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은 철학과 인문학의 시각을 빌려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는다. 저마다의 읽기가 수없이 많은 갈래를 만들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세계가 생길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의 세계가 단지 밈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은 단지 하나의 문일 뿐이다. 독자는, 도슨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면 된다.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아홉 번째 권으로 출간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도슨트 변지영은 임상심리학 박사라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얼굴’이라는 키워드로써 타인의 시선과 기대 속에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규정되며,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을 피할 수 없었던 인물의 심리를 파헤쳐 나간다. 세상에 드러나는 가장 쉬운 평가 대상인 얼굴은 나 자신보다 타인에게 더 자주 노출되며, 타인의 반응에 따른 변화를 그대로 보여 주는 신체 부위인데, 경험과 상상, 실제와 허구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 소설에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144번이나 등장한다. 과연 릴케에게, 그리고 말테에게 ‘얼굴’은 어떤 의미였을까?
출판사 리뷰
시인 릴케가 ‘자기 치료’의 과정에서 탄생시킨 소설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문학 + 철학으로 이루는, 나의 삶과 세계 경험의 확장!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9: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아홉 번째 권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이다. 20세기 시인 중 여전히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거느린 시인 릴케이지만, 51세의 나이로 발몽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정작 그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고통과 고난은, 줄이거나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 느끼고 받아들여 창작의 동력으로 삼아야 하는 ‘진실’이었다. 시인 릴케가 쓴 유일한 장편소설인 『말테의 수기』의 원제는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인데, 써내는 데만 꼬박 6년이 걸린 작품이고, 전통적 방식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 요구되던 20세기 초반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모든 질문은 결국 ‘나의 삶’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우리가 살지 않은 삶을 경험케 하고, 만나지 못한 인물을 만나게 하며, 겪지 못한 일을 체험케 한다. 문학이라는 세계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온갖 정보와 소음 속에서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 문학의 세계는, 현실과 개인의 삶 사이의 완충지대가 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틈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학만의 특별한 상징과 비유는 독자들을 종종 난관에 빠뜨린다. 그리하여 작품은 표면적으로만 이해되거나 읽기가 애초에 포기되기도 한다. 이에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이 기획되었다. 철학과 인문학자의 시각을 빌려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는다면, 그리하여 저마다의 읽기가 수없이 많은 갈래를 만든다면, 거기서 수없이 많은 세계가 생겨날 것일 터이므로.
종종 해설은 문학에 딸린 부록으로 취급되지만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의 해설은 다르다. 그 자체로 한 권의 책과 같은 가치가 있다. 문학 고전을 처음 읽는 독자들, 자신만의 사유를 개척하려는 독자들을 위한 중요한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표지를 앞표지처럼 구성하여 해설을 첫 페이지처럼 읽게 했다. 문학과 맞물린 사유의 긴밀함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말테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삶의 요소들이 전적으로 이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은 늘 불충분하고 결단은 항상 불확실하며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면,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해설 10쪽)
1900년대 초반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회 구조의 변화, 가족 구조의 해체, 개인의 정체성 위기 등을 초래했다. 릴케는 대도시의 익명성에서 경험했던 소외, 고독, 파편화를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 매끄럽게 연결된 이야기 구조가 아닌, 여러 개의 파편과도 같은 글들을 이어 붙인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포와 열망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한 겹 한 겹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공포들, 열망들을 붙여 나간다. 이 조각들은 저마다 특성도, 길이와 구조도, 문체도 다르지만, 단편적인 조각들을 다 읽고 나면 놀랍게도 하나의 완성된 모자이크 작품으로 느껴진다. 한 조각 한 조각이 맞물려 서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전개된다. 첫 번째 차원은 말테가 파리에서 겪는 현재의 경험, 두 번째 차원은 덴마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들, 그리고 세 번째 차원은 역사적 사건과 예술가들에 대한 말테의 사유와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세 차원은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 관계와 의미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계속 변화하는 어조는 서사적 안정감을 의도적으로 흔들어 놓는다. 독자는 읽는 내내 미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경험하게 된다.
고립과 불안, 자아 해체라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자기 변혁의 과정으로 바꾸어 내다!
릴케는 자기와 타인, 내면과 세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자아가 해체되는 상태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이 상태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정신의학적으로는 분열형 인격 장애나 조현병 증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치료가 필요한 불안정한 상태이다. 그러나 릴케는 그 경험을 단순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한 자기 변혁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말테의 수기』인 것이다.
주인공 말테에게 내면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낯선 세계이며, 외부의 것들이 거침없이 침투해 와 흔들리는 공간이다. 자기와 타인의 경계, 바깥세상과의 구분이 종종 희미해지는 이러한 경험은 주인공 '말테'의 불안과 혼란을 더욱 심화시킨다.
나는 몸이 화끈거리고 화가 치밀어 거울 앞으로 달려가 가면을 통해 내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거울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이제 복수할 시간이 찾아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져서 어떻게든 내가 변장하려고 몸에 걸친 것들을 벗으려 애썼다. 그러나 거울은 어찌 된 셈인지 나로 하여금 억지로 얼굴을 쳐들어 거울 속을 들여다보게 하고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영상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대하고 낯설고 끔찍한, 내가 이해할 수 없는데도 내 의지와는 반대로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현실이었다. 이제 그것은 더욱 심해졌고 나는 거울이 되었다. 내 앞에 있는 미지의 존재를 응시하면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순간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 (본문 127쪽)
어린 시절, 말테는 방에서 몰래 다양한 의상을 입고 가면을 써 보며 변장하던 중에 거울을 보다가 의상과 가면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벗어 던지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그것들을 떼어 낼 수 없어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외친다. 타인과 관계 맺을 때, 말테는 자신이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반응하면 결국 그들의 얼굴과 닮아 가며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은 위협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얼굴은 자아를 상징하며, 얼굴이 덮이거나 대체되는 것은 자아의 소멸을 의미한다.
릴케는 자신의 공포와 혼란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한층 성숙한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릴케가 평생 분열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며, 현실에서 온전히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지기 어려웠던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통제하려 했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우울했던 그녀는 아들의 감정이나 내면에는 무관심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릴케에게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내적 갈등과 고립감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립과 자아 해체의 불안 속에서, 그러나 릴케는 하나의 전체, 즉 전일성에 헌신했다. 그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여럿으로 나누어 보았고, 전체를 이루기 위해 파편들을 철저히 검토했다.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모든 불일치와 거짓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소설을 쓰면서 릴케는 평생 동안 자신을 이끌었던 질문, “인간 세계의 유한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의식은 과연 형이상학적 전일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세기 초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유년기의 가정불화와 육군유년학교에서의 경험 탓에 예민하고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마리아의 자식”이라 불렀는데, 일찍이 첫딸을 잃어버린 그녀는 아들이 태어난 자정 무렵이 예수 탄생 시각과 같다는 이유로 아들 릴케가 성모 마리아의 은총으로 태어난 것이라 여겼다. 육군학교 중퇴 후 프라하대학에 입학해 미술사, 문학사, 철학 강의 등을 수강한 릴케는 프라하, 뮌헨, 베를린 등지에서 문학과 예술을 접하며 시적 재능을 꽃피웠다. 1897년 일생에 걸쳐 깊은 영향을 받은 연인 루 살로메를 만난 그는 그녀의 권유로 본명 ‘르네’를 독일식인 ‘라이너’로 바꾸었다. 주요 시집으로 『형상시집』(1902), 『기도시집』(1905), 『신시집』(1907), 『두이노의 비가』(1923), 『오르페우스에 게 바치는 소네트』(1923)가 있고, 초기 산문집, 『로댕론』(1907), 소설 『말테의 수기』(1910) 등이 있다. 백혈병 투병 중 걸린 폐혈증으로 1926년 스위스 발몽요양원에서 생을 마쳤다.
목차
말테의 수기
9월 11일, 툴리에 가에서 9
비블리오테크 내셔널에서 49
도슨트 변지영과 함께 읽는 『말테의 수기』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 7
얼굴과 얼굴 없음 11
소멸의 공포 13
텅 빈 종잇장처럼 18
물려받은 얼굴들 24
환상과 치유 31
살로메, 그리고 클라라 39
떠나기 위해 돌아온 집 45