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위원이 『해국도지』를 저술하던 시기, 중국 아니 아시아와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질서로 요동치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의 진출로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변화하면서 세계의 판도가 바뀐 결과였다. 대항해 시대의 막대한 부와 산업혁명은 서방 국가에 강력한 힘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그 부와 힘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였다.
출판사 리뷰
대륙에서 해양으로, 중심에서 여럿 중 하나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저술하던 시기, 중국 아니 아시아와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질서로 요동치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의 진출로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변화하면서 세계의 판도가 바뀐 결과였다. 대항해 시대의 막대한 부와 산업혁명은 서방 국가에 강력한 힘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그 부와 힘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였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어 오던 중국과, 중국이 세계의 질서라고 믿어 오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세계는 그렇게 몰락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서방 제국주의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동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서의 변화에 지식계는 혼란에 빠졌다. “과연 갑자기 다가온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당대 지식인이라면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질문이었다. 위원 역시 지식인으로서 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해국도지』였던 셈이다. 위원은 임칙서로부터 『사주지』와 서양 관련 자료들을 전해 받고 『해국도지』를 편찬하였다. 『해국도지』는 당대 지식인들을 그때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위원은 『해국도지』를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을 공격하고(以夷攻夷),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과 화친하며(以夷款夷),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爲師夷長技)
서양을 제압하기 위해서 저술한 것이다(以制夷而作).”
답은 언제나 이미 준비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者, 百戰不殆).
상대는 알지 못하고 자신은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이는 동양 사회에서는 아주 익숙한 말이다. 『순자』는 동양에서 전법의 경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상대를 알” 수 없었다. 중화사상에 갇혀 자신의 병폐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자신을 알” 수조차 없었다. 반면 서양은 선교사와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위원의 답은 어떻게 보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양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서양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서양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중국은 결국 서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처법을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더 답해야 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왜 “필리핀과 자와는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지만, 한쪽(필리핀과 자와)은 병합되고 한쪽(일본)은 강성함을 자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위원은 단순 서양에 관해서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에 관해서도 서술하였다. 결국, 답은 언제나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자취를 살펴야 한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樂彼之園)
박달나무 심어져 있고(爰有樹檀)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其下維穀).
다른 산의 돌이라도(他山之石)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可以攻玉).”
이 시는 『시경』 「소아·학명」의 부분이다. 이 시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겠지만, 이 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성어를 남겼다.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이는 남의 하찮은 행동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또는 군자도 소인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구절이 도대체 『해국도지』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 타산지석이야말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집필한 정신 중 하나였다.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중국에게, 중국은 군자요, 주변국은 소인과도 같았다. 그런데, 위원은 (물론 중국이 볼 때) 그 ‘소인에 불과한’ 주변국으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위원은 먼저 동남양의 국가들, 대체적으로 현재 동남아시아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관해서 논하기 시작한다. 왜 위원은 하필 동남양의 국가들에 대해서 먼저 논하기 시작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서양을 알고 나를 알아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서양의 국가들이 아닌가? 해국도지 4권의 「동남양서설」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이 동쪽으로 상선을 몰고 온 것은 왜인가? 연안에 이르면 연안을 빼앗고,
섬을 만나면 그 섬을 점령하여 도시와 항구를 만들고 군대를 배치하여 방비하니,
무릇 동남아시아의 중요 항구가 모두 유럽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 베트남, 태국, 미얀마, 일본은 서양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은, 즉 해방 사실이 있어 이 편에 기록한다.
반면 조선과 류큐는 해방 사실과 무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즉, 위원은 중국에도 서양 제국주의의 마수가 손길을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서양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였으며,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동남양의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통해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이 있지만, 위원이 볼 때 당시 중국의 상황에는 그보다 더 가까운 거울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옛날에 갈리아(Gallia)라고 불렸으며 북쪽으로는 단지 항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 보고 있고 네덜란드와도 가깝다. 동쪽으로는 독일·스위스·이탈리아, 남쪽으로는 바다와 피레네산맥(Pyr?n?es Mountains),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다. 사방이 산 아니면 바다로, 형세는 험준하다.
처음에는 로마에 예속되어 그 문자를 배우면서 가톨릭을 믿었다. 후에 게르만족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했지만, 로마가 도와줄 수 없어 이때부터 프랑스는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고 파리(Paris)에 도성을 세웠다. 샤를마뉴대제(Charlemagne) 사후에 여러 아들이 왕위를 다투어 여러 나라로 나누어졌다. 위그 카페(Hugues Capet)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하나로 합쳐져 지금까지 유럽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다만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대대로 전쟁을 벌였다.
-《해국도지》 권41, <프랑스 총설 상>-
살펴보건대, 프랑스는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역사가 가장 길다.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기초를 열어 지금까지 이미 천여 년에 이른다. 중간에 비록 여러 가지 변고가 있었지만 대대로 즉위한 자는 모두 종친으로 다른 종족이 섞이지 않았으며 여왕이 즉위한 적도 없다. 다른 나라에서 바둑 두듯이 군주를 서로 주고받은 것에 비하면 실제로 차이가 있다. 입법은 준엄하고 현명한 군주가 연이어 예닐곱 명이나 나왔으니, 위태로워도 망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유럽에서 무용을 떨친 나라 중에서 프랑스가 최고이다. 앞다투어 강자로 군림해 남의 밑에 거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모욕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보복을 맹세한다. 민간에서는 기개가 있어 싸움을 즐기니, 「소융(小戎)」·「사철(駟鐵)」의 기풍이 있다. 전쟁을 함에 여러 나라가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정의에 기대어 의견을 낸다. 그래서 천여 년 동안 모욕과 난리를 번갈아 겪으면서도 서방을 호시탐탐 노리며 일찍이 국세가 꺾인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이 백전백승하다가 결국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어도 병사들은 무기를 거두지 않고 자결했는데, 이는 또한 무용을 더럽히는 자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해국도지》 권42, <프랑스 총설 하>-
이탈리아는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다. 서북쪽의 한쪽 귀퉁이가 알프스산맥(Alps Mountains)과 접해 있고 나머지 삼면은 모두 지중해에 잇닿아 있다. 사방이 다 적이라 난세에는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땅은 상고 시대에는 나라 전체를 관할하는 주인이 없이 각각의 군주들이 한 지역씩을 맡아 다스렸다. 교황령(States of the Church)을 계승한 에클레시아(Ecclesia) 왕 때 처음으로 각 주를 합병하여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 로마라고 불렀다. 나라가 한창 강성할 때 배를 타고 나가 다른 나라를 쳐서 굴복시켰으나, 그 뒤로 국력이 쇠약해져 9개국으로 분열되었다. 교황령·토스카나 대공국(Granducato di Toscana)·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나폴리 왕국(Regno di Napoli)·산마리노 공화국(Repubblica di San Marino)·모데나 레조 공국(Ducato di Modena e Reggio)·루카 공국(Ducato di Lucca)·파르마 피아첸차 공국(Ducato di Parma e Piacenza)·모나코 공국(Principaut? de Monaco)이 그것으로, 각 공국이 자체적으로 다스리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해국도지》 권43, <이탈리아 총설>-
작가 소개
지은이 : 위원
청대 정치가, 계몽사상가이다. 호남성(湖南省) 소양(邵陽) 사람으로 도광 2년(1822)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1830년 임칙서 등과 함께 선남시사(宣南詩社)를 결성해서 황작자(黃爵滋), 공자진(龔自珍) 등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과 교류했다. 1840년 임칙서의 추천으로 양절총독 유겸(裕謙)의 막료로 들어가면서 서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임칙서에게서 『사주지』를 비롯해 서양 관련 자료를 전해 받고 『해국도지』를 편찬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공양고미(公羊古微)』, 『춘추번로주(春秋繁露注)』, 『성무기(聖武記)』 등이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일러두기
해국도지 원서
해국도지 후서
해국도지 권41
대서양
프랑스 총설 상
프랑스 연혁
해국도지 권42
대서양
프랑스 총설 하
해국도지 권43
대서양
이탈리아 총설
이탈리아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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