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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그늘
거짓 기록에서 찾은 6·25전쟁 잔혹사
인권평화연구소 | 부모님 | 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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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가 겪은 6·25전쟁은 자기 측 군대에 의해 국민들이 조준 학살당한 사례가 훨씬 더 많은 전쟁이었다. 이남은 물론 이북에서도 전쟁과 전혀 무관한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크게 피해를 당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어쩌면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한 뒤 2년 동안만큼은 전쟁을 치른 우리 민족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온 청년들조차 겪지 않았어도 될 죽음을 맞았다. 과연 이를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추출된 사건들은 비록 전투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민간인학살사건이거나 피란민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사건들이다. 희생자들 모두를 "적"이라며 마치 전쟁 중 전투 행위로 합리화했지만 민간인학살이 벌어지던 같은 기간 동안 비슷한 장소에서 벌어졌다. 만약 그때 그 장소에 인민군이나 무장 빨치산이 없었다면 사망자들의 신분은 이동하던 피란민들이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들, 체포를 피해 도망다니던 피란민들이었을 것이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출판사 리뷰

책의 내용

전쟁이 시작되자 거짓이 시작되었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전투가 있었는지도 정리되지 않은, 적이 누군지도 불분명하면서도 전투가 있었다는 일방적 주장만 있는 사례들이 있었다.

해군의 대한해협 전투는 공격한 인민군 수송선의 침몰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으며 또 침몰의 흔적도 찾지 못했으면서도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했다. 수송선에 인민군이 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강경경찰서의 전투도 미심적다. 적군에게 포위당해 전멸당했다지만 포위당하게 된 경위에는 육군본부 특공대가 관여되어 있어 의문이었다.
곡성의 사례 역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승리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피란민이 공격당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하지만 피란민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명백하게 피란민을 공격했거나 공격 대상에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는 전투, 게릴라 또는 인민군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전투가 포함되었다.

피란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공격한 사례는 1개 연대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는 동락리 전투나 화령장 전투가 대표적이다. 공격을 당한 무리들은 민간인이 끌고 가던 우마차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인민군의 보급품을 수송하던 중이었을지라도 민간인이었음은 변함이 없다. 공격의 이유도 배낭을 멨다든가 모자를 썼다든가 이북 사투리를 썼다는 것이어서 피란민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를 근거로 인민군이라고 여기고 공격했다면 심각한 전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동 노근리 사건의 경우도 미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인민군을 이용하여 피란민 학살 사실을 합리화하고 은폐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아니었을까?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은 시기에 발생했으므로 국민보도연맹사건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전투도 있었다.

공주 유구읍 “인민군 환영대회”를 공격한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전투는 인민군이 들어오기 전날에 발생했는데 유구에서 이 전투가 발생할 당시 그 북쪽인 예산과 남쪽인 공주 살구쟁이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후방에 해당하는 유구에 이미 인민군이 들어왔지만 전방에 해당하는 예산에는 들어오지 않아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는 모순된 결과를 낳는다. 유구는 예산에서 공주를 향하는 도로 중간에 있었고 전투가 발생하기 전날 이미 선발 국군은 유구를 지나 예산에 있었다.

상륙작전 후 학살당한 민간인들을 “적”이라고 기록하다

해안 지역의 주민들을 역시 “적”으로 여겼던 상륙작전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공식 전쟁사는 인민군이 없는 곳이었음에도 인민군을 공격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벌어진 덕적군도와 영흥도에서 벌어진 군사작전은 그 지역에 주둔한 인민군이 없었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주민들을 학살한 후 “적”이라고 기록했다.
인간 사냥과 다를 바 없었던 상륙과 수색 작전은 서해안 뿐 아니라 통영과 완도 등 남해안에서도 반복되었으며 월미도에서도 인천상륙작전 직전 미 함재기가 민간인 거주 지역만 폭격한 사실에서도 이런 수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의 점령지 주민들도 “적”

수복 시기에는 민간인들을 공격한 사실이 명백한데도 인민군과 전투했다고 우기는 사례들도 있었다.

수복 시기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는 것을 중단하고 속리산 주변인 경북 상주, 충북 보은과 괴산, 청주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민간인학살로 드러났다.
수복하면서 벌어진 전투 중 많은 경우 역시 민간인 피해로 의심된다. 이러한 사례는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만 정리할 수 있는데, 충청과 영호남 지역에서는 대부분 토벌작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수복 지역의 “잔적”도 민간인이었다

수복이 되었음에도 미수복지구라면서 민간인들을 공격한 사례도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다.

토벌작전 피해는 치안을 확보한 국군 11사단 등이 죽음을 피해 도망하던 피란민을 빨치산이라며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전의 결과로 보아 이들의 진짜 목표는 빨치산이 아니라 주민들이었음이 분명했다.

육군은 주로 태백산과 지리산에서 토벌작전을 벌였으며, 해군과 해병대는 목포에서 해군의 임무를 인수하여 주로 영암과 나주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경찰은 각 지역의 경찰서 산하에 경찰토벌대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토벌작전을 벌였으므로 깊은 산이 있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난다. 이는 수복의 과정과 이후에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을 마치 적을 공격한 것으로 합리화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이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이북의 역사학자 허종호는 “이러한 야수적 방법으로 학살된 인민의 수는 공화국 북반부의 34개의 시, 군들에서만도 무려 17만 2,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것이 미제가 강점한 북반부의 일부 지역에서 불과 40여 일 동안에 감행한 만행이었다.”라고 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이래 후퇴하던 12월 초까지 벌어진 피해로서 이후 폭격 등에 의한 인명 피해(부상자 포함)는 268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 1군단 24사단 19연대가 진입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의 피해자는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3만 5천 명이 넘는다. 당시 신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피해였다.

이는 모두 전쟁 범죄 아니면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

전쟁 초기 전선이 이동하는 상황에서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신기철
(재)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 2004년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저서로 『짧은 전쟁 긴 아픔』(2020), 『한국전쟁과 화순』(2020),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2020),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2018),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2017),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2016), 『멈춘시간1950』(2016), 『전쟁범죄』(2015), 『국민은 적이 아니다』(2014), 『진실, 국가 범죄를 말하다』(2011)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이것이 전쟁이었을까

제1장 전쟁이 시작되다 거짓이 시작되다

해군이 이루어 냈다는 최초의 승전이 사실일까? _1950년 6월 25일 대한해협
이북 사투리를 쓰면 적이다 _1950년 6월 27일 파주읍 봉암리
아침 8시 45분에도 잠 깨지 않은 적 _1950년 6월 28일 홍천 복골

제2장 피란길에서 벌어진 전투 I _경기, 충북

경비도 없는 인민군 보급부대 _1950년 7월 2일 이천 곤지암리
아군 1명 부상에 적 1천 명을 사살한 신의 전투 _1950년 7월 4일 충주 동락마을
배낭 메고 모자 쓰면 적 _1950년 7월 5일 음성 감우재
전투로 달성했다는 “소기의 목적”의 진실 _1950년 7월 8일 단양 매포
민간 피란지로 이동한 수도사단과 피란민들의 죽음 _1950년 7월 14일 쌍수리

제3장 적군 없는 전투 _충남

인민군 환영대회에 인민군이 없었다? _1950년 7월 11일 공주 유구
경찰과 육본 특공대에게 무슨 일이 _1950년 7월 17일 강경
경찰 후퇴 전 사살당했다는 인민군 선발부대 _1950년 7월 17일 서천 장항읍

제4장 피란길에서 벌어진 전투 II _경북, 충북

우마차를 공격한 1차 화령장 전투 _1950년 7월 17일 상주 화서면 상곡리
2차 화령장 전투도 우마차를 공격했다 _1950년 7월 19일 상주 화남면 동관리
식별할 수 없는 무리를 공격한 3차 화령장 전투 _1950년 7월 21일 동관리
전멸시켰다는 적의 소속을 알 수 없다? _1950년 7월 21일 문경 농암리
피란민 공격의 누명을 인민군에게 씌운 미군 _1950년 7월 26일 영동 노근리

제5장 누굴 공격한 걸까?

빨치산인가 피란민인가 국민보도연맹원인가 _1950년 7월 13일 영천 도유리
칼과 도끼로 무장했다는 인민군 유격대 _1950년 7월 17일 포항 죽장면
전투의 성과가 된 민간인 납치 _1950년 7월 20일 영덕 옥산리
피란민을 향해 산탄을 날린 국군 장갑차 _1950년 7월 27일 영덕 황장재
경계도 안하고 약탈만 집중한 공비 _1950년 7월 28일 청송 이전리
주민들까지 공격하다 _1950년 7월 28일 상주 경돌마을
모호함 속에 들어있는 전쟁 미화 의도 _1950년 7월 29일 곡성 압록리

제6장 군인과 민간인이 뒤섞인 낙동강 전선

경계도 하지 않고 몰려다니는 무리를 공격하다 _1950년 7월 31일 안동 상리리
주민 가운데에서 첩자를 발견하다니 _1950년 8월 2일 마산 고사리
마을까지 폭격하다 _1950년 8월 3일 상주 낙동리
열두 살 어린이가 인민군이라니 _1950년 8월 3일 창녕 월곡재실
700명의 적을 섬멸했다는데 _1950년 8월 7일 안동 명진리
적을 격파했다는 날 피란민들이 몰살당하다 _1950년 8월 11일 마산 곡안리
전차 옆 민간인 복장 무리를 공격하다 _1950년 9월 2일 창녕 영산면
국군 지휘소에 침투한 인민군 특공대의 정체 _1950년 9월 12일 대구 매골
인민군 패잔병을 격퇴하다 _1950년 9월 16일 영천 고경면 창상리 등

제7장 “적” 없는 상륙작전

701함, 인민군 없는 섬들을 공격하다 _1950년 8월 10일 덕적도
이(李) 작전의 시작 _1950년 8월 18일 덕적도
해군 313정의 대이작도 공격 _1950년 8월 20일 이작도
해군 육전대의 영흥 공격과 이(李) 작전의 끝 _1950년 8월 20일 영흥도
민간인 거주지만 폭격한 전투 _1950년 9월 10일 월미도
적군 없는 전투가 남해안에서도 벌어지다 _1950년 8월~9월 완도
1일 점령지 주민들이 색출할 적이었다 _1950년 8월 17일 통영
저항하는 인민군이 있었을까? _1950년 9월, 10월 남해, 여수, 목포, 고흥

제8장 적으로 취급된 국민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고 사살하다 _1950년 9월 16일 인천
공격한 인민군보다 더 많이 체포당한 “적” _1950년 9월 21일 김포
선언에 그친 수복 _1950년 9월 21일 강화
국군 1사단 속리산 토벌작전 학살 1 _1950년 9월 25일 상주
국군 1사단 속리산 토벌작전 학살 2 _1950년 9월 29일 청주 괴산 보은
이미 수복된 곳에서 누구와 다시 전투를 벌였을까? _1950년 10월 2일 양평

제9장 제거당하는 잔적은 누구

계룡산에 숨어 지내는 무리를 공격하다 _1950년 10월 8일 공주경찰서
비무장 1,500여 명의 인민군 유격대 _1950년 10월 13일 영암 금정면 용흥리
피신하던 무리들이 해병대 매복조에 걸리다 _1950년 10월 영암 국사봉 등
피란민인가 빨치산인가 _1950년 10월 18일 장흥 유치 신원리
한때 전차로 무장했던 빨치산이 곡괭이로? _1950년 11월 17일 고창 흥덕리
없는 공비도 만들어내는 사찰공작대 _1950년 12월 11일 김천
경찰 토벌작전의 대상은 주민들이었다 _1951년 1월 20일 영광 구수산
아군 피해 없는 해병대의 전투가 계속되다 _1951년 1월 29일 안동 추목리
저항하지 않고 도망만 다녔다는 인민군 유격대 _1951년 2월 2일 의성 정자리
마을 주민들을 사살하고 “적”이라 하다 _1951년 2월 3일 안동 백자리
인민군 퇴각 후 벌어진 전투 _1951년 2월 10일 인천
민간 치안대 출신 피란민을 전투에 동원하다 _1951년 4월 교동 백령
기획된 민간인학살이 토벌작전이라니 _1951년 3월 14일 임실 청웅면 폐금광
백 야전사령부의 지리산 토벌작전 _1951년 12월 3일 구례
이북지역에서 보는 수복과 점령의 차이 _1950년 10~12월 신천 등

맺음말, 전쟁 범죄를 넘어 평화와 분단 극복으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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