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파시즘의 비인간성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대표작
모라비아의 뒤를 잇는 이탈리아 작가, 엘리오 비토리니의 대표작으로, 현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작품들 중 하나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홀로 사는 어머니를 찾아 고향으로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에 검열을 피해 ‘이름과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은 어떤 특정 사상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비토리니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엮음으로써 시칠리아를 하나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또한 한 편의 시와 같은 강렬한 암시성과 초현실적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모욕당한 세상’, 그리고 ‘모욕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며, 우리는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부조리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모욕당한 세상”을 분노와 침묵 속에, 희망 없이 살아 내던 한 남자, 실베스트로
희망을 되찾아 떠나는 고향으로의 여행
그해 겨울, 전쟁과 대학살로 얼룩진 이탈리아. 신문에는 각종 성명서가 실리고 실베스트로는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분노를 느끼며, 하지만 “핏속부터”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저 침묵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집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시칠리아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 볼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받는다. 고향을 향한 여행 도중 실베스트로는 여러 시칠리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배에서 만난 오렌지를 파는 조그마한 시칠리아 남자. 이 오렌지 사내는 국민 모두가 잘살 것 같은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품은 채 “팔리지 않고”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는” 오렌지를 말없이 아내에게 내민다.(“아무도 사지 않아요……. 아무도 사지 않아요……. 독이라도 든 것처럼……. 빌어먹을 오렌지.”)
이 오렌지 사내를 수상한 사람으로 규정짓고 잡아들이려는 두 공무원을 향해 “냄새가 난다.”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한 남자,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고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롬바르디아 거인.(“우리는 슬픈 사람들이지요. 아주 슬프지요. 아니, 서글프지요…….”)
사람들에게 갈아야 할 이와 발톱이 있다면, 진짜 칼날을 갈아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칼갈이 사내, 칼로제로.(“칼들? 가위들? 당신은 이 세상에 아직도 칼과 가위들이 남아 있다고 믿어요?” “아, 모든 사람들에게 진짜 칼날이 있다면!”)
모욕당한 세상을 위해 울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고통 때문에 우는 사람들에 대해 성토하는 마구(馬具)상, 에제키엘레.(“세상은 크고 아름답지만, 많은 모욕을 당했어요. 모두들 각자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모욕당한 세상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세상은 계속해서 모욕을 당하고 있지요.”
세상에 필요한 건 칼들이 아니라 ‘생명’을 담은 ‘물’이라고 믿는 포목(布木)상 포르피리오(“오직 살아 있는 물만이 이 세상의 모욕을 씻을 수 있고, 모욕당한 인류의 목마름을 풀어 줄 수 있어.”)와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해 목숨을 잃은, 영혼으로 떠도는 동생, 리보리오.(“공연을 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그들의 모든 것을 운문으로 옮기고, 패배자들의 복수를 해 주고, 승리자들을 용서할 때까지 말입니다.”)
실베스트로가 고향에 도착해 만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암벽에 동굴을 파서 만든 집에서, 창문도 없이 맨땅바닥에서 가축과 함께 살아가며 달팽이나 야생 풀뿌리로 연명한다. 그들 삶에 대한 묘사 하나하나가 전부, 시칠리아의 암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침묵으로써 현실을 외면하던 실베스트로는, 이러한 약하지만 순박하고, 가난하지만 신념 있는 시칠리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인류와 세계에 대한 희망을 서서히 찾아 간다.
파시즘의 비인간성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대표작
비토리니는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등장인물들에게 뚜렷한 성격을 부여하거나 상징적 묘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물 각자가 하나의 이미지이자 메시지로 존재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굶주림에 고통 받는 나약한 시칠리아 국민(오렌지 사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상주의자(롬바르디아 거인), 칼과 가위, 혹은 총과 대포를 쥐고서라도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 급진적 혁명가(칼갈이 사내), 저항과 행동이 아닌 연민과 위안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온건주의자(에제키엘레), 그리고 생명을 담은 ‘물’로 세상을 씻어 내야 한다는 신앙의 상징(포르피리오)에 이어 그와는 반대로 물 대신 ‘포도주’로 사람의 정신을 흐리고 현실을 잊게 하려는 파시즘 체제 옹호자(콜롬보)까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각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훌륭하게 대변한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에서는 이 작품을 비인간적 전쟁과 제국주의 정책, 쇠락해 가는 조국, 억압받고 고통 받는 국민들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였으며, 출간 당시에는 당국의 검열 때문에 ‘이름과 눈물’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했다. 비토리니 역시 이 작품을 쓸 무렵 내전에 휩쓸린 스페인으로 건너가 공화주의자들과 합류하려다가 실패하고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에서 추방당하는 등, 파시즘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비토리니는 일종의 전략으로 한 편의 시와 같은 상징성과 암시성, 서정성이 넘치는 문체와 더불어 현실과 환상이 교묘하게 엮인 서술 방식을 택했다. 작품 마지막에 삽입된 “오해나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히겠는데, 이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의 주인공이 자서전의 인물이 아닌 것처럼, 시칠리아는 단지 우연히 시칠리아일 뿐이다. 단지 시칠리아라는 이름이 페르시아나 베네수엘라 같은 이름보다 더 멋지게 들리기 때문이다.”라는 작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비토리니는 시칠리아를 현실과는 괴리된 환상 속 공간처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교묘하게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상징적 언어 모델”이라는 찬사와 어울리는 정치적, 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어 낸 것이다.
현실과 과거, 기억과 환상을 오가는 여행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아내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의 기본 줄거리는 주인공 실베스트로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단순한 공간에서 공간으로의 이동이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조차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그해 겨울”, “상실된 인류”에 대한 “추상적인 분노”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내면 묘사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그해 겨울”이 언제인지, “상실된 인류”의 주체는 무엇인지, 또한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짚어 주지 않는다. 실베스트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역시 “롬바르디아 거인”, “콧수염”과 “무수염”, “조그마한 시칠리아 사내”,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목소리를 지닌 조그마한 노인”, 황소처럼 튼튼하지만 슬픈 표정의 “카타니아 젊은이”, 환자처럼 “목도리에 둘러싸인 젊은이” 등으로 불리며 그들의 이미지만 부각될 뿐, 이름과 나이, 소속 같은 ‘신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실베스트로는 여행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동시에 현실인지 회상인지 모를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린 시절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작품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희곡 형태의 구성으로 대입되기도 하고, 어둠과 빛에 대한 묘사는 흡사 무대장치를 연상시키며, 소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피날레를 올린다. 주인공조차 자신이 현실 속에 있는지 환상에 빠져 있는지 모르는 이러한 설정 덕분에 독자들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어떤 가상 공간을 여행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 이 작품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상실된 인류’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모욕당한 세상’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부조리를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소개
저자 : 엘리오 비토리니 (Elio Vittorini)
1908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해안 도시인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철도원인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시칠리아 내륙 지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철도 무임승차권을 이용해 처음으로 이탈리아 반도로 탈출을 시도했으며, 이런 시도는 이후 4년 동안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 아버지의 권유로 회계사 학교에 입학하지만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뒀다.
열아홉 살 때, 시인 살바토레 콰시모도의 누이동생 로사와 결혼하여 베네치아줄이아로 이주해 건설회사 회계원으로 일했다. 이듬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단편소설, 비평, 시사평론, 산문 등 다양한 글들을 기고했으며, 1931년, 첫 단편집 『소부르주아』를 출간했다. 이후 납중독으로 인쇄소를 그만두자 생활이 어려워진 비토리니는 윌리엄 포크너, 에드거 앨런 포, 로렌스 등 영어권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출판사 편집 일을 틈틈이 도와주며 생활비를 벌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스페인으로 건너가 공화주의자들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에서 추방당했다. 이듬해부터 2년 동안 문학지 『레테라투라』에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연재했다. 1941년, 파시즘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름과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작품은 증쇄를 거듭하며 인기를 끌었으나 결국 당국에 압수되었다. 비밀리에 이탈리아 공산당과 접촉하던 비토리니는 1943년 7월 26일, 파시즘 정부가 무너진 다음 날 비밀 집회 중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9월 8일에 풀려났다. 독일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피첸레 총파업을 조직하다 독일 경찰에 추적당하자 산으로 피신했다. 그동안 레지스탕스 소설 『인간과 비인간』을 집필하였다. 장편소설 『붉은 카네이션』(1948), 『에리카와 그의 형제들』(19556), 평론집 『공개적인 일기』(1957) 등을 출간했으며『일 폴리테크니코』, 『일 메나코』 등의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1963년 지병으로 밀라노의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고 3년 후,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역자 : 김운찬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 『현대 기호학과 문화 분석』, 『「신곡」 읽기의 즐거움』이 있으며 역서 『신곡』, 『논문 잘 쓰는 방법』, 『대중의 슈퍼맨』, 『소설 속의 독자』,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미네르바 성냥갑』,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까칠한 가족』, 『까칠한 가정부』 등이 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이탈리아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1부
2부
3부
4부
5부
에필로그
작품 해설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