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쉿, 나의 세컨드는> 이후 7년만에 펴내는 김경미의 4번째 시집. 시인은 시세계에 섬세한 떨림을 더하고 감춰진 일상의 틈에서 건져올린 불화와 상처, 외로움에 대해 깊게 천착한다. 더불어 개성적인 상상력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사유를 펼쳐나간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집요하게 간극이나 사이(틈)를 파헤친다. 그러나 끝내 불화를 향해 치닫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틈은 곧 '겹'으로도 변주된다. 틈과 겹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므로 겹치지 않는 사물과 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노래한다.
출판사 리뷰
매혹적인 불화에서 길어올린 다정의 시편들
청춘의 열정과 불안을 예민하게 탐구하고 상처와 허무로 가득한 비극적인 세계를 독특한 여성적 어법으로 전개해왔던 김경미 시인의 신작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가 출간되었다. <쉿, 나의 세컨드는>(2001) 이후 7년의 공백을 깨고 펴내는 네번째 시집이다. 오랜 침묵의 세월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세계에 섬세한 떨림을 더하게 하고 감춰진 일상의 틈에서 건져올린 불화와 상처, 외로움에 대해 더 깊게 천착하게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을 읽다보면 불안한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아릿해지다가도 깊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연민에 따듯하게 젖어든다.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개성적인 상상력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사유를 펼쳐가는 장면들이다. 「야채사」의 경우 ‘고구마와 가지’에서 시작해 ‘사막과 낙타’를 가로질러 ‘당신과 나’의 관계에 이르는 발랄하고 독특한 어법이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긴 여운을 준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달디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야채사(野菜史)」 전문
그러나 이 시처럼 관계에 대한 사유가 발랄하고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집 전반에 걸쳐 관계맺음에 대한 비관적인 상상력이 주를 이룬다. 시인에게 시는, 일상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지고 삐걱거리거나 궤도를 이탈하는 듯 여겨진다. 그래서 시인의 하루하루는 종종 버석거림과 틈이 벌어지는 간극이 감지된다. 때문에 시인은 “세상과 세상 사람 모두가 어색하고 적응되지 않아 툭하면 말을 더듬거나 물컵을 쏟는 자. 단체버스 같은 거 타면 한사코 맨 뒷자리에 혼자 앉으려는 자. 가끔씩 비슷한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일터로 가는 자. 늘 어딘가 그렇게 부족하거나 기울거나 떨어져나간, 보통사람처럼 살면서도 보통사람처럼 살아지지 않는 이상한 마음 때문에 늘 실수와 자격지심과 주저를 달고 사는 자”(시인의 산문―「부재에 홀리다」)와 같다. 이처럼 사람과 세계에서 동떨어져 사는 자의 일상은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나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시공간은 시가 꽃피는 자리이자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상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으나 그냥 지나치고 마는, “갑자기 눈물이 핑,”(「글씨의 시절」) 도는 순간이나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때와도 같다. 그래서 시인은 “침울할 때가 좋”고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조금씩 이상한 일들 3」)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은 다음과 같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한낮의 버스 안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눈물의 횟수」 부분
시가 탄생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순간들은 시인으로 하여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칸나꽃이 “크고 붉은 동물”(「조금씩 이상한 일들 4」)로 변하거나 창세기부터 존재해온 인간이 어느 순간 먼지로 살아간다는 기발한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럴 리 없다 한 먼지가 죽었다는 부음 검은 먼지를/갈아입고 교통체증에 서버린 먼지들의 경적소리를/듣다가 돌아와 식탁 위 몽실몽실한 먼지로/아이먼지를 만들거나 남편먼지가 다른 먼지를/사랑한다고 친구먼지가 전화해 울 때 나라는 먼지는/시라는 먼지를 쓰고//온 세계에 그렇게
작가 소개
저자 : 김경미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되었다.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1989), <이기적 슬픔들을 위하여>(1995), <쉿, 나의 세컨드는>(2006), <고통을 달래는 순서>(2008), <밤의 입국 심사>(2014) 등의 시집을 펴냈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 주최 ‘국제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IWP)’ 참여작가로 선정되어 3개월간 참여했고, 노작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 <밤의 입국 심사>가 ‘2015 오늘의 시’ 선정 ‘올해의 최고 시집’으로 뽑힌 바 있다. 방송작가로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시작으로 <김미숙의 음악살롱>, <전기현의 음악풍경>, <노래의 날개 위에> 등의 원고를 썼으며, 2007년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을 수상했다. 에세이집으로 <바다, 내게로 오다>, <행복한 심리학>, <일상생활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한라대, 경희사이버대에서 ‘방송작가실기’, ‘디지털 스토리텔링’, ‘일상생활의 심리학’ 등을 강의했다.
목차
제1부 당신이라는 근거
이러고 있는,
야채사(野菜史)
혼선
다정에 바치네
다정이 병인 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사랑의 근거
조금씩 이상한 일들 1
멸치
겹
조금씩 이상한 일들 2-저녁의 답장
고요에 바치네
누가 사는 것일까
만유인력
한낮, 대취하다
화상
제2부 맥락 없는 말을 하다
그런 말들이 1
그런 말들이 2
맥락 없음에 바치다
사람 시늉
상심
잘 모른다
그날의 배경
먼지
구멍
바닷가 절, 불타다
질-개작
눈물의 횟수
해 진다 어디에나
글씨의 시절-방송국에서
환골
무언가를 듣는 밤
제3부 미안하다 저녁이여
변덕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봄, 무량사
7월, 넝쿨장미, 사랑
조금씩 이상한 일들 3
물의 미제(未濟)
줄 이야기
연희
식물일지 2003
해질녘
불참
겨울, 부석사, 농구
문밖의 문
첫눈
인간론
애인도시-애정성시
생화
제4부 마음이 마음을 낳다
생심기
그들의 중년 1
그들의 중년 2-명함
나의 노파
해명
다정이 나를
자동응답기
종군기
서정의 흉가
이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조금씩 이상한 일들 4-입관실에서
그 세월에
일몰의 기억들
소란지심-상권
바다의 권유
요즘 내 문제는
산문│부재에 홀리다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