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텍스처
작업실유령 / 문석민, 백지수, 신예슬, 앤드루 유러스키, 요세피네 비크스트룀, 장피에르 카롱 (지은이), 오민 (엮은이), 오민, 전효경 (옮긴이), 박수지 (기획) /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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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유령소설,일반문석민, 백지수, 신예슬, 앤드루 유러스키, 요세피네 비크스트룀, 장피에르 카롱 (지은이), 오민 (엮은이), 오민, 전효경 (옮긴이), 박수지 (기획)
시간을 탐구하는 예술가 오민의 새로운 개념을 다룬다. 미술과 음악과 무용의 교차점에서,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의 접점에서 주로 음악의 구조를 빌려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을 면밀히 주시하고 치환해 온 작가는 보편적이고 위계적인 체계와 선(음악에서의 선율, ‘텍스처’)을 벗어난 오늘날의 덩어리적 감각을 ‘포스트텍스처’(post-texture)라고 명명하면서 동시대적 동시 감각을 새로운 언어로 사유하고 선언한다.
책은 오민의 글 세 편(포스트텍스처의 시작을 알리는 「폴리포니의 폴리포니」, 시간 예술과 관련된 여러 개념들을 점검하는 「시간」, 포스트텍스처를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을 주축으로 오민이 동시대 음악가 및 연구자와 ‘물리적 감각과 지적 구조와 선험적인 것’(장피에르 카롱) ‘퍼포먼스에서의 기술의 의미’(요세피네 비크스트룀) ‘시청각적 텍스처 개념’(앤드루 유러스키)에 대해 나눈 대화, 오민과 함께 음악을 여러 관점에서 탐구해 온 작곡가 문석민과 비평가 신예슬의 비선형적 음악에 관한 글, 책과 같은 방향을 공유하는 오민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일민미술관, 2022년 8월 23일~10월 2일) 학예사 백지수가 새로운 시간 지각을 조망하는 글을 오가며 포스트텍스처의 비위계를 다각도로 드러내고 거듭 증명한다.
그동안 <토마>(2021)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2020) <연습곡 1번>(2018) <스코어 스코어>(2017) 등의 디자인과 출판 과정을 통해 오민의 작업과 연구를 함께 기록해 온 디자이너 슬기와 민은 <포스트텍스처>(2022)에서 여러 글이 지면을 나누어 함께 평행하게 가로지르며 다성적이면서 정보의 덩어리 상태를 이루어 가는 포스트텍스처적인 본문 디자인을 구현하는 한편, “덩어리적 음향 현상에 관해 사유할 새로운 언어로서 ‘포스트텍스처’를 상정”(129쪽)하기 시작하는 본문을 표지로 삼아 개념을 제시하는 선언문으로서 책을 위치시킨다.오민 — 폴리포니의 폴리포니
오민 — 시간
오민·장피에르 카롱 — 구성적 해리와 선험적 미학에 관하여
오민·요세피네 비크스트룀 — 퍼포먼스 기술의 변증법
오민·앤드루 유러스키 — 시청각적 ‘텍스처’—다원적 장르를 향해
오민 —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문석민 — 비선형적, 비서사적 음악
신예슬 — 노래?
백지수 — 별미 빵을 만들겠다는 제빵사의 마음으로
저역자 소개덩어리라는 동시 감각
“언제부터인지 동시대 음악에서 ‘선’이 들리지 않는다.”(128쪽)
포스트텍스처는 음악에서 선율을 조직하는 방식과 그 결과 발생하는 음향을 지칭하는 텍스처 이후, 도처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여겨지는 현상을 새롭게 가리키는 용어다. 하나의 선(모노포니)으로 시작한 음악은 선을 다수로 확장하며(폴리포니, 호모포니, 헤테로포니) 여러 선적 체계를 만들어 갔지만 20세기 이후 조성이 무너지고, 선이 사라졌다. 그리고 음향의 덩어리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오민은 이렇게 음악의 기본 단위처럼 여겨졌던 선 대신 나타난 비선형적 덩어리가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분야를 비롯해 일상에서 이미 부유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동시대적 동시 감각으로 명명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그동안 위계 관계에 의해 주인공이 되었던 선 아래 가려져 있던 다른 것들이 드러난 결과다. 덩어리적 감각은 자연히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31쪽)하고, “주변적이라 생각하던 것들을 내부로 흡수”(31쪽)하며,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그러면서 “선형적 감각보다 강도 높은 독해를 요구”(32쪽)한다. 덩어리적 감각으로서 포스트텍스처는 작품 외부의 위계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작품의 내부에서 비위계를 작동시키는 구성 언어를 실험”(137쪽)하는 데 집중하면서 “시간의 수직적 또는 동시적 측면에서 감각 정보 사이의 비위계적 관계를 모색”(137쪽)하고, 관습적으로 의미를 생성하지 않는 ‘비(非)노래’의 감각을 찾아 나간다.
비(非)노래라는 형식
오민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통 지향적으로 정돈된 감각 정보의 위치, 방향, 질서.”(135쪽) 그리고 ‘비(非)노래’를 이렇게 말한다. “관습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계로 연결된 감각 정보의 집합 양상 및 그 행동.”(135쪽) 음악을 통해 처음 인지된 노래와 비노래는 이제 음악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감각 언어로 지시된다.
책 『포스트텍스처』와 같은 주제를 두고 공명하는 오민의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는 페미니스트이자 무정부주의 활동가였던 옘마 골드만의 말, “춤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를 비튼 것이다. 춤은 대의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행위라는 동료의 훈계에 춤을 부정하는 혁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골드만의 비위계적 태도를 주목한 오민은 이 시대의 미술에서 형식이 (당시의 춤처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한다. 그리고 내용 없는 형식이 정말로 문제인지, 내용 없는 형식이란 실은 이미 내용이 집적된 형식이 아닌지 질문한다. 그렇다면 내용과 형식은 더 이상 위계 관계 아래 있지 않다. 이는 노래의 반대 항으로서 비노래가 오늘날 예술에서 효과적인 표현 방식으로 떠오른 노래의 바깥에서 “곧바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생소한 소리와 생소한 운동성을 탐구하며 시간 감각과 어울림을 재정의하기 위해”(136쪽) 힘쓰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춤출 수 없다면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이, 대의를 손상하는 하찮은 것을 대의 주변에서 배제하겠다는 생각에 반대하듯, 노래해야 한다면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찮은 것이든 하찮지 않은 것이든 대의에 봉사하는 대상으로 포섭하겠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는 어떤 훌륭한 대의가 예술계를 관통하는 중이더라도 형식을 그 대의의 하위 위계에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어떤 노래가 대의를 효과적으로 받들기 위해 불러진다면, 그런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다.
시간 예술에서 형식 실험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많은 실험이 축적된 시간 동안 새로운 재료와 기술과 사유와 태도가 끊임없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미 모종의 답을 얻었더라도, 오늘 얻은 답이 내일 역시 여전히 답이라 확신할 수 없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그 답을 찾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긴급한 문제다. 즐거움이고 또 대의다.”(134~135쪽)덩어리 / 나는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학문적으로 규명되기 이전, 언어로 구체화되기 이전, 모두가 동감할 정도로 공공연해지기 이전부터, 시대의 감각은 이곳저곳에서 마치 징후처럼 나타난다. 동시대의 감각 역시 이미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두었다. 내가 그 흔적들을 제대로 추적했다면, 동시대적 감각은 덩어리적인 것이라 짐작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우리가 주변적이라 생각하던 것들을 내부로 흡수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그렇다고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이 능숙하게 만들어 내는 환영에는 관심이 없다. 덩어리적 감각은 이야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보다 강도 높은 독해를 요구한다.
선 / 음악은 선율에서 출발했다. 선율은 지금껏 음악에서 주인공으로 행세했고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다. 때때로 한 음악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율을 흐리며 동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덩어리적 음향은, 선율이 최근까지 음악사에서 누렸던 지위와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분명 다수의 소리가 함께 울렸는데 하나의 선으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소리 사이에 부여된 위계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율보다 하위 위계에서 작동하던 다른 것들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전경화된 선율이 음악의 표면에서 주요한 임무를 수행했음은 사실이지만, 사실상 새로운 음악을 촉발해 온 수많은 계기는 오랜 시간 동안 선율 아래 가려져 있던 다른 것들이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서사 / 서사란 무엇일까? 서사가 무엇이길래, 서사 없는 작품을 감상 중인 관객들이 서사를 찾지 못해 번뇌하고, 심지어 가끔은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고야 마는 것일까?여기서의 서사는 원인과 결과, 혹은 인물의 감정, 혹은 이야기나 메시지에 가깝다. 서사의 사전적 의미는 ‘일련의 사건에 관한 기술’로 정리할 수 있으며, 이는 이야기보다는 조금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폴 리쾨르의 관점은 조금 더 유연하다. 리쾨르에게 서사란, 세계(prefiguration)에 관한 이해를 내적 규칙에 의해 조직화(configuration)하는 탐구며, 이것은 독자에 의해 재조직화(reconfiguration)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는 관객에게도, 가사도 이야기도 없이 형식과 번호로 이름 지어지는 절대 음악의 관념적 시간 구조 역시 서사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믿는 나에게도, 큰 의심을 남기지 않을 만큼 충분히 넓은 시각이다. (...)서사란 결국 연쇄적으로 분화되는 층위와 각 층위의 구성체들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나 메시지와 같이 좁은 의미의 서사는 선에 가깝지만, 수직적 층위와 수평적 흐름 안에 조직되는 정보 관계와 같이 넓은 의미의 서사는 덩어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