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 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6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간을 꼽으라면 1970년대라고 할 것이다. 1970년대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그 두 얼굴 가운데 ‘전태일’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고, ‘경부고속도로’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한 참혹한 노동 실태의 현장이었던 서울 평화시장은 “공간적으로 당시 민중들의 삶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희생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형성을 뒷받침한 요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그러한 ‘요람’에서 짜낸 피와 땀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낳고 촉진시킨 발전과 번영의 수혜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전태일은 독재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언론, 경제발전 지상주의라고 하는 거센 물결 속에서 ‘경제동물화’되어 갔던 중산층과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까지 보여주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 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 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던져졌고, 권력과 부(富)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것을 웅변해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19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한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으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한 생존술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그 생존술은 자연스러운 문화로까지 정착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70~1972년, 제2권은 1973~1975년, 제3권은 1976~197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4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포항 석유 발견 사건
1976년 1월 15일 박정희는 기자회견에서 “작년(1975년) 12월에 영일만 부근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드럼통 한 개 분량의 소량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75년 12월 5일 중앙정보부가 포항 영일만에서 나온 기름이라고 박정희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청와대 기자단은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이야기나 박정희가 재떨이에 불까지 붙여보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이미 전해 듣고 질문을 던졌다. 분명한 것은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정부는 매장량을 탐사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국민들은 엄청나게 행복한 충격을 받게 된다. 『경향신문』은 「우리 고향에 경사 부둥켜안고 춤도」라는 기사에서 “모든 국민은 희망과 감격과 용기 속에 번영된 조국의 미래를 눈앞에 그려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원유가 발견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추공을 따라 흘러들어간 기름을 원유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중앙정보부는 계속 시추를 해댔고, 시추는 결국 2년 만인 1977년 4월에 완전히 끝났다. 한 건 크게 올리고자 했던 중앙정보부의 큰 망신이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정보정치 만능주의’가 부른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박정희 정권이 온 국민으로 하여금 그 난리를 치게 만들어놓고 슬쩍 넘어가려고 들었던 건 ‘쇼’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박정희는 비서실장 김정렴과 경제 제2수석비서관 오원철 등이 탐사가 끝날 때까지 발표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그것을 묵살하고 발표해버렸다. 박정희는 신문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도 비슷한 이벤트를 벌였는데, 병에 든 석유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고 난 후 사장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똥물을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해 모범적인 민주노조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회사는 1975년 말부터 이 노조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해 어용노조화를 시도했다. 1977년 7월 25일 ‘세계 노동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는 놀랍고도 극적인 저항 방식’이 벌어졌다. 경찰은 72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체포해 연행하려고 했고, 200명의 여성 노동자가 벗은 몸으로 경찰차를 가로막았지만,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열리던 날 새벽에 출근한 여성 노동자들이 투표장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남성 노동자 4명이 분뇨가 가득 담긴 양동이 3개를 들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달려들어 분뇨를 뿌렸다. 여성들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분뇨를 집어넣기도 했고, 가슴 속에 분뇨를 처넣기도 했으며, 머리 위로 분뇨가 든 양동이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중앙정보부 요원과 경찰관들은 진행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 76명은 ‘근로자의 날’(3월 10일)을 기념하기 위해 국무총리와 각료를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과 전국 노조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장충체육관으로 잠입했다. 이들은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우리는 똥 먹고 살 수 없다, 김영태는 물러가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치고 청중들에게 전단을 뿌렸다. 경찰과 경비원들은 이들을 구타하고, 발길로 차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사건으로 4명이 투옥되었지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후 50여 명의 여성 노동자는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3월 20일 명동성당에서 이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각 교회에서 기도회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결국 100여 명의 사회 저명 인사들이 ‘동일방직 사건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게 노동자들의 뜻대로 해결되었다. 이들은 12일 만에 단식을 끝내고 환호했지만, 회사는 타협하는 척 속임수를 썼다. 4월 1일자로 124명이 무더기 해고를 당한 것이다.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현대는 1975년 3월부터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에 대단위 아파트 타운 건설에 착수한다. 그런데 1977년 9월에 착공한 5차분 분양에 시비가 일었다. 총 728가구의 절반은 사원용, 절반은 일반 분양용으로 승인을 받았는데, 평당 분양가 30만 원이던 것이 준공도 되기 전에 3배 이상 뛰어오른 것이다. 사원용으로 승인받은 아파트를 특수층에만 특혜 분양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곧 사실로 밝혀졌다. 1978년 6월 30일에 터진 이 사건은 여름 한철 내내 아파트 투기 열기와 함께 세상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을 받은 ‘사회 지도층’ 인사 600여 명 중에는 고급 공무원, 장성, 언론인 등 259명의 특혜 분양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이 중에는 공직자 190명, 국회의원 6명, 언론인 37명, 법조인 7명, 예비역 장성 6명 등이 포함되었다. 또 현대그룹 관계자들이 각계 요인들에게 입주를 권유한 경우도 있었다.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은 당시 한국 경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 경제는 1976년 초부터 수출 증대와 중동 특수로 상승 무드를 탔고, 이는 1978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연히 경기 과열이 발생했고, 이는 대대적인 부동산 투기로 이어졌다. 당시는 모든 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던 세상이었다. 임금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소비 욕구도 올랐다. 국세청은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1978년 2월부터 7월 사이 363개 동의 아파트 단지를 특정 지역으로 고시했고, 8월에는 비교적 강도 높은 투기 억제책인 8·8 조치를 발표했다. 12월에는 국토이용관리법을 고쳐 토지거래신고제와 허가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유신체제 자체가 거대한 부정부패의 반석 위에 구축된 것이라는 점이 문제의 근본이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선 박정희, 김계원(비서실장), 김재규(중앙정보부장), 차지철(경호실장) 등 4명과 여자 2명이 참여한 만찬이 열렸다. 차지철은 ‘신민당놈들’이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다고 큰소리쳤다. 이에 김재규는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권총을 꺼내 그의 왼쪽에 앉아 있던 차지철에게 쏜 후 그의 맞은편에 앉은 박정희를 쏘았다. 김재규는 “개인의 정분을 끊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거사를 하지 않으면 부마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어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차지철과 김재규의 엽기적인 경쟁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중요 사안이 있으면 박정희에게 먼저 보고하려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파워게임에 대해 전두환은 “우군(友軍)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하다”고 평가했다.
10월 27일 김재규는 체포되어 보안사 분실이 있는 서빙고로 끌려가 수사관에게서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등 가혹 행위를 당했다. 김재규에게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그걸 알기 위해서였다. 물론 김재규에겐 살해 계획만 있었을 뿐, 이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10월 28일 전두환은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국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재규의 범행이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니라 단순 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6명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모두 법복을 벗어야 했다. 김재규 일가의 시련은 김재규의 사형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 부인 김영희는 엄청난 고문을 당했고 재산까지 빼앗겼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1976년 10월 24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의 기관 요원인 박동선 씨가 1970년대 연간 50만 내지 100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 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톱기사 제목과 함께 무려 10면에 걸쳐 내보냈다. 이 기사는 한미 양국의 정관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이 논란은 이후 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일명 ‘코리아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의 핵심 내용은 박정희가 박동선이라는 로비스트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 등과 같은 한미간 현안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미국 의원들을 상대로 돈뭉치를 뿌렸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10월 26일 박동선은 한국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자, 『워싱턴포스트』는 10월 27일 미 중앙정보국(CIA)이 코리아게이트의 단서를 잡은 것은, 전자장치로 청와대를 도청했기 때문이라 는 기사를 내보냈다. 「제1부 제6장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1977년 12월 22일 100억 달러 수출 달성을 기념하는 수출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박정희는 “민족중흥의 창업 도전에 획기적 이정표가 될 자랑스러운 이 금자탑”이라고 선언했다.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17위(산유국 포함 26위)의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수출의 날은 11월 30일이지만, 100억 달러 수출에 맞추기 위해 기념식을 연기했다. 박정희는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당초 목표를 4년이나 앞당겨 100억 달러 수출을 무난히 실현한 것은 우리가 일찍이 ‘수출입국’의 목표 아래 굳게 뭉쳐서 국력 배양에 노력해온 성과”라고 말하고 “비록 100억 달러 수출의 고비를 넘어섰다 할지라도 오늘의 이 시점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출 한국’의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모두 명심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제2부 제5장 100억 달러 수출 달성」
1978년 6월 10일에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집은 6개월 동안에 8만 4,000부, 1979년에 7만 부, 1980년에 2만 부 판매를 기록하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 소설은 우화적이긴 하지만 당시로선 금기시되던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것이라 그러한 기록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이동하에 따르면, 이 소설은 “70년대의 거대한 사회적 변동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난에 찬 삶을 지속해야 했던가를 말하고 그들의 이상과 존엄성이 어떻게 부당하게 훼손되어갔는가를 탁월하게 증언”했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불렸던 이 소설은 연작소설집으로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문학과지성』을 비롯한 여러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조세희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조세희는 산동네 철거민촌을 찾아다니며 취재를 했고, 자신이 직접 살기도 하면서 빈곤층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는데……. 「제3부 제5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제1부 1976년 :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제1장 경제개발과 가족계획
피임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 · 19 1인당 GNP를 높이기 위해 · 20 군사작전식 가족계획운동 · 21 결혼 연령의 변화와 공업화의 영향 · 23
제2장 포항 석유 발견 사건
온 국민을 강타한 행복한 충격 · 25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차이 · 26 한국을 휩쓴 회오리바람과 광풍 · 29 ‘포항 석유 쇼’의 진상 · 30
제3장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언론이 죽어 있는 상황에서의 저항 · 33 이게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 35 인권운동 활성화의 계기 · 38 반상회와 상호 감시체제 · 39
역사 산책 1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체제’ · 41
제4장 폭력이 난무한 신민당 내분
‘한국 야당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 · 44 이철승의 대표최고위원 당선 · 45 이철승의 중도통합론 · 47
제5장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미루나무 가지치기가 부른 북한의 살인극 · 49 북침 가능성에 대한 북한의 신경질적 반응 · 50 ‘음흉한 의도’ 또는 ‘건수 올리기’? · 53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 54
제6장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뇌물 제공’ · 56 2개월 늦은 한국 언론의 보도 · 58 농촌을 희생으로 한 대미 로비 · 59
제7장 세종대왕 숭배와 외래어 추방 캠페인
세종대왕을 통한 이미지메이킹 · 62 프로그램과 연예인 이름의 국산화 · 63 스포츠 용어의 국산화 · 65 『뿌리깊은 나무』의 창간 · 66 지하철 독서문화의 탄생 · 68
제8장 신문과 TV의 갈등, ‘하이틴 영화’의 성행
‘저속하고 비윤리적인 일일연속극’ · 69 ‘무하마드 알리’ 사건 · 71 신문과 TV의 광고 전쟁 · 72 왜 박정희 정권은 대마초 사건을 뻥튀기했는가? · 73 1년에 25편이나 제작된 ‘하이틴 영화’ · 76 ‘하이틴 영화’의 사회학 · 78
역사 산책 2 ‘호스티스 영화’와 ‘총화 유신 이념의 구현’ · 79
제2부 1977년 : ‘100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제1장 프레이저 청문회와 싱글러브 항명 사건
박정희와 지미 카터 사이의 갈등 · 83 프레이저 청문회와 ‘어글리 코리안’ · 85 코리아게이트가 민족주의 문제였는가? · 87 김한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 89 김한조의 박정희에 대한 원망 · 90 김한조의 한 맺힌 삶 · 91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의 항명 · 93
제2장 충효 교육과 문교부·문공부의 경쟁
‘정신 무장’을 의미한 ‘정신문화’ · 96 “충효 교육을 중심으로 한 도의 교육의 강화” · 98 문교부와의 경쟁에 나선 문공부 · 99 박근혜가 후원한 새마음운동 · 100 ‘박정희 민족주의의 반민족성’ · 101
제3장 리영희 필화 사건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 · 103 “검사가 ‘반공법 위반이다’ 하면 위반” · 104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 · 106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활동 · 107
제4장 병영체제하의 민주화 투쟁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 109 “야 이놈아, 네가 판사냐” · 110 학생들의 ‘가미가제’식 투쟁 · 112 성직자, 해직 교수, 해직 기자들의 투쟁 · 113
제5장 100억 달러 수출 달성
1977년 의료보험 실시 · 115 박정희의 ‘군사작전식 밀어붙이기’의 성공 · 117 세계 17위의 수출국이 되다 · 118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최초 종합우승 · 121 분양만 받으면 1년 내 두 배 장사 · 123 정부의 ‘강남 키우기’와 중동 특수 · 124
역사 산책 3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만공사 · 127
역사 산책 4 지방민들을 압도한 대우빌딩의 위용 · 130
제6장 MBC 대학가요제와 그룹사운드 붐
예상을 뒤엎은 뜨거운 열기 · 133 대학가요제의 사회사적 의미 · 135 대학가의 그룹사운드 붐 · 137
제7장 컬러TV 방송 논란과 농촌
삼성전자·금성사가 참여한 1972년 논쟁 · 138 박정희의 컬러TV 방송 반대 이유 · 140 박정희의 농촌에 대한 이중성 · 141 1977년 최고의 TV 스포츠 이벤트 · 143
제3부 1978년 :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제1장 도시산업선교회와 민주노조운동
부의 소수 집중과 상대적 박탈감 · 149 인간적 모독에 저항한 인권운동 · 150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공격 · 151 한국노총의 조직행동대 결성 · 153 “나는 왜 산업선교회원이 되었나?” · 154 산업선교를 방해하기 위한 ‘교양강좌’ · 156
제2장 ‘공순이’에 대한 사회적 폭력
서울의 ‘촌놈 차별’ 또는 ‘촌년 차별’ · 158 ‘공돌이’보다 훨씬 더 당한 ‘공순이’ · 159 공장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되는 이유 · 161 학력 이데올로기의 폭력 · 163 ‘상징적 억압에 대한 분노’ · 165
제3장 똥물을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여성 노동자들의 알몸 저항 · 167 성폭력 형태의 잔인한 보복 · 169 입에까지 똥을 집어넣은 만행 · 170 “우리는 똥 먹고살 수 없다!” · 173 중앙정보부가 조종한 공작 · 174
제4장 언론의 침묵과 부활절 예배 중단
동일방직 똥물 사건에 대한 언론의 침묵 · 177 여성 노동자들이 중단시킨 기독교 방송 · 178 ‘언론의 시선을 잡아보려는 필사적인 시도’ · 179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 · 182 ‘공장의 불빛’으로 승화된 투쟁 · 183
역사 산책 5 교회는 여공들의 진정한 친구였는가? · 186
제5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악이 선을 가장했던 세상’ · 189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 191 “반드시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 191 “너무 아파 나는 피를 토한다” · 192
제6장 서울대 6·12 시위와 ‘교육지표’ 사건
대학생들의 유인물 배포 투쟁 · 195 6·12 시위의 새로운 면모 · 196 ‘국민교육헌장’부터 잘못되었다 · 197 학생을 포섭해야 하는 교수의 비애 · 199
제7장 제9대 대통령 선거
한밤중의 청와대 인근 전차 시위 · 201 파국을 향해 치달은 박정희 정권 · 202 공산주의를 빼닮은 박정희의 선거 · 203 언론은 선전·선동 기관지인가? · 205 박정희의 제9대 대통령 취임과 김대중 가석방 · 206
제8장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새롭게 창조된 ‘탐욕의 문화’ · 209 교훈을 남기지 못한 현대아파트 사건 · 211 경기 과열에 따른 욕망 과열 · 213 부정부패 비판도 긴급조치 9호 위반 · 215 ‘복부인’과 ‘제비족’의 활약 · 217 ‘한강의 기적’과 강남 개발의 가속화 · 219
역사 산책 6 말죽거리 잔혹사 · 223
제9장 국산 미사일 개발과 미국의 견제
착수 6년 만에 쏘아올린 미사일 · 225 미국의 견제 속에 이루어진 핵개발 시도 · 226 신군부는 ‘핵개발 포기 각서’를 써주었는가? · 228
제10장 ‘함평 고구마’와 ‘영양 감자’ 사건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 · 230 시국 사건으로 비화된 감자 피해보상 투쟁 · 232 기이한 ‘오원춘 사건’ · 233 농업정책과 새마을운동의 허구성 · 236
제11장 새마을운동과 대중동원 정치
국민 1인당 평균 2회 받은 새마을훈련 · 239 새마을운동의 외화내빈 · 241 ‘돈에 화신 들린 농촌’ · 242 ‘농민을 사람으로 대접한 최초의 지배자’ · 243 ‘농촌 민주주의’의 명암 · 244 새마을부녀회의 명암 · 247 방림방적의 새마을운동 · 249
제12장 민권일지 사건과 신문 판매 전쟁
‘언론은 관민 합작에 의한 악덕 상품’ · 251 은폐·왜곡된 250여 건 기사화 시도 · 253 ‘앵무새 보도원으로 전락한 언론’ · 254 ‘방황하는 농촌’ 기사에 대한 탄압 · 255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100만 부 돌파 · 257 용인자연농원 돼지 분뇨 방류 사건 · 259 삼성조선의 시추선 설계도면 절취 사건 · 260 정주영의 ‘신문 없는 서러움’ · 262
제4부 1979년 : 박정희 시대의 종말
제1장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중간집단운동’에 대한 탄압 · 267 고문의 상습화·생활화 · 269 박정희 정권은 ‘야수의 정권’ · 271
제2장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복귀
1978년 12·12 총선과 여야 역전 · 274 백두진 파동과 이철승의 ‘사쿠라’ 정치 · 275 김대중과 김재규의 지원 · 276
제3장 지미 카터의 한국 방문
카터의 방한 반대운동 · 280 양심범가족협의회와 동아투위의 성명 · 282 ‘김일성 면담 용의’ 발언 파동 · 282 박정희와 카터의 갈등 · 283 주한미군 철수 시한부 중지 발표 · 286 ‘어깨에 힘이 들어간 박정희의 착각’ · 288
역사 산책 7 문인들의 시위 투쟁과 옥중 권리 투쟁 · 290
제4장 YH 노동자 폭력 진압 사건
“근대화의 역군을 윤락가로 내몰지 말라” · 292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들 약값은 어떻게 하나?” · 293 ‘미필적 고의살인’과 무차별 폭행 · 295 언론의 ‘마녀 사냥’ · 297 강제 귀향 여성 노동자들의 운명 · 298 ‘정신질환적인 편집광 증세의 극치’ · 300
제5장 김영삼 의원직 제명
‘박정희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적 항쟁’ 선언 · 302 31년 만에 처음으로 발동된 국회 경호권 · 303 신민당 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 · 305
제6장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실종 사건
‘용도 폐기’된 김형욱의 운명 · 307 박정희의 “나는 모른다”는 주장 · 308 누가 김형욱을 죽였는가? · 309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 312
제7장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
아직도 평가가 어려운 남민전 사건 · 314 꼭 ‘남조선’이라는 말을 써야 했는가? · 317 이게 인간이 사는 세상인가? · 317 김남주와 홍세화의 활동 · 319 남민전 사건의 영향과 의의 · 321 대구는 왜 보수적인 도시가 되었는가? · 322
제8장 부마 민주항쟁
경제에 손을 든 박정희 · 325 박정희의 해결 능력을 넘어선 위기 · 326 박정희의 통제를 벗어난 대자본 · 327 ‘10·16 항쟁’ 또는 ‘부마 민주항쟁’ · 329 항쟁의 뇌관을 건드린 경제 · 331 ‘새로운 힘의 센터’의 등장 · 333
제9장 10·26 사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 334 차지철과 김재규의 엽기적 경쟁 관계 · 336 계획적인가, 우발적인가? · 338 보안사에 넘어간 정국 주도권 · 339 김재규 평가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 · 341 1970년대 한국인의 삶의 일부였던 박정희 · 343
역사 산책 8 혈서는 살아 있다 · 345
제10장 박정희의 엽색 행각
손찌검까지 동원된 육박전 · 348 압구정동 H 아파트 사건 · 350 사흘에 한 번씩 연예인 100명 섭렵 · 351 박정희의 가학적 섹스관 · 353 사무라이를 꿈꾼 ‘대일본 제국 최후의 군인’ · 355
제11장 박정희의 용인술과 부정부패
박정희의 이간책 수법 · 357 박정희의 독심술과 두 얼굴 · 359 용인술과 부정부패는 동전의 양면 · 361 ‘한강의 기적’의 비용인가? · 364 “인간이란 어차피 다 이중인격자야” · 366 박정희의 촌지 봉투 대량 살포 · 367
제12장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거국중립내각구성’과 ‘조기 총선’ 주장 · 369 ‘해빙 무드’와 사태의 급반전 · 371 신군부의 악랄한 고문 · 372 민주화 의제 변화와 윤보선의 변절 · 373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음모 · 375
제13장 12·12 군사반란
제10대 대통령 최규하의 변심 · 377 신군부가 저지른 12·12 군사반란 · 379 장태완과 정승화의 비극 · 381 하나회가 주도한 12·14 군 숙청 · 384 영관급 육사 출신들의 인사 정체에 대한 불만 · 385 전두환의 ‘뜸 들이기’ 작전 · 387 새로운 파시즘의 재기 예고 · 388
제14장 축구의 남북 대결과 한일전
TV 중계방송을 하지 않은 남북 대결 · 392 방콕아시안게임 남북 공동우승 · 394 남북 선수들간의 뜨거운 신경전 · 395 다시 불붙은 한일전 · 397
역사 산책 9 ‘축구 영웅’ 차범근의 활약 · 399
맺는말 :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
경부고속도로가 낳은 ‘번영과 소외’ · 402 ‘국가주의적 지도자 숭배의 문화’ · 404 과연 ‘인간의 얼굴을 가진 온건한 파시즘’이었는가? · 406 개발독재가 낳은 신민 문화 · 408 상호 갈등 해소와 화합은 불가능한가? · 410
주 ·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