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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계용묵
1904년 9월 8일~1961년. 평북 선천 태생. 본명은 하태용(河泰鏞). 한국의 소설가.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당에서 수학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1928년 일본에 건너가 토요대학 동양학과에서 수학했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된 바 있으며 1925년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의 현상 문예에 당선되었다.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되고, 1928년 ‘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蛛)’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5년 ‘조선문단’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1938년에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3년에는 일본왕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 좌우익 문단의 대립 속에 중간적 입장을 지키며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타계하였다. 1944년 소설집 ‘병풍에 그린 닭이’, 1946년 ‘백치 아다다’, 1950년 ‘별을 헨다’ 등과 1955년 수상집 ‘상아탑’을 남겼다. 작품 경향은 초기에는 현실주의적이고 경향파적이었으나, 1935년 ‘백치 아다다’ 이후에는 인생파적이며 예술파적인 작품 경향을 보였으며. 차차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 : 김남천
1911년 평남 성천군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고,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1년에 제적되었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1931년에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출옥 후에 감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하고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 문제를 놓고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도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 임화·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장편 ≪대하≫(1939), 연작인 ≪경영≫(1940)과 ≪맥≫(1941) 등을 발표했다.8.15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전쟁에도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했으나, 1953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남천도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53년이나 1955년에 사형당했다는 설, 1977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저자 : 김동인
대지주이자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기독교 학교인 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에 차례로 다니다가 중퇴하고,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과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17년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했다가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9년 2월 주요한ㆍ전영택ㆍ최승만ㆍ김환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인 《창조》를 발간, 「약한 자의 슬픔」 「배따라기」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귀국했는데, 동생 김동평의 3ㆍ1만세운동 격문의 초안을 잡아준 일로 수개월간 옥살이를 했다.줄곧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며,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과 시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1921년 경영난으로 인해 《창조》를 제9호로 폐간한 뒤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1924년 첫 창작집인 『목숨』을 출판하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간행했으나, 다음 해 제5호로 폐간했다.1926년에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관개사업에 손을 댔고, 1928년에는 동생과 함께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으나 역시 실패하여 그의 궁핍은 극단으로 치달았을 뿐 아니라 그 사이 아내도 떠나고 말았다. 그런 동안에도 김동인은 「광염 소나타」 「운현궁의 봄」 「붉은 산」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았다.광복 이후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그는 병마와 싸우다가 6ㆍ25전쟁 중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저자 :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선인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천명으로 개명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조선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기자로 활동했다.1932년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했고,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사슴〉이 유명하다. 1938년 1월 1일 처녀시집 《산호림》을 발표했고, 이후 두 번째 시집 《창변》과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출간했다.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는 유고시집으로 지인들이 노천명의 사후, 새롭게 발견된 시들을 모아 발행한 것이다. 노천명은 경제학자 김광진과 사랑이 어긋난 뒤 평생 홀로 살면서 고독과 슬픔의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1957년 6월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 : 이상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명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보성고보 재학 시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풍경>이라는 제목의 유화를 그려 1등에 입상하였다. 1929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의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이해 12월 조선건축회 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각각 당선되었다.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던 잡지 《조선》 국문판에 처녀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인 『12월 12일』을 발표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과 건축》에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등 20여 편의 시를 일본어로 발표하였다. 한편 ‘이상(李箱)’이라는 필명 외에 ‘비구(比久)’ ‘보산(甫山)’ 등의 필명으로도 작품 활동을 하였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1933년 폐결핵으로 총독부 기수직을 사직하고, 요양 중에 만난 기생 금홍과 종로에서 ‘제비’라는 다방을 개업하며 동거를 시작한다. 이해에는 문학단체 ‘구인회’ 활동을 비롯해, 《가톨닉청년》지에 <꽃나무> <이런시> 등의 시를 국문으로 발표하였다.1935년 경영난으로 다방 ‘제비’를 폐업하고 금홍과도 결별한 이후 계속된 경영 실패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듬해에는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이복동생 변동림과 결혼하고 그해 10월 재기를 위해 일본 도쿄로 떠났으나 폐결핵 악화로 1937년 4월 17일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소설 「종생기」, 수필 「권태」 등이 발표되었다.
저자 : 이효석
1907년 강원도 평창 출생. 아호는 가산(可山).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1학년인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입선하며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1928년 「도시와 유령」 이후 단편소설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는 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나 그 이념에 동조하는 소위 ‘동반자작가’로서 알려졌다. 교수직과 작품 집필을 병행한 1932년 이후 순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정적 경향으로 작품색을 선회하며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한 다수의 걸작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순수문학 동인 구인회(九人會) 창립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2년 35세로 요절하기까지 단편소설을 위주로 장편소설, 시, 희곡, 평론,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저자 : 채만식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백릉(白菱)·채옹(采翁).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채규섭(蔡奎燮)의 6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稱田大學)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1923년 중퇴했다. 그 뒤 《조선일보》·《동아일보》·《개벽》 등의 기자로 전전했다. 1936년 이후에는 직장을 가지지 않고 창작생활만을 했으며 1945년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해 이리로 옮겨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1920년 은선흥(殷善興)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그 뒤 김씨영(金氏榮)과 동거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단편소설과 희곡·평론·수필을 썼다. 특히,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장편으로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탁류(濁流)」·「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금金의 정열」·「여인전기」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레디메이드 인생」·「치숙(痴叔)」·「패배자의 무덤」·「맹순사」·「미스터 방(方)」 등을 들 수 있다. 희곡으로는 「제향날」·「당랑(螳螂)의 전설」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 : 최서해
함북 성진 출생. 본명은 최학송(崔鶴松).1918년 어머니와 간도로 들어가 유랑생활 및 농노생활을 함.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고국〉으로 등단. 신경향파 문학의 기수. ‘빈궁의 문학’이라는 1920년대 ‘단자적’ 영역을 만듦.작품으로 〈탈출기〉 〈홍염〉 〈서막〉 〈갈등〉 〈무명초〉 〈큰물 진 뒤〉 〈박돌의 죽음〉 외 다수가 있다.
저자 :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성장한다. 강경애의 술회에 의하면, 그녀는 이 시절에 집안에 있던 ≪춘향전≫ 등과 같은 고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1921년에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923년 10월 엄격한 종교 생활에 항의해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하자 동경 유학생이던 무애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다.강경애는 1924년 5월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책 한 권>이라는 시를 가명으로 발표하고, 1925년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1931년에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장연 군청에 고원으로 부임한 장하일과 결혼하지만 장하일의 조혼한 아내로 인해 인천과 간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생활한다.이후 <그 여자>(1932), <부자>(1933), <소곰>(1934)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장연과 만주 간도 등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1934년 그녀는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연재한다. 이 작품은 황해도 용연과 인천을 배경으로 하여 농민들의 힘겨운 삶과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 문제작이다.1936년 강경애는 용정에서 안수길·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 동인을 결성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해에 <지하촌>과 같은 사실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조선판에 <장산곶>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했으나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2월에 사영해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26일 생을 마감한다.
저자 : 노자영
1900년 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 신문학을 접하면서 톨스토이, 하이네, 보들레르, 단눈치오를 탐독했다. 졸업 후 귀향해 교편을 잡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전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불태우며 “죽기까지 문학에 헌신”하고자 했다. 1920년 봄, 교사 생활을 접고 상경해 한성도서주식회사 편집부에 취직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하는 ≪학생계≫와 ≪서울≫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여기에 시를 발표했다. ‘花爛春城’을 줄여 ‘춘성(春城)’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이때부터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뒤 울분과 억울함,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다 1926년 늦은 나이로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1931년 문단에 복귀, 1934년에 ≪신인문학≫을 창간하며 출판 사업에 뛰어들지만 경제난으로 지속하지 못했다. 1937년 ≪조선일보≫에 취직해 소설 ≪인생특필≫을 연재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재확인하고 시집 ≪백공작≫을 비롯해 수필집을 발간하며 정력적으로 문학 활동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1940년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프롤로그 휴식, 나를 돌보는 소중한 시간
여름날의 추억 - 노자영
산가일기 - 노자영
백양사에서 - 노자영
세심천의 달밤 - 노자영
해운대 - 최서해
괴물행장록 - 김동인
여행 가자는 편지 - 김남천
양덕온천 회상 - 김남천
정릉 일일 - 계용묵
천렵(川獵) - 계용묵
전원(田園)에서 - 계용묵
피서의 성격 - 계용묵
고독 - 계용묵
해변단상 - 노천명
향토유정기 - 노천명
여중기 - 노천명
향산기행 - 노천명
여름 풍경 - 채만식
여름의 원두막 정취 - 채만식
비응도의 쾌유 - 채만식
백마강의 뱃놀이 - 채만식
귀향도중 - 채만식
어촌점묘(漁村點描) - 강경애
처녀 해변의 결혼 - 이효석
주을의 지협 - 이효석
전원교향악의 밤 - 이효석
소하일기 - 이효석
첫 번째 방랑 - 이 상
산촌여정 -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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