아 태”우는 것이다. 그 결과 “비가 흩뿌리고 갔고, 눈발이 흩날리다 갔다”. “맵짠 겨울바람도 어느새 건물 모퉁이로 사라지고/ 새봄이 왔다”. 화자는 “그렇게 한 시대를 건너”온 것이다.
화자가 건너온 시대란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젖고, 국가 기관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고, 청와대가 예술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검열했다. 한국사의 왜곡으로 역사 전개가 되돌려졌고,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으로 진보 정치가 함몰되었다. 권력의 시녀로 추락한 언론과 검찰이 진실을 왜곡시켰고, 1천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노동법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민중들이 피 흘리며 이룬 민주주의는 위협받았다. 양극화의 심화로 말미암아 궁핍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화자는 그와 같은 상황을 간파하고 행동으로 나섰다. “‘이게 나라냐!’”며 광장으로 나간 것이다.
화자는 광장에 모여 축제의 장을 마련했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연대를 형성했고, 비조직적이면서도 조직적이고 일시적이면서도 지속적이고 우연적이면서도 함께하는 운명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감정적이면서도 불안정했지만 제도적인 것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광장의 사람들에게는 사회적인 지위며 신분 따위가 문제되지 않았다. 광장 밖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주체성을 지켰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 결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감동하고 동화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을 바다에 버린/ 끔찍한 나라에 산” “치욕(恥辱)”을 씻어냈고, “처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광화문 농성장 천막 모퉁이에서/ 맥없이 쏟아지는 눈물”(「어느 날 그 거리에」)을 닦았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들을 다시 봐야 봄이다”(「그들이 돌아와야 봄이다」)라고 외쳤다.

수없이 묻는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또 묻는다
침묵으로 묻고 침묵으로 대답하며
누구도 알 수 없는 답을 찾아
길을 나섰다, 개새끼들
―「개새끼들」 부분

화자가 위와 같은 마음으로 광장에 나가는 것은 정치적인 행동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펼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가 “나라는 왜 그 모양인지/ 대통령은 또 왜 그 모양인지/ 정부 관리란 것들, 권력을 가진 것들, 돈 가진 것들, 법을 주무르는 것들/ 아, 개새끼”(「길에서 보낸 그날들」)라고 비난하는 것은 새롭게 들린다.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을 가로막는 세력에 맞서는 당당한 음성으로, 두려움을 희망으로 극복하는 축제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궁핍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세력은 먼저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의 요구를 막기 위해 무수한 법을 만들고 여론을 조장하는 등 전략을 주도면밀하게 짠다.
그러므로 개인이 연대해야만 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거나 자신의 이익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회의감을 극복하고 ‘노동해방 쟁취하자!’라거나 ‘단결투쟁 승리하자!’라거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를 광장에 모여 외쳐야 한다. 그것이 설령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공상적인 유토피아의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희망이 된다. 자본주의 업체의 돈 냄새가 풍기는 행사가 아니라 궁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살아 있음을 전율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힘이 사회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이하
1959년 전북 진안 출생, 1989년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으며, 공동 시집 『촛불은 시작이다』,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철탑에 집을 지은 새』, 『꽃으로 돌아오라』, 『길은 어느새 광화문』, 『도보다리에서 울다 웃다』 등이 있다.누구든 시인 김이하를 만나려거든 홍제천변을 거닐어 보시라. 광화문 광장을 누비거나 후미진 인사동 골목을 걷다보면, 카메라를 맨 어깨가 살짝 기운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콧수염을 길러 잰틀해 보이는 그를 만나거든 막걸리라도 한 사발 권하시라. 김이하는 가난하지만 늘 낮은 자리에서 약자의 편에 서길 두려워 않는 시인이다.

  목차

010 _ 빈집
011 _ 벚꽃 진 뒤
012 _ 먼산을 보는 이유
013 _ 붉은 봄
014 _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015 _ 홍제천 1
017 _ 미생생 화장품 가게
018 _ 기타는 울고, 참새는 허둥거리고
019 _ 결별이 떠오른 저녁
020 _ 화장(化粧)하는 숲
022 _ 잃어버린 별
023 _ 흐린 저녁
024 _ 빚으로 빚는 생(生)
026 _ 산딸나무 누운 길
028 _ 마른 단풍
029 _ 통곡 한 보따리
031 _ 앞산을 보다
033 _ 추세(秋勢)
034 _ 그냥, 그래
036 _ 집에 박힌 날
038 _ 늦가을 그림자
040 _ 갈라빈카 무늬 수막새를 기림
042 _ 끙끙거리다
044 _ 따뜻한 손
045 _ 별개(別個)
046 _ 안부를 묻는다
048 _ 불빛 아래 둥글게
050 _ 마른 눈물
051 _ 달의 숨바꼭질
053 _ 케이티엑스에 몸을 담고 오는 길
055 _어느 화석(化石)의 기억
056 _ 빈집은 불안하다
058 _ 사과와 양파
060 _ 사라진 계절
062 _ 가장 얇은 가슴
064 _ 어느 날 그 거리에
066 _ 그들이 돌아와야 봄이다
068 _ 소란(騷亂)
070 _ 길은 어느새 광화문
072 _ 개새끼들
074 _ 울컥
076 _ 어찌할 수 없는 한순간 6
078 _ 스투파, 스투파, 스투파
080 _ 길에서 보낸 그날들
082 _ 라즈돌노예역(驛)에서
083 _ 추천의 글 _ 궁핍한 시인의 정치학
092 _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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