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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다녀간 것일까
서영 | 부모님 | 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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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오늘의 시선집 24권. 시집 <가을은 어디나 빈자리가 없다>를 출간한 전금희 시집. 전금희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관찰하고 답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의 존재 가치와 의미, 그 소중함에 대해 시적 형상화를 통해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출판사 리뷰

‘그 누가 다녀간 것일까’에 대하여

전금희 시인의 제1시집 <가을은 어디나 빈자리가 없다>에 수록된 시들은 시의 특질을 두루 갖추고 있어 보는 이들, 읽는 이들, 같이 공부하는 이들을 기쁘게 했다. 다들 그녀의 시를 사랑하고 시 기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녀의 시 세계는 세계관이 특출나거나 요란하지 않으며, 일상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생활 주변에 머물면서 자신의 내면, 의식, 인생관, 생각, 사색 등의 영역을 주로 시적 형상화로 그려 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적 형상화 속에 상징의 폭을 넓혀 놓았고, 그 주변을 이미지로 감싸야 했다. 이러한 시 세계가 제2시집에서는 어떤 변화를 껴안게 되었을까. 지금부터 그녀의 제2시집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없는 그리움이
잇닿은 시작이
그때부터인 듯싶습니다

일렁임을 어쩌지 못한 채
꽃이 피어나고
파도가 노래하고
낙엽이 흩어지고
눈이 나리고……

사소한 일상까지 함께 뒹굴면서
서늘하고 뜨겁게
그리움 속으로 천천히 떠내려갔습니다

긴 기다림과의 포옹은
시를 쓰게 하고
잃었던 영혼이 조금씩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달빛이 흘러들 듯
보고픔이 번져 오르기 시작함이
아마도 그때부터인 듯싶습니다.
<당신에게.1>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그리움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깨닫고,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가슴속은 일렁이고, 드디어 꽃이 피어나고 파도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흩어지는 낙엽도 보이고, 내리는 눈도 보인다. 바쁜 일상에 코를 박고 살아가던 현실에서 그리움의 창고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시적 화자는 서늘하고 뜨겁게 그 속으로 천천히 떠내려간다. 거부하지 않고,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거부감 없이 그 융융한 물결에 올라탄다. 그러다가 긴 기다림과의 포옹 시간을 갖는다. 이게 마음을 움직였고, 이후 시를 쓰게 된다. 그러자 잃었던 영혼이 조금씩 찾아들기 시작한다. 마치 달빛이 흘러들 듯, 마음이 열리고 가슴이 열리고 시야가 열린다. 동시에 보고픔도 무한히 번져 오르기 시작한다.
이로써 시적 화자는 그리움과 보고픔과 기다림을 동시에 껴안게 되고, 날마다 시를 쓰며 감성 안에 울려 퍼지는 다채로운 느낌의 물결을 온몸으로 맛보기 시작한다. 이제 시적 화자는 일상인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감각과 시야와 비전을 간직하게 된다.
제1시집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상징이 여기서는 저 뒤로 밀려나 있고, 오로지 시적 화자는 미묘한 감성의 변화에 눈길을 집중하고 있다.

뉘엿뉘엿 넘는 슬픔들이
잔물결 위로 누운 채
붉게 술렁입니다

그리움이 끼어들어
더듬더듬 더듬어 팔짱을 끼고
강가를 떠돕니다

슬픈 눈이 깊어갈수록
돌아오지 못하리란 걸 빤히 알기에
그저 눈시울만 뜨뜻해 옵니다

가슴을 맴도는 외로움이
잠들지 못한 억새들과 일렬로 서서
하얀 울음소리를 냅니다

가을을 쓸쓸히 내버려 두고도
그 무게와 깊이를 잴 수 없는 건
눈물 속에 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 전문

이 시의 시적 화자도 그리움에 젖어 있다. 내면에 슬픔이 일렁인다. 그 슬픔은 석양처럼 뉘엿뉘엿 넘어가다 잔물결 위에 누운 채 붉게 술렁이고 있다. 좀처럼 시적 화자의 곁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때 그리움이 끼어든다. 시적 화자는 할 수 없이 그리움을 더듬더듬 더듬어 팔짱을 끼고 강가를 배회한다. 이건 산책이 아니라 방황이다. 이건 사색이 아니라 고뇌다. 왜 그럴까. 왜 슬픈 눈이 자꾸만 깊어가는 걸까. 그건 다름 아닌 절망 때문이다.
그리움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다는 건 큰 슬픔이다. 그저 눈시울만 뜨뜻해져 가는 슬픔, 가슴을 맴도는 외로움, 산책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앞을 나선다. 그러다, 그 슬픔과 그 외로움은 잠들지 못하고 서 있는 억새들과 나란히 서더니 하얀 울음소리를 낸다.
구상(가슴을 맴도는, 억새들, 일렬, 하얀)과 추상(슬픈, 외로움, 잠들지 못한)의 조화, 시각 이미지(가슴을 맴도는, 억새들, 일렬로 서서, 하얀)와 청각 이미지(울음소리)의 조화 등이 돋보이는 표현 기법이 시적 화자의 슬픔과 외로움을 더욱 극대화시켜 놓고 있다.
시적 화자의 눈길은 가을의 본질로 향하고 있다. 가을을 쓸쓸히 내버려 두고도 그 무게와 깊이를 잴 수 없는 이유는 뭔가. 그건 눈물 속에 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면서 시적 화자는 눈물의 의미를 가슴 깊이 간직한다.
그리움은 떠났고, 다가왔지만 하나될 수 없고, 다시 돌아올 확률은 없지만, 그 그리움 때문에 흘린 눈물은 소중하다는 것, 그 안에 사랑의 향기가 스며 있다는 것, 그래서 후회할 수 없는 추억이라는 것, 눈물 속에 아직 뭔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환희는 촛불처럼 타오를 수 있다는 것 등을 억새들과 나란히 거닐면서 하얀 울음소리를 내면서,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
시적 화자는 바보처럼 늘 그렇다. 그래서 독자는 더 슬프다. 그리고 더 외롭다.

차가운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가질 수 있을까
지는 꽃을 막아서는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

식탁에 부딪히는 수저 소리와
영혼으로 읽는 모든 책과
넘기는 페이지마다 떠오르는 별빛과
슬픔을 질질 끌며 사라지는 소리뿐

다가서는 기척에 설레어
추억의 계단을 밟으며
고백하듯 기도하는
신비로운 소리뿐

노을에 두 손 얹어 사알짝 오므려 보아도
바람 향해 동그마니 가슴을 옹송그려 보아도
이제는 그 어디에도
스쳐 온 내 본래의 자리조차 없어

이곳에 있으면 그곳이 그립고
그곳에 있으면 이곳이 그리울 뿐.
<흔적>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고 있다.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 속의 일상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일까. 차가운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 지는 꽃을 막아서는 바람, 이걸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던진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는 지금 차가운 바다란 말인가. 지는 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노을은 누군가. 바람은 또 누군가. 시적 화자의 내면에 무슨 일렁임이 있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자신의 주위를 새삼스레 돌아본다. 들려오는 건 식탁에 부딪히는 수저 소리와 슬픔을 질질 끌며 사라지는 소리뿐이다. 보이는 건 영혼으로 읽는 책들과 넘기는 페이지마다 떠오르는 별빛뿐이다.
시적 화자는 이때까지 아무 일 없이 보내온 일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까. 그게 잘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자기 과거의 삶이 엉터리였다는 것일까. 이때 시적 화자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표현 기법이 기가 막히다.
영혼으로 읽는 책, 그 책을 넘기는 페이지마다 떠오르는 별빛이라는 표현은 시가 원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슬픔(추상)을 질질 끌며(구상, 근육감각 이미지) 사라지는 소리(청각 이미지)라는 표현도 아주 멋지다. 추상과 구상의 입체화, 지각적 이미지의 입체화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보다 절절하게 드러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귀는 계속 열려 있다. 다가서는 기척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님이 오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 다가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추억의 계단을 밟으며 고백하듯 기도하는 신비로운 소리뿐이다. 실망스럽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이미 그러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다가오는 기척이 현실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소중하기에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단 한 번 떠오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그만큼 그 추억은 소중하다. 이제는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현실을 살고 있다.
노을에(시각 이미지) 두 손 얹어(촉각 이미지) 사알짝 오므려 보아도(근육감각 이미지) 바람 향해(청각 이미지) 동그마니(시각 이미지) 가슴을 옹송그려 보아도(근육감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이제는 그 어디에도 스쳐 온 시적 화자의 본래 자리조차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지각적 이미지의 입체화가 시적 화자의 초연한 마음 상태를 잘 감싸주고 있다. 그리고 우아하고도 정숙하게 의식과 행동을 껴안아 주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천방지축 뛰쳐나갈 열정을 간신히 붙들어 놓고 있다.
이제 시적 화자는 초연함 속에서 진심의 소리만 여운처럼 고즈넉이 남기고 있다. 이곳에 있으면 그곳이 그립고, 그곳에 있으면 이곳이 그리울 뿐이라고. 어쩐지 시적 화자가 안쓰럽다. 꼭 안아 주고 싶다. 곱디고운 마음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아함과 정숙함으로 매번 뜨거운 열정과 그리움마저 잠재우고 살아야 하는 시적 화자가 가련해 보이기도 하다. 왜 구태여 그래야만 할까. 그게 인생의 정도인가. 반문해 보고 싶은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 마음속에
시집이 서너 권쯤 들어 있다며
속이 아닌 속을 뒤지다가

어설픈 시집 한 권 달랑 쓴 채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

나는 작고 동그란 무덤 앞에
“마음속에 시집 몇 권을 함께 묻다”라는
궁서체의 비석을 당장 세울 것만 같은데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오늘을 보내는 사이
다시

비바람과
어둑한 달빛에 묻혀서
눅눅한 시를 또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집 한 권을 내는 시인이다. 마음속에 시집이 서너 권쯤 들어 있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매번 속이 아닌 속을 뒤지곤 한다. 그런데 웬일인가. 어설픈 시집 한 권 내놓은 채 지금 죽어 가고 있다.
여기서 죽어 간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왜 죽어 간다는 것일까. 시다운 시를 제대로 못 써서일까. 아니면, 쓰고자 하는 시 세계를 늘 감추고 헛다리를 긁고 있다는 자책인가. 아니면, 저 깊숙이 숨겨 놓은 그리움에 대한 시를 열정적으로 토해내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일까. 자신의 작고 동그란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그 안에 ‘마음속에 시집 몇 권을 함께 묻다’라는 궁서체의 비문을 넣고 싶다는 시적 화자, 그러면서도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오늘을 보내고 있는 시적 화자, 비바람과 어둑한 달빛에 묻혀서 눅눅한 시를 또 쓰고 있는 시적 화자, 역시 우아한 시인의 모습을 간직한 시적 화자, 참으로 아름답다.
시도 아름답지만, 시 속의 시적 화자는 몇 배나 더 아름답다. 이 시적 화자를 내려다보며 표현하고 이 시적 화자를 가슴속에서 기르고 있는 시인도 아름답다. 왜 이 시대에 아름다운 시심, 아름다운 시적 화자, 아름다운 시인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되는 시간인 듯하다.
시가 필요한 세상, 왜 그럴까. 갈수록 거칠어가는 세상, 갈수록 포악해져 가는 세상,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 세상, 이 세상에 아름다운 감성과 우아한 감성과 섬세한 감성이 필요하다. 그것도 절실히 필요하다. 인간이 인간답고, 사람이 사람다운 시대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슬프다. 그래서 세상이 암담하다.
전금희 시인의 시들 속에는 이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가, 무슨 감성이 필요한가를 절절절 호소하고 있다. 다채로운 감성, 아름다운 감성은 지니되, 그 감성들을 키우고 가꾸되, 그 감성들을 절제미의 미로 다루고 담아 고이 간직하는 것, 그게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강조하는 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여행
만져질 리 없어서
기다릴 수 없어서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아주 올 것 같지 않아서

이러다 먼 훗날
나마저 없어질 것 같아서

너로 인해 남은 나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얼굴 붉히는 들녘 걸으며
연기처럼 너를 날려 보낸다.
<어떤 귀가>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져질 리 없어서, 기다릴 수 없어서이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만져질 리 없다는 것으로 봐서, 시적 화자는 생각만이 아닌, 상상만이 아닌 감각적으로 그리움을 만지고 싶나 보다.
상상을 현실로 당기고 싶은 것일까.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아주 올 것 같지 않으니, 이런 결심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러다 상상만으로 허공을 헤집다가 늙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위기감이 시적 화자를 자극한 것일까. 추억에만 잠겨서, 상상에만 붙들려서 살아갈 경우, 언젠가 시적 화자 자신마저 없어질 것 같아서, 그게 그리도 슬픈 것일까. 그동안 잘 참고 인내하며 우아함과 고상함을 잘 지켜왔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 고통을 호소한단 말인가.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인해 남은 시적 화자 자신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는 시적 화자 자신의 인생마저 부인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관마저 원망할 것 같아서, 자신이 애써 버티어 온 자존심마저 내팽개쳐 버릴 것 같아서, 시적 화자는 몸부림친다. 그러면서도 시적 화자는 얼굴 붉히는 들녘을 걷는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잊고자 외치는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에도 얼굴 붉히는 건 역시 상상만으로가 아닌 실제로 열정적인 만남을 희구하고 있어서일까. 그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으스레 달아오른다.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일까. 그리움의 본질, 사랑의 본질, 그걸 꿰뚫어 본 것일까. 육체적, 정신적 결합만이 참다운 사랑의 그릇 역할을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연기처럼 그리움을 날려 보낸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왜 믿지 못할까. 연기처럼 날려 보낸다는 시적 화자의 말이 왜 공허한 울림으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왜 그럴까. 사랑이 저 멀리서 빙그레 웃고 있어서일까. 조소하듯, 나무라듯, 후려치듯 웃고 있어서일까.

어느 날
내 둑으로 물이 넘쳐 스며들었다
그날로부터
눅눅해진 날들이 시작됐다

활활 타지 못한 불꽃은
연기만 솟아오르는 그을음뿐

그것마저 허상의 춤을 추다
사그라지고 또 사그라져 갔다

피식피식 쓴웃음 내비치면서
강한 후유증을 질질 끌면서도

끝내 나를 버리지 못해
환한 불꽃으로 피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충분히 젖어 버렸다.
<내 청춘>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활활 타지 못하고 연기만 솟아오르는 그을음뿐인 삶에 대해 회의를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넘쳐 들어온 물, 그 물 때문에 시적 화자의 나날은 눅눅해진 삶이 되고 말았다. 남은 건 그을음뿐, 얼마 지나서는 그 그을음마저 허상의 춤을 추다 사그라져 갔다. 그로 인해 시적 화자는 쓴웃음과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몇 번이고 환한 불꽃을 염원했으나, 끝내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탓에, 불꽃도 일구지 못한 채 흠씬 젖어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바라던 열정의 꽃이 피어나지 못한 채, 물에 흠뻑 젖어 버린 중년, 아예 포기한 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열정의 불꽃은 영영 운명으로부터 멀어지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가. 시적 화자는 아쉬운 듯,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하지만 불가능한 세계를 바라보는 듯, 체념의 눈길로 씁쓸히 바라보고만 있다.
이 대립적 세계는 물의 이미지(내 둑으로, 물이 넘쳐, 스며들었다, 눅눅해진 날들, 충분히 젖어 버렸다)와 불의 이미지(활활, 타지, 불꽃, 연기만, 솟아오르는, 그을음뿐, 환한 불꽃으로, 피어날)의 입체화 속에 계속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시적 화자의 내면과 그 갈등의 세계가 선명히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 입체화 때문이다.

말과 먹거리로
무슨 말을 뱉었느냐
무엇을 먹었느냐

세상의 중심에 서서
입만 있고 귀가 없었느냐
귀만 있고 입이 없었느냐

둘 중
너와 나는
누구였느냐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감각에만 매달린
물방울은 아니었느냐.
<시인아>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인에게 묻고 있다. 말과 먹거리로 무슨 말을 뱉었느냐, 무엇을 먹었느냐고. 세상의 중심에 서서 입만 있고 귀가 없었느냐고. 귀만 있고 입이 없었느냐고. 입만 있고 귀가 없었다면, 들을 귀는 버리고 주둥이만 지껄이며 살았다는 자책이 된다. 귀만 있고 입이 없었다면, 듣고 순종만 하고 할 말을 못하며 움츠리며 살았다는 한탄이 된다.
둘 중 시적 화자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도대체 시적 화자는 누구였단 말인가. 혹시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감각에만 매달린 물방울은 아니었느냐고 자책하며 숨을 죽이고 있다.
이 시대에 던지는 비전의 확대, 타인의 아픔에 대한 상상적 공감력 등도 없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자책하는 것일까. 이 시대의 시인들을 한꺼번에 호령하는 것일까. 시인으로서, 시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질책하는 것일까. 내면에서 솟구치는 불만과 회의를 한꺼번에 분출시켜 놓은 것일까.
이 시를 통해, 이 시대의 시인들, 그 갈 방향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시대와 시인, 이 시대 속에서 시인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자기 만족, 자기 토로, 자기 고백의 범주에서 벗어나, 시인은 이 시대와 공감하고, 이 시대의 구조적 모순에 항거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이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잘못된 깃발을 다시 세우고, 그 깃발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강한 채찍은 아닐까.

새초롬히 한밤중을 껌뻑이는 너는
애원 담긴 연민으로 부옇게 살고 있다

네모난 창문 열어 너를 불러들여
미로 같은 하얀 깃털을 달아 준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서로 덧껴입은 슬픔과 마주하여

눈빛 속에
너 하나 들여놓은 이 밤

하얀 영양제처럼 흘러드는 네 향기가
가장 지독하고 외로운 흉기가 되어

덫에 걸린 짐승처럼 허우적거리다
생의 불꽃처럼 사라지는 별똥별을 쫓는다

너는 지금 이 순간
내 생애 전부다.
<불면증>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애원 담긴 연민으로 부옇게 살고 있는 ‘너’를 한밤중에 불러들여 하얀 깃털을 달아준다. ‘너’는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슬픔과 하나다. 서로 덧껴입은 채 살아가는 존재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적 화자는 ‘너’를 눈빛 속에 들여 놓는다. 처음에는 하얀 영양제처럼 흘러든 너의 향기는 결국 가장 지독하고 외로운 흉기가 되어 덫에 걸린 짐승처럼 허우적거린다.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괴롭히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다 사라져 가는 별똥별을 쫓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로써 ‘너’는 시적 화자의 생애 전부로 자리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 하얗게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존재, 지독히 외로운 존재, 마치 고독한 현대인의 전형으로 돌아와 슬픔을 껴안는다. 무엇이 이토록 시적 화자를 고독하게 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일까. 왜 시적 화자는 슬픔을 덧껴입고 외로움에 짓눌려 살아가야 할까.
시 전반에 흰색의 시각적 이미지가 여러 군데 배치되어 있다. ‘부옇게’, ‘하얀 깃털’, ‘하얀 영양제’, 여기서 ‘흰색’은 절대 고독인 듯하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절대 고독,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면의 밤을 보낼 수밖에 없는 절대 고독, 이게 시적 화자의 내면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 절대 고독은 사랑과의 재회가 이뤄지는 곳에서 비로소 해소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시적 화자는 아직도 절대 고독을 벗겨 줄 사랑의 존재를 애타게 바라고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존재한다
이곳과 저곳을 차단하고 서서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보이지 않는다

문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찾는다

새로운 문을 만난다는 것은
자유로운 바람이다.
<무제>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절대 고독’은 스스로 갇혀 있음으로 인해 시작된 거라고. 이곳저곳을 차단하고 서서, 벽에 갇혀 있다고 단정하고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하긴 하지만 절대 고독에 갇혀, 스스로 벽을 만들어 그 안에 갇혀 지내는 지성인, 늘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던 존재, 이제는 그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문을 만나기 위해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 문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건 도대체 뭘까. 바로 그것은 자유로운 바람이다. 그렇다. 인생에도 추억에도 그리움에도 자유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그 자유로운 바람이야말로 모든 갇힘의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왜 여태 그 자유로운 바람을 외면하고 살아왔을까. 이제라도 자유로운 바람을 맞이하고, 소중히 여기고, 마음 깊이 가슴 깊이 영혼 깊이 받아들여, 절대 고독에서 벗어나고, 지독한 외로움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사랑의 결실이 없어서, 늘 절망하고 포기하고 자포자기하고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활기찬 여생을 꾸려가는 길은 바로 자유로운 바람을 맞이하여 자신이 스스로 자유로운 바람이 될 때 비로소 열릴 것이다.

블로그에서 그녀를 발견한 후로
보름이 지나서야 다시 볼 수 있었다
마음 알릴 때는 종 대신 확성기를 쓰고 싶었지만
잠에 묻혀 깊은 꿈을 꾸는 종을 잊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느낌으로 살아온 종이
눈까풀 파르르 파들거리더니
뜨거운 것이 핑 고이는 두 눈을 들었다
서로가 눈이 흐려 잘못 보았지만
나는 스스로의 회한을 감싸 안고
그녀의 들뜬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다
구름 너머 열리는 세계와
기억의 노선을 만나기 위해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을 열었다
지난 앙금들이 바닥을 구르며 헤엄치는데
누룩에 담긴 경이로움으로
몸속에 스며 달려드는 취기가 미소 지었다
어제와 오늘의 만남을 물으며
하늘 언덕으로 더 가까이
자라나는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남.2>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쩌면 오래도록 떨어져 있었던 내면, 좀처럼 마음을 알릴 수 없었던 터라, 때로는 종 대신 확성기를 쓰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잠에 묻혀 깊은 꿈을 꾸는 종을 잊은 채 살아왔다. 느낌으로 살아온 종이 드디어 꿈틀거린다. 눈까풀 파르르 파들거리더니 눈시울이 뜨겁게 핑 젖는다. 그때 두 눈을 든다. 시적 화자와 내면은 서로 눈이 흐려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스스로의 회한을 감싸 안고 내면의 들뜬 이마를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는 두꺼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구름 너머 열리는 세계와 기억의 노선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자 지난 앙금들이 바닥을 구르며 헤엄친다. 이어 몸속에 스며 달려드는 취기가 미소 짓는다. 서로 어제와 오늘의 만남을 상기하며 마음문을 연다. 하늘 언덕으로 더 가까이 자라고 있는 마음을 바라보며, 새날을 꿈꾼다.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않겠다고. 헤어진 채 자신의 욕망도 꿈도 열정도 짓누르고 억압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만남의 의미에 더 무게를 싣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금희 제2시집에 수록된 시 세계를 대략 살펴보았듯이, 전금희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관찰하고 답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의 존재 가치와 의미, 그 소중함에 대해 시적 형상화를 통해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특별한 표현 기법의 틀에 의존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시상의 흐름, 엷은 베일에 가린 듯한 상징의 활용, 구상과 추상의 입체적 조화로움, 지각적 이미지의 어우러짐, 새로운 각도로 해석한 시적 구현 등을 시 창작의 밑바닥에 깔고 다채로운 감성의 파노라마를 펼쳐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제1시집에서는 한 편 한 편의 시적 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제2시집에서는 시 전체가 하나의 시상의 흐름 속에 피어나는 꽃동산을 만드는 데 치중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한 시심으로, 때로는 울컥한 심정으로, 때로는 박하사탕처럼 상큼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솜씨가 매우 매력적이다.
주체 노출보다는 상징의 고리로, 진부한 해석보다는 신선한 해석으로, 설명보다는 그림 그린 듯한 표현 기법으로 하나하나 완성된 전금희 시인의 시들이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어 아주 좋았다.
앞으로도 더욱 치열한 시정신으로 이미지와 상징이 잘 결합하여 상큼하고도 경이로운 제3, 제4, 제5시집을 펴내리라 믿는다.
아름다운 시집이 세상에 나오는 이 기쁨을 26년간 같이 시 공부하며 시 창작의 오솔길을 걸어가는 한실문예창작 문우들과 향긋이 나누고자 한다. 참 멋지다.

- 수박 맛이 유달리 달콤하고 시원하고 싱그러운 여름날 오후에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동화작가, 희곡작가, 사진작가, 화가)

  작가 소개

저자 : 전금희
1952년 강화도에서 태어났으며경기 대학교를 졸업했다.시집으로 <가을은 어디나 빈자리가 없다>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실문예창작 회원* 포시런문학회 회원

  목차

전금희 시인의 제2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박덕은
작가의 말
祝詩 - 박덕은

1장 - 그리움
2장 - 외로움
3장 - 연애
4장 - 사랑
5장 - 이별
후기 - 나는 시로 말하고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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