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사 연구를 이끌며 치밀한 실증과 과감한 해석으로 큰 영향을 준 이케우치 히로시의 대표작 『만선사 연구』 전3권 완역이다. 근대적 방법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의 시작을 보여주며, 통설로 자리잡은 견해들이 만들어지고 논쟁·수정·정착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한국사 연구의 형성과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방대한 사료 섭렵과 치밀한 고증으로 일본 동양사학계에서 거두로 인정받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 식민사학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로 평가된다. 고구려의 발상지와 수도 이전, 광개토대왕비 연구, 낙랑군과 한사군 위치 비정 등 주요 주제를 다루며, 오늘날 학계의 논쟁과도 이어지는 연구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3권에서는 윤관의 9성 개척 범위와 철령 문제 등 고려시대 핵심 쟁점을 정면으로 다룬다. 사료에 나타난 거리와 기록을 근거로 함흥설을 제시하고, 명이 요구한 철령의 위치를 기존 인식과 달리 해석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범이 원서의 체제와 도판, 구두점을 살려 번역해, 기존 학설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출판사 리뷰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사 연구를 이끌면서
치밀한 실증과 과감한 해석으로 큰 영향을 준
이케우치 히로시의 대표작 『만선사 연구』 완역!
근대적 방법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의 시작
통설로 자리잡은 견해들이 만들어지고 논쟁·수정·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1878~1952)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사학자로, 특히 만선사滿鮮史(만주와 조선의 역사) 연구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 동양사학계 내에서는 방대한 사료 섭렵과 치밀한 고증 능력으로 ‘거두’로 인정받지만, 한국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한 식민사학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구려의 발상지와 수도 이전, 광개토대왕비 연구 등에 대해 집중했으며 유리왕이 옮긴 국내성을 집안集安으로 비정하는 기초를 닦았다. 이는 오늘날 고고학적 성과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집안의 통구 일대 고분들을 조사하여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보는 등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로 비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국사의 시작을 외세의 지배로부터 설정하려는 식민사학적 구도를 강화했다는 국내 학계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번 『만선사 연구』 전3권의 완역은 이케우치 히로시의 연구의 대부분을 망라한다. 번역은 해외 한국학의 연구 성과를 꾸준히 번역 소개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맡았다.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 2책과 中世 3책(吉川弘文館, 1933~1963)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으며 「숙신고肅愼考」 「물길고勿吉考」 등 한국사와 직접 관련이 적다고 판단되는 논문들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원서의 체제와 도판, 구두점 등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살렸으며 학자들이 연구의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사실 쓰다 소키치 등과 함께 그동안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어온 학자다. 이번 번역으로 이케우치 히로시의 연구 성과를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물론 고려시대까지의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도 지금 통설로 자리잡은 학설들이 최초에 어떤 모습으로 제기되어 완성되어나갔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1권의 주요 주장
이 책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1권 5편에서는 진번군眞番郡의 남재설을 주장했다. 저자는 일본의 주류적 학자들(북재설의 대표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들의 견해를 날카롭고 치밀하게 비판한다. 4편에서는 고구려가 기원전부터 뚜렷한 세력이었음을 인정한다. 주몽의 건국 전설에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음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 구조가 부여의 동명 전설과 일치하는 것은 민족의 본류와 지류 관계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다. 전한前漢 소제 원봉 4~5년 어떤 사정에 따라 송화강 유역에서 남하한 부여족의 한 세력이 요동군과 한반도 4군의 통치 밖에 있던 동가강 유역을 차지하고 그곳에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인다.(4편)
고구려의 건국을 뜻하는 그 이족夷族이 동가강 유역을 차지한 시기는 제2현도군의 성을 쌓은 것이 소제 원봉 6년(기원전 75) 정월이었다는 것에서 미뤄 그 전해, 곧 원봉 5년(기원전 76)이었음이 거의 분명하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도(기원전 37)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주몽이라는 구체적 인물과 그 전설적 행적, 그리고 태조왕까지의 고구려 역사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요컨대 4군 설치 뒤 30년이 지나면서 한이 이미 7년 전 폐지한 진번군 외의 세 군을 병합하는 동시에 옥저성의 현도군 이름을 이어받은 제2현도군을 요동군 동쪽 변방에 신설한 것은 고구려가 동만주에서 건국하면서 일어난 정세 변화에 곧바로 대응한 조처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견해다. 그러므로 제1현도군의 폐지와 함께 이뤄진 제2현도군의 신설과 고구려의 건국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9편에서는 고국원왕 남무의 실재 여부에 대한 비판이 이뤄진다. 이 견해는 그뒤 좀더 정밀하게 보강돼 현재 일본 학계의 주류적 견해가 된다(다케다 유키오 등). 이것을 부정하려면 정확한 근거를 갖고 논리적으로 비판해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역자의 견해다.
2권의 주요 주장
1편에서 진흥왕 황초령 순수비가 옮겨졌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정밀하고 방대한 고증이 펼쳐진다. 가령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윤관이 요의 세력이 미친 함흥평야의 여진을 정복해 영주 등 9성을 쌓으면서 그 점유를 역사적 이유가 있는 수단으로 삼기 위해 그동안 철령 부근에 있던 진흥왕의 무자 순수비를 일부러 점령지 북쪽 경계의 요충지인 황초령으로 옮겨 세웠다고 생각한다.”(98쪽)
그 뒤 마운령비가 발견됨으로써 이 이치설移置說은 부정됐지만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진흥왕 무렵 신라의 북쪽 경계를 고증한 시도는 의미 있게 평가된다.
이케우치는 정복지역 내에 있던 고구려의 고비古碑가 바로 윤관 자신이 옮긴 진흥왕순수비였지만, 당시에 이미 상당히 마모된 비면을 정밀 조사하지 않고 고구려비로 속단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파악했다. 사료 비판을 통한 사실 구명이라는 실증사학의 진수를 보는 것 같은 치밀한 고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문헌 중심의 관점에서 예정된 결론은 신라의 동북경은 안변 이북일 수 없는데, 그것과 내용이 다른 황초령비를 부정하기 위해 번쇄한 실증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김영하, 「일제 시기의 진흥왕 순수비론」, 『한국고대사연구』 52, 2008, 451쪽)
2·3편에서는 삼국통일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뤄졌는지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서술했다. 그 과정에서 사료의 비교·검토·수정 등이 정밀하게 이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편 「신라인의 무사적 정신」에서는 신라인의 무사적 정신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다고 높게 평가했다.
3권의 주요 주장
10편에서는 고려시대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인 윤관의 9성 개척의 지리적 범위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글은 쓰다 소키치의 「윤관 정략 지역고」(『만선역사지리연구』)와 함께 함흥설을 대표한다. 현재 한국사학계에는 정설이 없는 상황이다. 기원전이나 삼국시대도 아니고 1100년대의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작지 않은 문제로 볼 수 있다.
함흥설을 비판하려면 이 두 논문을 철저히 분석해 반론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사료에 나오는 거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아래는 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윤관이 새로 쌓은 6성의 이름을 아뢴 것은 함주 대도독부사와 4주 1진의 방어사가 임명된 2월 13일 이전이며, 유형약을 보내 승리를 알린 무렵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6성의 건설은 늦어도 예종 3년(1108) 정월 말, 곧 정벌군이 출발한 날부터 한 달 반 안에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400쪽)
21편에서는 철령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철령 이북을 반환하라는 명의 요구에 대해 고려는 처음에 함경도의 철령으로 오해했지만 그것이 아님을 명확히 지적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인데도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아직도 정설이 없는 상태다.
관련하여 본문에서 이케우치 히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명이 말한 철령은 결코 함경도 남쪽의 고갯길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848쪽) “명이 철령이라고 부른 곳은 반드시 강계(만포) 맞은편 황성黃城(皇城) 부근이 돼야 한다. 『명실록』(권189)의 다음 기사도 그것을 증명한다.(849쪽) “요동도사가 지휘 두 사람을 보내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계에 와서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두 번째 보고가 도착하면서 그 철령위는 고려인이 잘 알던 황성黃城(皇城)이라는 것은 이미 판명됐다고 생각된다.(873쪽)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케우치 히로시
1878년 일본 도쿄 출생. 1904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졸업. 1908~1914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도쿄지사의 만선역사지리조사부 연구원으로 조선사 연구. 1916~1939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로 조선사 강좌 담당. 1918~1941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으로 여러 차례 조선과 만주를 방문해 고적 조사·연구.1937년 제국 학사원學士院 회원에 선출. 1952년 74세로 별세. 주요 저서에 『滿鮮史硏究』(전5권. 吉川弘文館, 1951~1979), 『文祿慶長の役』(正編·別編, 南滿州鐵道·東洋文庫, 1914·1936), 『日本上代史の一究』(近藤書店, 1947), 『元寇の新究』(東洋文庫, 1931) 등이 있다.
목차
중세 제1책 머리말
중세 제2책 머리말
중세 제3책 머리말
1편 발해의 건국자에 대해
2편 고려 태조의 경략
[부설] 평양의 재성
3편 골암성의 위치에 대해
4편 신라 말의 진례성에 대해
5편 고려 태조 붕어 이후 왕위 계승의 한 비극
6편 고려 성종대 여진·거란과의 관계
7편 고려 목종대의 화란禍亂
8편 거란 성종의 고려 침략
9편 고려시대 동여진의 해상 침략
10편 완안씨의 갈라전 경략과 윤관의 9성 축조
[부설] 포로모타부에 대해
11편 대화궁과 이른바 왜성
12편 몽골의 고려 침략
13편 고려 원종대의 폐립 사건과 몽골의 고려 서북면 점령
14편 고려의 삼별초에 대해
[부설] 삼별초의 반란
15편 원 세조와 탐라도
16편 고려에 주재한 원의 다루가치
17편 정동행성의 창설과 폐지
18편 고려의 원 행성
19편 고려 공민왕의 반원 정책
20편 고려 공민왕대의 동녕부 정벌
21편 고려 우왕대의 철령 문제
22편 고려 말 명과 북원의 관계
23편 공험진과 소하강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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