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큐레이션 리커버 출간
★ 김화진, 김희선, 위수정 소설가 추천
“박경리를 경유하지 않고
여성의 불안과 욕망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_위수정(소설가)
『토지』 너머 박경리를 발견하는 또 다른 길
최산호 작가의 일러스트를 입은 박경리 장편소설 큐레이션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산북스에서 한국문학사의 거대한 이정표, 박경리의 작품 세계를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건넨다. ‘이 시대의 낭만성’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작가의 작품 중 세 작품―대표작 『김약국의 딸들』, 첫 장편소설 『애가』, 대표 연애소설 『표류도』―을 선별, 새롭게 재해석해 소개한다. 이는 『토지』로 대표되는 거대한 서사 너머, 박경리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을 조명하고 ‘현재진행형의 문학’으로서 박경리를 다시 읽기 위한 시도다.
이번 큐레이션 리커버는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를 통해 다시 읽는 박경리를 지향한다. 무선제본을 적용해 일상적으로 소장하기 좋은 형태로 기획했으며, 고전의 품격을 강조해온 기존 박경리 컬렉션과는 다른 감각을 제시한다. 서정성과 현대성을 아우르는 최산호 작가의 일러스트는 박경리 문학이 지닌 양가적 정서—아름다움과 비극, 생명력과 소멸—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화사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일러스트 속에서 인물들의 욕망과 고독, 그리고 끝내 삶을 선택하는 의지가 은유와 반어로 살아난다. 이 생동하는 이미지들은 ‘낭만성’을 중심에 두면서도, 그 이면에 공존하는 고독과 결핍을 함께 드러낸다. 그렇게 이 책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낭만의 나날을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올 것이다.
남편을 잃고 금기된 선택 앞에 선 한 여자
시대의 가부장적 질서에 따르지 않기로 선언하다『표류도』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거론되는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1959년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당대의 호평을 받았고, 박경리의 대표적 연애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1959년 11월 20일에 발간된 『표류도』는 초판본에 이봉상 화백이 표지화와 면지화로, 천경자 화백이 권두화로 참여했고, 박재삼 시인이 교정·교열 작업을 진행하는 등 무척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이는 등단한 지 5년이 채 되지 않는 신인 작가 박경리와 그의 첫 창작집 『표류도』에 대한 문단의 관심과 기대가 얼마만큼 큰 것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박경리는 여러 연애소설을 써내면서 사회의 통상적 윤리나 규범에 무관심해 보이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윤리와 기준을 지닌 주체적 인물을 그려냈다. 특히 『표류도』에서는 분명한 저항의 논리를 품은 인물이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외부의 폭력에 맞서는 과정을 그렸다.
“당신의 정절보다 나의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
외부의 폭력에 대응하는 강인한 생명력
현실의 고난과 싸우는 박경리 여성상의 근원주인공 현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지지와 갈등 속에서 표류하듯 삶을 이어간다. 한국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이후 신문사 논설위원이자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상현과 사랑에 빠진다. 상현은 그녀의 직업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애정과 책임감으로 관계를 이어가며 결혼을 원한다. 그러나 현회는 스스로 돈을 벌어 삶을 꾸려가는 주체로서, 사랑은 지속하지만 그 외의 생활에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 유부남이라는 조건과 서로 다른 성장 배경 또한 이 관계의 걸림돌이 된다. 결국 상현은 사랑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삶을 함께 짊어질 상대가 되지는 못하며, 이들의 관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회는 특별한 귀책 사유 없이도 주변인들에게 끊임없이 비난받는데, 이는 가부장적 전통이 여전히 견고한 1950년대에 사생아를 낳은 전쟁미망인이자, 생계를 위해 다방의 마담으로 살아가는 젊고 아름다운, 재능 있는 여성이라는 그의 조건 때문이다. 주부인 계인과 순재, 그리고 동창들은 도덕과 규범을 내세워 현회의 직업과 처지를 비난하지만 정작 그들은 음지에서 고리대금이나 부동산 투기와 같은 사회적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질받는 현회는 얼굴이 아닌 자신의 노동으로 삶을 지탱한다. 홀로 된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 유복자인 딸은 물론 종업원 광희와 먼 친척 상주댁 부부까지 돌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낸다. 집안의 몰락과 사랑하는 이와 자식의 죽음,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상처를 겪고도 그는 절망하거나 물러서지 않으며, 비굴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적응하며 생명을 지탱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는 현회의 태도는 외부의 폭력에 맞서는 그의 확고한 저항 논리라 할 수 있다.
나는 강인한 채찍으로 내 마음을 후려쳤다.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 생명이 있기 위하여 나를 변혁시켜야 한다. 겨울이 와 산야에 흰 눈이 덮이게 되면 털이 하얗게 변하고, 여름이 와서 숲이 우거지면 나무껍질처럼 털이 다갈색으로 변하는 토끼라는 짐승의 생리를 나는 닮아가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얼마나 유구한 세월을 두고 인간과 자연 속에서 그 끈질긴 싸움을 해왔던가. 끊임없이 자기를 변혁하고 현실에 적응해가며 생명을 지탱해오지 않았던가. (332~333쪽)
절망에 빠진 듯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하고도 인간적인 현회의 존재는 사랑과 자아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생생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행적과 선택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의 소용돌이 우리 소설이 지닌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며, 인간을 보다 입체적이고 폭넓게 바라보게 만든다.
시간을 견뎌온 작품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세 편의 소설로 읽는 새로운 낭만에 대하여여성 독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연애소설이 범람하던 1950년대, 박경리는 기존 연애 서사가 보여주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작품을 씀으로써 자신만의 위치를 확립한다.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랑에 종속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끝까지 묻는 과정이었다. 사회적 부조리에 타협할 수 없는 의지와, 가정이나 결혼으로 타협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깊은 탐구가 이 시기 박경리의 연애 서사에 이미 꿈틀대고 있었다. 사랑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바라고, 삶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살아가려 하는 것. 결국 모든 선택이 자신의 몫임을 받아들이는 이 낯선 낭만의 세계는 박경리 문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이러한 박경리의 낭만성은 불확실성과 선택의 책임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를 비춘다.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강렬한 여성 인물들은 사랑과 삶, 선택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에게 질문해온다. 박경리의 문장은 오래되었지만, 그 질문은 한 번도 낡은 적이 없다.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끝내 살아가려 하는가. 박경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질문을 시작했다. 이제 그 질문을 다시 이어갈 차례다.

나는 미구에 올 내 죽음을 바라볼 때, 내 혈육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 찬수의 죽음은 괴뢰군의 유기시체나 차량 밑에 깔려 죽은 그러한 행인의 시체와 더불어 뜻을 갖는다. 죽음은 애정을 결정적으로 짓밟는다. 투명한 어둠 속 ― 내 감각은 때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 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신은 없었다. 인간이나 기계가 오만불손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절박한 내 마음의 사실인 것이다.
어젯밤에도 우리는 밤거리를 헤매어 다녔다. 상현 씨의 따뜻한 손길이 지금도 머리카락에서 느껴진다. 집에 돌아가서도 나는 밤늦게까지 그를 생각했다. 몹시 피곤하다. 잠을 자지 못한 때문이다. 몽롱해지려는 시야를 넓혀본다. 마돈나는 여전히 고물상 같은 모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봄은 바로 눈앞에와 있는 것 같은데 그을릴 대로 그을린 커튼이 넝마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봄이 빨리 와서 난로라도 치워버렸음 속이 시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