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황금알 시인선 207권. 진솔교정의 시품을 지닌 김석인의 첫 시집. 능란하거나 매끄럽지는 않아도 정통 시조의 맥을 이어온 백수 문하의 후예답게 단아하고 정제된 단시조 명품들로 우리 마음을 오래 붙든다.
출판사 리뷰
진솔교정의 시품을 지닌 김석인은 첫시집! 그는 진솔교정이되 중심에서 멀다고 굼뜨지 않고 금강의 안목을 갖추어가는 희망의 시인이 쓴 시집 『범종처럼』! 김석인 시인은 능란하거나 매끄럽지는 않아도 정통 시조의 맥을 이어온 백수 문하의 후예답게 단아하고 정제된 단시조 명품들로 우리 마음을 오래 붙든다.
아픈 발원이거나 해원굿이거나 김석인의 인상과 그의 작품이 번져내는 시품은 진솔교정眞率矯正이다. 김석인은 ‘본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내맡기고 인위적 조탁이나 수식을 하지 않는다任性自然 節去雕飾’는 점에서 그렇다. 김석인은 교사로서 가장으로서 비뚤어지거나 구부러지지 않도록 가정과 사회를 바르게 갖추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세련되지 않은 거친 구성과 표현이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격식을 벗어던진 자연自然이다. 어떤 인위人爲도 가까이 하지 않는 김천 선비다운 면모.
내 안의 너를 찾아 발길이 닿은 이곳 쌓다 만 돌담 위에 실금이 그어져 있다 막다른 골목 앞에서 쏟아내던 날숨처럼
얼고 녹은 긴 시간 예각을 버렸는지 서로의 어깨를 걸고 스크럼을 짜고 있다 속내평 다 내려놓고 둔각으로 엉긴 돌
너에게 가는 길은 껍데기를 버리는 일 바람과 물을 불러 몸통을 깎아낸다 돌 속에 숨어있는 자취 찾아내는 석공처럼
모난 돌이라고 꿈마저 모났을까 장삼빛 육각기둥 무뚝뚝한 등뼈가 벼룻길 비틀거리며 겨울하늘 이고 간다
-「주상절리」
제주 중문에서 주상절리柱狀節理를 만났다. 켜켜이 늘어선 암석 기둥. 그 비경境은 용암이 흘러나오다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 작용의 결과라 한다. 어떤 형용形容으로 그 비경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이만하면 되었다. 중문 “장삼빛 육각기둥” 주상절리가 얼비친다. “모난 돌이라고 꿈마저 모났을까” “실금”이라는 “예각”이라는 “모난” “껍데기를 버”린 “무뚝뚝한 등뼈가 벼룻길 비틀거리며 겨울 하늘 이고 간다”니! 시인의 자화상 아닌가. 정신을 포착하기 위해 형상을 포착한다. 시는 외형 묘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존재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무뚝뚝한 등뼈가 벼룻길 비틀거리며 겨울 하늘 이고 간다는 언표言表. 누가 하늘을 이고 가는가. 시인은 마침내 이 세상 바루어갈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일까. 진솔교정. 말로는 말 다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은은히 발묵潑墨으로 지나온 역정歷程이, 나아갈 행로가, 한 사람의 자화상이 얼비치지 않는가.
1. 정석
휘어진 강물 위에 질박한 삶을 놓아 초심으로 가는 길은 징검돌 내리는 일
행초서 옷깃 여미고 해서체로 우뚝 서다
2. 약천
온몸을 내던져서 향을 담는 찻물처럼 가뭄에 긋지 않는 돌샘이 되고 싶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맥박으로 뛰면서
3. 다조
투박한 찻잔에는 깊어가는 귀가 있어 등 굽은 산바람의 잔기침 듣고 있다
기다림 진하게 우려 달을 불러 앉히고
4. 연지석가산
마음도 흔들리면 기댈 곳이 필요한가 하루에 한 마디씩 돌로 빚은 그 세월
물속에 쏟아 부으면 푸른 섬은 깃들까
5. 초당
굴릴수록 둥글어지는 소리가 되고 싶어 산과 강 접점에서 불러 내린 만 평 허공
청태(靑苔)를 두르고 섰다, 득음한 범종처럼
-「천명, 다산의 하늘」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다산4경을 앞에 놓고 다산초당을 끝에 배치한 5수 연시조. 18년의 긴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지냈다는 다산초당. 초당 뒤편으로 작은 약수터를 만들어놓고 솔방울을 모아 평편한 바윗돌 다조 위에 불을 지펴 찻물을 끓였다는 다산. “마음도 흔들리면 기댈 곳이 필요한가” 바닷가에서 얻은 돌을 모아 작은 연못에 두르고 가운데 부처형상을 모셨으니 연지석가산이다. 돌부처 앞에 합장했다면 다산의 발원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은 왜 「천명, 다산의 하늘」에서 “정석”을 맨 앞에 배치했을까. 우리가 아는 다산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로 대표되는 방대한 저서를 남기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사상가이자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개혁사상가이다. 다산초당 수려한 풍광에 이르러 진솔교정의 시품을 지닌 시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정석. “옷깃 여미고 해서체로 우뚝” 새겨놓은 정석丁石. 정석은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다산 그가 살아온 이력과 심성의 표상이다. 진솔교정 그 시품을 지닌 시인이 먼저 알아보는 생의 지표指標. 살아갈수록 “굴릴수록 둥글어지는 소리가 되고 싶”다는 시인. 정석은 천명天命이다. 다산의 하늘아래 시인이 감득한 운명, 하늘의 명령이다. 인생 “만평 허공” 앞에 득음한 범종처럼 둥글어지는 소리처럼 정석定石으로 살아야 할 진솔교정의 시품이 감득한 천명.
등단작에서 보듯이 김석인은 백수의 시루를 통과하고 나서 거친 듯 하지만 송두리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알몸의 경계를 내보이기 위해 허기와 고독을 예지삼아 부단히 정진한다. 때로 “묵상하는 장독”과 같은 참신하다는 수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그 빛나는 상상력이라든가 만개한 벚꽃을 “특수절도죄”로 “포토라인”에 세운다거나 “내사 먼저 절정”에 이르는 기발한 남심을 보여주는가 하면 사설시조에서 비판적 허튼소리도 내보이고 혼합연형시조에서는 말뚝이의 거침없는 요설도 내보인다. 이 거침없는 호흡은 의미 있는 허튼소리이니 “못갖춘마디”로 대변되는 삼포세대이거나 대물림되는 을들을 위한 해원굿이다. 김석인은 능란하거나 매끄럽지는 않아도 정통 시조의 맥을 이어온 백수 문하의 후예답게 단아하고 정제된 단시조 명품들로 우리 마음을 오래 붙든다. 그러나 김석인의 놀라운 도약은 연시조에 있다. 「주상절리」이거나 「천명, 다산의 하늘」이거나 「지리산 화엄경」이거나 그 형상은 다만 외형묘사에 머물지 않고 “득음한 범종”처럼 진솔교정의 올곧은 그의 시품과 정신을 표상한다. 득음한 범종처럼 “둥글어지는 소리”처럼 그가 감득한 천명은 무엇인가. 이 첫 시조집 말미에는 김천시 승격 70주년에 부치는 축시 「살어리 살어리랏다」가 있다. 묵상하는 장독처럼 득음한 범종처럼 진솔교정의 시품을 지닌 그 앞에 김천의 상징이라는 훈장勳章이자 등짐이 있다.
금강의 안목이고자 고개 아프도록 올려다보았으되, 개구즉착 아닌가. 이렇다 저렇다 하였으나 과연 그러한지. 누군가 자세히 읽고 공감하기를 축원한다. 일찍 출발했으나 종종거리며 가는 이도 있고 늦게 출발했으나 성큼성큼 장한 물결을 이루며 가는 이도 있다. 진솔교정의 시품을 지닌 김석인은 진솔교정이되 중심에서 멀다고 굼뜨지 않고 금강의 안목을 갖추어가는 희망의 시인이다.
1부 날빛이 하도 고와
겨울나기
고독이 눈을 떠야 내가 나를 볼 수 있지
빈 하늘 등에 지고 바람 앞에 서게 되지
그제사 내가 보인다
더덕더덕 붙은 군살
주릴 만큼 주려봐야 창자가 맑아지고
여윌 만큼 여위어야 칼바람도 비켜 가지
석 삼동 허기로 채웠다
마음속에 각을 세워
봄으로 가는 길은 속살 꺼내 보이는 일
겹겹이 쌓인 각질 한 땀 한 땀 걷어 내면
홍매화 등불 내건다
씨알 같은 꿈을 담고
민들레 금당金堂
햇살만 바라봐도 모가지가 뜨거워진다
잔설 지워버리고 깨금발로 일어선 봄
응달진 지상의 하루
나비로 날아간다
금당이 떠난 자리 지켜온 숨결 같은
그 모습 떠올려서 다시 금당 문을 여는
이 세상 허기를 지워
울컥, 피어난 꽃
누이야
마흔 줄 내 누이는 눈물 실린 어머니 상像 선잠 깬 어느 봄날 등불 켜든 목련처럼 사남매 막내로 태어나 꽃이 되고 싶었을까
꼭 한번 가고 싶은 캠퍼스에 꽃이 필 때 열여섯 내 누이는 방직기에 실을 걸고 밤하늘 알알이 맺힌 별무리를 쫓았었지
손톱에 물들이던 봉선화 어린 시절 내 해 아닌 남의 것은 넘보지 않았으니 서럽지 않았겠나, 왜 혼자 도는 세상이
반만 뜬 눈동자에 어려 오는 고향마을 열릴 듯 닫힌 입술 미소도 흘렀으리 누이야 네 모습 보러 자주 오나, 엄마는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석인
1960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거창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김천중·고등학교에서 33년 동안 교사로 복무하다가 2020년 명예퇴직하였다. 한국문인협회 김천지회 사무국장과 백수문학제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대구시조시인협회·오늘의시조시인회의·사단법인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4회 오늘의시조시인상을 수상했다.
목차
1부 날빛이 하도 고와
겨울나기·12
민들레 금당金堂·13
누이야·14
직지사 벚꽃·15
배흘림기둥에 기대어·16
별·17
백목련·18
4월·19
벚꽃, 포토라인에 서다·20
교사 유선철·21
다래끼·22
모란·23
중2·24
미늘의 아침·25
상사화·26
나팔꽃 궁사·27
2부 초록을 달이다 보면
늑골을 기억하다·30
별똥별·31
붉은 고요 혹은 수다·32
옥잠화·33
주먹밥·34
한글, 비상하다·35
종이컵 발문跋文·36
??라기·37
아내에게·38
능소화 에세이·39
직지사 배롱나무·40
무창포 세레나데·41
감, 안거에 들다·42
단청 2·43
섭지코지 돌꽃·44
밤마리·46
3부 타면 탈수록
바람의 풍경·48
가을 영암사지·49
사랑니·50
청송 꿀사과의 내력·51
늦가을 창덕궁·52
이방인 감염되다·53
곶감·54
맛에 대한 평설·55
독도·56
보름달 독서법·57
가슴의 현상학·58
이등변 부부·59
규화목·60
응급실 소묘·61
외규장각 의궤·62
삶 한 벌·63
4부 깊을 만큼 깊어져야
바람의 필법·66
피타고라스의 겨울·67
이명耳鳴·68
겨울 정이품송·69
하현달·70
돌실나이·71
면도·72
먼 길·73
천명, 다산의 하늘·74
달항아리·76
풍경·77
주상절리·78
간경화 혹은 뇌경색·79
탈춤·80
지리산 화엄경·82
살어리 살어리랏다·84
■ 해설 |홍성란
묵상하는 장독처럼 득음한 범종처럼·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